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용궁(龍宮), 자는 명수(明叟), 호는 가암(可庵)이다.아버지는 전이성(全以性: 1577∼1646)이고,어머니는 평해황씨 황윤규(黃潤奎)의 딸이다. 1615년(광해군 7)에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에서 출생하였으며, 관직에 진출하지 않았다. 1677년(숙종 1)에 권대운(權大運)과 윤휴(尹鑴)의 갈등을 조정하기 위해 유현(儒賢)을 위임함에 있어 참간(讒間)하는 데에 빠지지 말 것을 내용으로 하는 소를 올렸다. 만년에 경상북도 상주시 사곡(沙谷)으로 이주하여 가암(可庵)을 건립하고 독서와 저술로 일생을 마쳤다.
1615년에 출생하여 1683년 69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부인은 선산노씨(先山盧氏) 생원 노석명(盧碩命)의 딸이며, 무덤은 경상북도 상주시 도왕동(桃旺洞)에 있다. 전이성(全以性)의 아들로, 관직보다는 학행(學行: 학문과 덕행)으로 이름을 알렸다. 정경세(鄭經世)의 손자 정도응(鄭道應)과 홍귀달(洪貴達)의 5세손 홍여하(洪汝河)와 교분이 깊었다.
선친 전이성이 정경세의 문하에 수학한 인연으로 만년에 용궁에서 정경세가 우거하던 상주 우산(愚山) 근처 사곡으로 이주하여 가암(可庵)을 건립하였고, 정경세의 유풍을 사모하여 봉산서원(鳳山書院)을 중건하였다. 가암에서 벗들과 시작(詩作) 활동으로 소요하거나, 이황의 「도산잡영(陶山雜詠)」 1본을 모사(模寫)하여 벽에 걸어두고 감상하였는데, 후일 전익구의 5세손 희일(熙一)이 유문을 모으고 강필규(姜必奎)의 발문(跋文)을 엮어 2권 1책 『가암집(可庵集)』을 간행하였다.
1671년 나이 60세에 권대운(權大運)과 윤휴(尹鑴)의 갈등으로 조정이 혼란한 것을 목도(目睹)하고, 민본(民本)과 군주출치(君主出治)의 도리에 대해 소(疏)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