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중겸(仲謙), 호는 정암(正菴)이다. 1708년(숙종 34) 생원시(生員試)에 장원으로 입격(入格: 합격)하였고, 1710년 학행(學行: 학문과 덕행)으로 참봉(參奉)이 되었다. 벼슬은 영조의 왕자사부(王子師傅) 및 진안현감(鎭安縣監)을 역임했으며, 이기설(理氣說)과 사칠설(四七說)과 경설(經說) 등은 조선 후기의 경학사(經學史) 및 유학사상사(儒學思想史)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다.
1773년 손자 이상진(李商進)이 간행한 초간본 『정암집(正菴集)』에 행장이나 묘갈명 등이 없어 이현익의 행적을 자세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김양행(金亮行)의 『정암집』 서문과 참고문헌을 통해 이현익이 왕자사부(王子師傅)와 진안현감(鎭安縣監) 등의 관직을 역임했음을 알 수 있다.
20권 10책으로 구성된 『정암집』을 통해 이현익의 학술 활동과 성과를 정리해 보면, 첫째, 권1이 시(詩)고, 나머지는 거의 대부분 경학과 성리학에 관련된 글들이다. 이현익은 김창협(金昌協)과 권상하(權尙夏) 등 송시열의 직전 제자를 사사(私事)하였으며, 박필주(朴弼周)·어유봉(魚有鳳)·민이승(閔以升)·박도원(朴道根)·신정하(申靖夏) 등과 교유하였다. 그러므로 학문적 성취는 시문보다는 경학과 성리학에 비중이 높았으며, 학통으로는 송시열의 재전제자 그룹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둘째, 경학적 성과는 주자설(朱子說) 이동(異同)에 대한 분변이 가장 대표적이다. 특히, 청대 학자 이패림(李霈霖)이 1700년 초반에 편찬한 『주자사서이동조변(朱子四書異同條辨)』을 조선 학자들 가운데 처음으로 분석하였다.
셋째, 조선시대의 학자 남효온(南孝溫)·서경덕(徐敬德)·이황(李滉)·조식(曹植)·이이(李珥) 등과 중국학자 왕양명(王陽明)·설선(薛瑄) 등의 이기설(理氣說)과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였다.
넷째, 윤휴(尹鑴)·윤선거(尹宣擧)·윤증(尹拯)과 송시열(宋時烈)의 논쟁을 송시열의 입장에서 변호한 논문들이 다수 있으며, 이를 통해 조선 후기 서인집단 노소분당(老少分黨)의 이론적 쟁점을 파악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조선 후기 노론 내부의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 논쟁, 즉 호락시비(湖洛是非)에 대해서도 열정적으로 자신의 이론을 개진했으며, 예설(禮說)에도 관심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