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대한제국기 『연재집』, 『근사속록』, 『패동연원록』 등을 저술한 학자. 순국지사.
개설
송달수가 죽은 뒤 집안의 학문이 기울어질 것을 염려해 학문에 더욱 힘썼으며, 송근수와 외삼촌 이세연(李世淵)의 지도를 받았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83년과 1884년에 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다만 1884년 의제변개(衣制變改)가 단행되자 극력 반대하는 소를 두 차례 올렸다. 그러나 왕의 비답(批答)을 받지 못하자 세상 밖으로 나가지 않고 몸과 마음을 닦는 데 힘을 쏟았으며, 이듬해에는 무주 설천면 구천동 산 속 물가에 서벽정(棲碧亭)을 짓고 도학을 강론하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조정에서 다시 가의(嘉義)로 승품하였으나 역시 응하지 않고 다만 사교(邪敎)를 금지할 것을 상소하였다. 1904년 명헌태후(明憲太后) 홍씨와 황태자비 순명비(純明妃)가 죽자 그 복상(服喪)에 대하여 상소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두 차례의 「청토흉적소(請討凶賊疏)」를 올렸다. 그러나 이에 대한 비답이 없자 상경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을사오적을 처형할 것, 현량(賢良)을 뽑아 쓸 것, 기강을 세울 것 등의 십조봉사(十條封事)를 올렸다. 을사오조약에 대한 반대운동을 계속 전개하려 하였으나 경무사 윤철규(尹喆圭)에게 속아 납치되어 대전으로 호송되었다.
그 해 음력 12월 30일 국권을 강탈당한 데 대한 통분으로, 황제와 국민과 유생들에게 유서를 남겨 놓고 세 차례에 걸쳐 다량의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유서에서 을사오적 처형, 을사조약 파기 및 의(義)로써 궐기하여 국권을 회복할 것을 호소하였다. 송병선이 자결하자 시비로 있던 공임(恭任)이 따라서 자결하여 세간에서 의비(義婢)라고 칭송하였다. 죽은 뒤 의정(議政)에 추증되었다.
학문 및 저술활동
그밖의 저서로도 『연재집(淵齋集)』과 『근사속록(近思續錄)』, 『패동연원록(浿東淵源錄)』, 『무계만집(武溪謾集)』, 『동감강목(東鑑綱目)』 등 53권이 있다.
상훈과 추모
1966년 전국 유림들이 뜻을 모아 대전시 용운동에 용동서원(龍洞書院)을 짓고 이곳에 문충사를 이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 『고종실록(高宗實錄)』
- 『연재집(淵齋集)』
- 『매천야록(梅泉野錄)』
- 『속음청사(續陰晴史)』
-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
-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 『독립유공자공훈록』(국가보훈처, 1986)
- 『기려수필』(송상도, 탐구당, 1974)
- 『조선유학사』(현상윤, 민중서관,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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