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은 인체의 구조와 기능을 조사하여 인체의 보건, 질병이나 상해의 치료·예방 등에 관한 방법과 기술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고조선시대 이래로 원시 주술행위의 전통 아래 민간요법들이 축적되었을 것이며, 삼국시대 이후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발전해 나갔다. 고려 의학의 자주적 발전은 『향약구급방』에서 확인되고, 조선 전기의 의학 발전은 『향약집성방』과 『의방유취』로 대표되며, 한의학 백과전서인 허준의 『동의보감』은 중국과 일본에서도 널리 읽혔을 정도로 유명했다. 개화기에 유입된 서양의학은 광복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체계를 정비하게 된다.
우리나라 상고시대의 원시의술은 다른 원시민족들과 마찬가지로 본능적 충동에서 일어나는 공통된 경험적 치료방법 외에 악정(惡精)을 숭배하는 마술방법들이 주로 응용되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원시시대에는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 특히 질병은 정령(精靈) · 악마의 행위이거나 혹은 그것이 한때 인체에 침범하여 발생되는 것처럼 믿어 왔으므로, 일정한 무주(巫呪)의 마술방법으로 그것을 제거하면 병은 곧 치료될 수 있는 것으로 믿어 왔다.
동북아시아, 특히 시베리아 및 만주의 원주민들은 그런 정령과 악마를 몰아내는 마술자를 샤먼(shaman, 薩滿 · 珊蠻:만주말로는 師巫)이라고 부른다. 샤먼은, 첫째 사제자(司祭者), 둘째 의무(醫巫), 셋째 예언자라는 세 가지 직능을 가지고 있다.
사제자는 제례의 의식으로 신의 의사를 인간에게 전달하는 것이고, 의무는 제물(祭物) 및 신주(神呪)로써 병자로부터 악마를 몰아내는 것이며, 예언자는 점을 쳐서 미래의 길흉을 예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현재 우리들의 민속 중에서 비교적 고유 전통의 형식을 많이 답습해 온 것으로 볼 수 있는 무당들이 하는 ‘굿’ · ‘마지’ · ‘무리’ 등의 행사를 보면, 놀랄 만큼 동북아시아 원주민들의 원시신앙인 샤먼교적 마술법과 악정 숭배의 신앙사상과 거의 일치한다.
특히, 무당을 중심으로 한 그들의 마술법은 주로 인체로부터 병마를 몰아내기 위한 양병술(禳病術)과 구귀법(驅鬼法)을 많이 이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무당은 샤먼과 같은, 질병 · 재화를 일으키는 정령 · 악마를 몰아내기 위한 의무적 마술을 행할 수 있는 자이며, 또는 정령 · 악마를 마술로써 몰아낼 수 있다고 믿는 정령숭배자들이다.
동북아시아의 문화적 연원을 가진 우리의 무당은 샤먼과 같은 세 가지 직능을 행할 수 있는 자로, 그 행사가 병마를 퇴치하는 데 많이 이용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옛말에 질병을 ‘탈’ 또는 ‘덧’이라고 하는데, 이것들은 배탈 · 입덧 등에서 볼 수 있다. 탈과 덧이라는 뜻은 외부로부터 덤벼드는 악의 세력이 인체에 침입한 것을 나타내는 것인데, 이것을 무주적 방법으로 퇴치하는 것을 ‘가신다’ · ‘떤다’ · ‘푼다’ 함은 모두 덤벼드는 악의 세력들을 이탈시키고자 하는 뜻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현재 우리들이 어떤 병에 걸렸을 때에는 ‘병들었다.’고 하고, 병이 쾌차하였을 때에는 ‘병이 나았다.’라고 하는데, 이것들도 정령 · 악마가 몸 안에 침입하였을 때에는 병이 되고 그것을 몸 밖으로 몰아낼 때에는 병이 쾌차한다는 것을 의미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현재까지 쓰이고 있는 말로써도 우리의 원시시대의 질병 관념은 정령 · 악마 등과 같은 원시적 신앙에 지배되어 온 것을 믿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직도 우리들의 민속 중에 남아 있는 질병을 퇴치하기 위한 양병 · 구귀 · 벽사(辟邪) 등과 같은 무주적 술법의 전통에 의해서도 우리의 원시의술은 자연을 초월한 무주적 술법에 많이 의존해 온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또 ‘醫’라는 중국의 고문자인 ‘毉’의 변천과정을 보면, ‘毉’라는 글자는 3부로 나누어 해석할 수 있는데, 상부좌측(上部左側)의 ‘医’는 활이라는 ‘矢’의 무기를 갖춘 갑(匣)을 의미한 것이고, 우측의 ‘殳’도 원래 병기의 일종이며, 하부의 무(巫)는 무당을 상징한 것이다. 이런 3부로 된 ‘毉’자도 무당이 병을 일으킨다고 믿는 정령과 악마를 몰아내기 위하여 화살[矢]이나 창[殳] 같은 무기를 사용하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후세에 하부의 ‘巫’가 ‘酉’로 변하여 ‘醫’가 된 것은 의술이 이미 무당을 떠나 술[酒] 혹은 탕액(湯液)을 먹이는 의사의 손에 돌아간 것을 표시한다. 인접 대륙인 중국의 원시의술도, 동북아시아 원주민들과 같이 무당에 의하여 질병을 일으킨다고 믿어 온 정령 · 악마를 무기로써 내쫓고자 하는 마술행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고조선시대는 초기부터 원시상태의 이동생활을 떠나 정주(定住)의 촌락생활을 경영하여 왔다. 농업에서는 오곡을 재배하고 육축(六畜)을 길렀으며, 의복의 자료에 있어서도 비단 · 마포 등을 생산하는 이외에 짐승들의 모피를 숭상하였고, 음식에는 오곡 · 육축 외에 어류 · 소금 등 해산물을 이용하였으며, 거처에 있어서도 궁실(宮室) · 저택 · 창고 등 건조물을 구분하여 사용하는 등 의식주의 생활이 진보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의학도 그 생활상태에 적응될 만한 정도로 발전되었음을 추상할 수 있다. 그런데 고기(古記)를 인용한 『삼국유사』에 환웅천왕(桓雄天王)이 태백산 신단수하(神壇樹下)에서 신시(神市)를 배포하고, 풍백(風伯) · 우사(雨師) ·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穀) · 명(命) · 병(病) · 형(刑) · 선악(善惡) 등 5대 강목(綱目)으로써 360여 조에 이르는 인간의 모든 일을 주재했다고 하였다.
명을 주재하는 것은 국민의 전 생명을 주재할 수 있는 신주의 지상권능(至上權能)을 의미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병을 주재한 것은 국민의 질병 및 치료방법들을 주재한 것으로 환웅천왕이 우리 의약의 창시조(創始祖)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 기사 가운데에는 정령(政令)을 전달하는 것 외에 기도 · 주원(呪願) · 금기 등과 같은 주력적(呪力的) 방법으로 신령의 용서와 도움을 얻어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였으므로, 민중들이 자신의 불행인 질병재화를 발제(拔除)하는 데에도 이와 같은 방법들이 응용되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또는 식이적(食餌的) 자료나 병을 치료하는 약재로도 사용할 수 있는 쑥[靈艾]과 마늘[蒜]을 응용하기도 하였으므로, 고조선시대에는 원시의술의 전통을 답습하는 주력적 방법과 함께 경험지식을 토대로 한 과도적 민간요법이 시작되었으리라고 추상할 수 있다.
그러나 고조선시대 의학에 관한 지식을 우리 나라 문헌에서는 찾아보기 어렵고, 다만 중국 진수(陳壽)의 『삼국지』 위지동이전이나 『진서(晉書)』 사이전(四夷傳)을 비롯한 후한 때 양웅(揚雄)의 『방언(方言)』, 허신(許愼)의 『설문(說文)』 등에 보이는 고조선지방에 관한 기록 중에서 의학과 직접 또는 간접으로 관련이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간추려 고조선시대의 의학지식의 변천을 추정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시대는 좀 뒤이지만, 중국 남조시대(南朝時代)의 양나라 도홍경(陶弘景)이 위(魏) · 진(晉) 이래 명의(名醫)들이 사용하여온 365종의 의약품을 수록한 『명의별록(名醫別錄)』 중에서 고조선지방산 약재들은 비교적 오랜 전통을 이어 온 것으로 볼 수 있으므로 여기에 함께 포함시키기로 한다.
서기 10년경에 양웅이 수집한 것으로 알려진 『방언』 제3에 약을 마시고(飮藥), 약을 붙이는(傳藥) 독(毒)을 북연(北燕)과 조선지방에서 ‘노(癆)’라 한다 하고, 1세기경에 성립된 것이라고 전하는 허신의 『설문』에도 약독을 조선에서는 ‘노’라 한다고 하였으며,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읍루인(挹婁人)이 화살에 독을 붙여 사람을 쏘면 모두 죽는다 하였다.
『후위서(後魏書)』의 물길국조(勿吉國條)에서도 물길은 항상 8∼9월에 독약을 제조하여 화살에 묻혀 금수(禽獸)를 쏘면 맞는 자는 곧 죽으며, 약을 달이면(煮藥) 독기가 또한 사람을 죽인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에 이미 약을 마시는 내용법(內用法)과 함께 약을 붙이는 외용법(外用法)이 널리 시행되었으며, 또는 약을 달여 독기를 강하게 하는 제약(濟藥)의 기술도 상당히 진보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약재의 생산에서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마한은 금수와 초목이 중국과 거의 같다 하고, 변한과 동옥저는 모두 토지가 비옥하며 오곡에 적당하다 하였으므로, 동방지역에서 동식물계를 통한 약재 같은 것도 많이 산출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믿어진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낙랑산(樂浪産)의 어류(魚類), 위지 동이전에 기록한 예맥 및 부여산의 어류, 마한산의 조류 등등을 볼 수 있어 고조선시대에 동식물계를 통하여 약물로 사용할 수 있는 많은 물품들이 고조선지역에서 생산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물품들이 명의들이 사용한 약품 365종을 수록한 『명의별록』을 비롯하여 『방언』 · 『설문』 · 『산해경(山海經)』 · 『삼국지』 등 같은 시대의 사실을 전한 것으로 알려진 고전에까지 소개된 것으로, 고조선시대에 인접 대륙인 중국과 약물학적 지식의 상호교류가 폭넓게 추진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때부터 이 지역은 중국 한방의학과의 접촉지로서 또는 수용지로서 점차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고대 동방지역에서 폄석(砭石)의 침술이 행해진 것을 볼 수 있다. 중국 한의학의 유일한 고전인 『소문(素問)』 권4 이법방의론(異法方宜論)에 “동방의 지역은, 그 병이 모두 옹양(癰瘍)으로 되어 있어 그 치료가 폄석에 적당한 까닭으로 폄석이 또한 동방으로부터 온 것이다.”라고 하였다.
『산해경』 · 『동산경』에는 고씨(高氏)의 산 아래에 침석(鍼石)이 많다는 문구를 주(註)한 『곽박전(郭璞傳)』에 침석은 가히 지침(砥針)이 되어 옹종(癰腫)을 치료한다고 기술하였다.
『의경(醫經)』 · 『소문』이 한대(漢代) 중기 이후에 성립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그 지식 전통의 어느 부문에서는 이미 춘추전국시대 이전의 의학지식을 전해온 것이며, 『산해경』도 이미 선진시대의 사실을 기술한 것으로 인정되어 있다.
춘추전국시대로부터 선진시대는 고조선시대의 초기와 중기에 해당되므로, 폄석의 술법이 동방지역인 고조선시대에 행해지게 되어 그것이 다시 진 · 한 지역에까지 전해지게 된 것이 아닌가도 생각된다.
이 폄석술은 앞에서 말한 『소문』과 같이 『황제내경(黃帝內經)』 18권 중의 하나인 영추(靈樞:玉樞 제60)에 옹저(癰疽)가 농혈(膿血)로 된 것은 오직 폄석 · 피봉(鈹鋒)을 취할 것이라 하고, 전한시대(前漢時代)의 사마천(司馬遷, 기원전 145∼86경)의 『사기(史記)』 편작전(扁鵲傳)에도 병이 혈맥에 있을 때에는 침석으로 치료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읍루국(挹婁國)이 청석(靑石)으로 촉(鏃)을 만든다 하고, 『진서(晉書)』 숙신조(肅愼條)에 숙신의 일명은 읍루이니 석노(石砮)가 있다 하고, 그 아래에는 숙신이 고시(○矢)와 석노를 춘추전국 때의 주무왕(周武王, 원년은 기원전 1122)에게 헌납하였다고 적혀 있으며, 숙신이 고시와 석노를 헌납한 사실은 5세기경에 좌구명(左丘明)이 저작한 것이라고 전하는 『국어(國語)』의 노어(魯語)에도 밝혀져 있다.
이것으로써 고대 동방인들이 돌[石]로 촉과 노(砮)를 만드는 기술이 우수하였던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근래 함경북도 경흥군 웅기면 송평리에서 석기시대의 출토품 중에 석촉(石鏃) · 석침(石針) · 골침(骨針) 등을 발견하였다.
이러한 석촉 · 석침들이 고조선시대의 폄석술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 것인지 짐작하기 어려우나, 어쨌든 이런 특징 있는 석기시대의 유물들이 남아 있다는 것은 고조선시대의 폄석술을 연상할 수 있는 좋은 자료라고 생각된다.
고구려 · 백제 · 신라가 삼국으로 벌어지기 전인 고조선시대부터 인접 대륙인 중국과의 사이에 의학적 지식의 교류가 전개되었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지적하였다. 그런데 중국의 한의방서가 우리 나라에 전해 오기는 삼국시대 중기 이후에 이르러 문헌적으로 겨우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는 그 국토가 북으로 한토(漢土)와 연접되었으며, 백제도 서로 해양을 격(隔)하였으므로 인접된 우수한 문화의 유통적 상례로 보아서도 삼국시대의 초기경부터 중국의 한 · 위(漢魏, 魏文帝 원년은 220)시대의 우수한 의방서들이 고구려 및 백제에 스며들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삼국시대 후반기 경부터 불교를 신봉하여 왔으므로, 불경 중에 흩어져 있는 인도의설(印度醫說)의 영향도 고려되어야 하리라고 생각된다.
중국의 한의방서는 고구려 평원왕 3년(561)에 중국 강남(江南)에 건국한 오나라의 지총(知聰)이 『내외전(內外典)』 · 『약서(藥書)』 · 『명당도(明堂圖)』 등 164권을 가지고 고구려를 거쳐 일본에 귀화하였다(欽明王 23)는 데에서 시작되었다. 지총이 가져온 의약방서들은 중국으로부터 먼저 고구려에 전해진 것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이 의약서 164권은 그 책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으나 『내외전』은 『한서예문지(漢書藝文志)』에 보이는 『황제내경』 18권 (『소문』 · 『침경』 각 9권)과 『외경』 37권, 『수서경적지(隋書經籍志)』에 적혀 있는 서진(西晉)의 왕숙화(王叔和)가 지은 『맥경(脉經)』 10권과 『황제팔십일난경(黃帝八十一難經)』 3권 등을 들 수 있다.
『약서』는 본초서(本草書)를 가리킨 것으로, 한 · 위시대의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의 주해서와 남조시대(420∼589)의 양나라 도홍경의 『신농본초경』 3권 및 『집주(集註)』 7권과 『명의별록』 3권 등을 들 수 있다. 『명당도』로는 서진의 황보밀(皇甫謐)의 『갑을경(甲乙經)』 10권, 『명당공혈도(明堂孔穴圖)』 3권 등을 지적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의방서들은 그 당시 중국 위 · 진시대의 중요한 의약서로서 한방의학의 기초지식에 속한 의약서들이지만, 북조시대(386∼618)의 북제(北齊)의 서지재(徐之才)가 저술한 『서왕방(徐王方)』 5권이 고구려에 전하여진 것도 752년에 왕도(王燾)가 편술한 『외대비요(外臺祕要)』 권18 각기상(脚氣上)에 『고려노사방(高麗老師方)』과 함께 소개되어 있다. 고구려는 지역적으로 인접된 북조시대 의학과 교류관계가 더 긴밀하였던 것이 아닌가도 추상된다.
그리고 백제는 고구려보다 좀 뒤져서 서동양진(西東兩晉)으로부터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있으나, 지역적으로 서면해양(西面海洋)을 격하였으므로 남조시대에 이르러 그 접촉이 더욱 빈번해졌다.
『후주서(後周書)』 이역전(異域傳)에 백제는 음양오행을 알고 의약 · 복서(卜筮) · 점상(占相)의 술을 안다고 하였다. 이것으로 백제와 중국 남조시대 사이의 의약적 관계를 연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진대의 갈홍(葛洪)의 『주후방(肘后方)』 6권이 백제에 전해진 것도 『백제신집방(百濟新集方)』에 인용되어 있는 데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밖에도 남조시대의 도홍경이 편술한 『명의별록』이나 『신농본초경집주』에도 약재의 산출지로서 조선 · 고구려 · 백제 등이 여러 곳에 소개되었다.
신라는 중국과의 교통에 있어 북으로는 고구려, 서로는 백제를 경유하여야 했으므로 한의방을 직접 접촉할 기회를 가지기 어렵고, 초기에는 고구려 · 백제를 통하여 간접으로 그 의방서들을 접촉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도홍경의 『신농본초경집주』나 659년(신라 무열왕 6, 唐 顯慶 4)에 소경(蘇敬)이 편술한 『신수본초(新修本草)』에는 신라는 약재의 산출지로 소개되어 있지 않다.
739년(신라 효성왕 3, 唐 開元 27)에 편성된 것으로 알려진 진장기(陳藏器)의 『본초습유(本草拾遺)』나 756년(신라 경덕왕 15, 唐 肅宗元年)경의 저술이라고 전하는 이순(李珣)의 『해약본초(海藥本草)』 등에 처음으로 신라가 보인다. 이것으로 보아서도 신라의 중국과의 의약적 교류가 고구려나 백제보다 훨씬 뒤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와 백제는 주로 서동양진 및 남북조시대의 한의방을 수입하였으나, 신라는 삼국통일 후 수 · 당 의학을 직접으로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
삼국시대의 불교가 인도로부터 직접 전해져온 것이 아니고 대체로 중국을 매개로 들어온 까닭으로, 한의방의 수입과 비슷하게 주로 중국과의 지역적 조건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인도의 불법이 372년(소수림왕 2) 고구려에 처음으로 수입되고, 12년이 지난 384년(침류왕 1)에 백제에 전해졌으며, 신라에는 고구려에 수입된 뒤 약 50년이 지난 눌지왕(訥祗王) 때에 고구려로부터 전파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시대 초에는 고조선시대의 전통을 이어받은 민간적 경험방법과 함께 중국 남북조시대의 의방서들을 접촉할 수 있게 되었는데, 불교가 전해져 오면서부터 보살 내지 신중(神衆)들의 힘을 빌려 병액(病厄)을 발제하고자 하는 풍습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고구려에 불법을 처음으로 전한 아도법사(阿道法師)의 사적을 기술한 『 삼국유사』에 신라 눌지왕의 딸의 병에 왕이 묵호자(墨胡子)를 시켜 분향, 기원함으로써 왕녀의 병이 나았고, 그 아래에 264년(미추왕 3)에 신라의 성국공주(成國公主)의 병에 의무(醫巫)의 효과를 보지 못하고 의(醫)를 사방에 구하던중 아도법사가 돌연히 나아가서 그 병이 곧 나았으며, 『삼국사기』에 636년(신라 선덕여왕 5) 왕의 병에 『인왕경(仁王經)』을 강독하여 병을 퇴치하였다는 등등의 기사를 여기저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백제 · 신라의 승려로서 의방에 통한 승의(僧醫)들이 많이 일본에 건너가서 일본의학 건설에 많은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이 시대에는 불사와 의료를 겸행하는 승의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원래 인도 의학은 이집트 의학과 마찬가지로 승려 의학에 속한 것이므로 박학고승(博學高僧)들이 대개 의방에 통하게 되어 있다. 불교의 보살들이 반드시 통달하여야 하는 오종의 지식인 5명(五明) 가운데에는 반드시 의방명(醫方明)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불교의 수입과 함께 그 불전(佛典) 중에 흩어져 있는 의설(醫說) · 의방(醫方)들이 승려를 거쳐서 쉽게 응용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인도 의학은 초기에는 승려 의학으로서 기도 · 찬가(讚歌) · 주문 등 마술에 많이 의존하였으나 인도 의학의 중시조라고 할 수 있는 월지국(月支國)의 카니슈카(Kaniska)왕의 시의인 카라카(Charaka)가 기원 전후에 탄생하면서 인도 의학의 면모를 새롭게 하였다.
인도 의설은 중국 한의방의 음양오행설과는 달리 질병은 지 · 수 · 화 · 풍의 4원소가 고르지 않은 데에서 기인된다는 사대부조병리설(四大不調病理說)을 주창하고 있다.
이 병리설은 일부 학자들에 의하여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의 4액체병리설(四液體病理說)과 비슷하다는 점을 들어 인도 의학이 그리스 의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하고, 다른 학자들은 인도 의학의 독창성을 강조하여 두 의학 전통의 전후문제에 관하여 의견은 일치하지 않으나 두 의학 계통이 서로 긴밀한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아마 알렉산더(Alexander)대왕의 인도 원정이 두 전통의학의 접촉을 긴밀하게 하였을 것이라는 데 귀착되고 있다.
고구려가 삼국 중 어느 나라보다도 중국의 한의방을 가장 먼저 접촉하게 된 것은 지역적으로 보아 쉽게 짐작할 수 있으려니와, 561년에 중국 강남의 오나라 사람 지총이 『내외전』 · 『약서』 · 『명당도』 등 164권을 가지고 고구려를 거쳐서 일본에 귀화하였다는 것은 위에서 이미 기술한 바 있다. 이 의방서들은 한의학의 기초 지식에 속한 중요한 의약서이다.
고구려의 의방서로서 『고려노사방』이 752년(唐 天寶 11)에 왕도가 편술한 『외대비요』에 소개되어 있다. 이 방서가 고구려의 노대가(老大家)의 방서라는 말인지, 혹은 단독방서로 된 것인지 인용된 글이 너무 간략하여 그 내용을 밝히기가 어렵다.
그러나 『외대비요』에 인용한 『각기충심번민방(脚氣衝心煩悶方)』은 북조시대 북제의 이름 높은 의가인 서지재가 저술한 『서왕방』과 비슷한 것인데, 이 방서는 『고려노사방』과 같다고 적혀 있다.
고구려는 지역적으로 인접된 중국 북조시대의 의학과 접촉관계가 긴밀하였던 것을 추측할 수 있으며, 고구려 의학의 특색의 하나로 연금술과의 관계를 들 수 있다.
연금술은 이집트에서 시작되어 그리스 사람들이 그 술법을 알렉산드리아에 전하고, 다시 동로마제국을 거쳐서 아랍에 수입되었다가 아랍으로부터 유럽에 역수(逆輸)되어 17세기 중엽까지 계속 발전하여 왔다.
그런데 중국 남조시대의 도홍경이 편술한 『신농본초경집주』의 금속조(金屬條)에 “금은 악을 제거하나 독이 있어 연숙(鍊熟)하지 않고 마시면 사람을 죽인다. 고려 · 부남 · 서역 등 외국에서 만든 그릇은 모두 잘 연숙되었으므로 가히 먹을 수 있다.”라 하였다.
여기의 고려는 고구려를 가리킨 것이고, 부남은 캄보디아 남부로 이미 인도화(印度化)된 곳이며, 서역은 중앙아시아 및 이해서북방(裡海西北方)의 여러 나라를 이르는 것으로서 인도의 불법이 이곳으로부터 중국에 처음으로 전하여졌다.
고구려의 연금술은 그리스 사상과 긴밀한 관계를 가진 인도 불법과 함께 전하여진 것으로 추상할 수 있으려니와, 전한 때 사마천의 『사기』 봉선서(封禪書)에 “단사(丹砂)가 화하여 황금이 될 것이며, 그 금으로써 식기(食器)를 만들면 더욱 수한다. 더욱 수하면 해중봉래선자(海中蓬萊仙者)를 볼 것이라 하며 연숙된 단사의 금으로 식기를 만들어 사용하면 신선이 된다.”라고 하였다. 고구려에서 연숙한 금으로 식기를 만든 것은 불로장생을 추구하는 신선사상과도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도 생각된다.
백제는 한의방의 접촉이 고구려보다 시기적으로 좀 뒤졌으나 중국 남조와는 서면해양을 격한 지역적 관계로 남조시대의 의학지식을 활발히 전개하여왔다. 『후주서』 백제전에 백제와 남조와의 사이에 의학적 지식의 교류가 있었음을 연상할 수 있는 기사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일본에 건너간 백제의 의인들 중에는 의박사와 채약사(採藥師)가 따로 있어 그 지식이 전문적으로 서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승려로서 의학에 능통한 승의들이 배출되어 남조시대의 한의방과 불교를 통한 인도 의방들을 융합시켜 백제 의학의 독자적 발전 태세를 갖추게 되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백제에서 전문의방서로서 『백제신집방』을 편집하였다는 데에서 추증할 수 있다.
이 방서는 이미 망실되었으나, 고려 성종 3년(984)에 일본의 단파(丹波康賴)가 편술한 『의심방(醫心方)』 중에 두 방문이 인용되었는데, 이 방문들은 갈홍이 편술한 『주후방』에 의거하고 있어 백제 의학이 이미 중국 남조시대의 한의방을 토대로 한 자주적 발전의 태세를 갖추어온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신라의 활동 중심지인 진한 · 변한의 고지(古址)는 오랫동안 현저한 생활의 활동지였으므로 고조선시대의 전통적 민간 경험의학을 지켜왔으리라고 추상되나 초기에는 고구려 · 백제를 통하여 간접으로 중국의 한의방을 접촉하여 오다가 중국 남북조시대의 말경에는 그 의방들을 직접 수입할 수 있게 되었다.
신라의 의인으로 일본의 청빙(請聘)에 응한 김파진한기무(金波鎭漢紀武:金은 姓, 波鎭은 官名, 漢紀는 號, 武는 이름)가 414년(실성왕 13) 일본에 건너가서 윤공주(允恭主)의 병을 완치하였는데,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이 사람이 깊이 약방을 안다고 하였다.
이때는 신라와 중국과의 교통이 그다지 원활하지 못한 때이며, 고구려 · 백제에 있어서도 한의방의 영향이 그렇게 완숙하지는 못한 때이다. 이 약방은 고구려 · 백제를 통하여 간접으로 전하여진 한의방의 영향을 받은 어떤 고유 전통을 보존하여 온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시대 중엽인 283년경(백제 고이왕 말경)부터 경서(經書), 오경박사(五經博士) 및 기공(技工)들을 비롯한 백제의 문물 · 제도가 일본에 건너간 것은 두 나라의 사적에 이미 밝혀져 있거니와, 의약에 있어서도 앞에서 이미 기술한 것과 같이 414년에 신라의 김무가 일본에 가서 윤공주의 병을 완치하여 효과를 보았다.
그 뒤 459년(개로왕 5)에 일본이 양의(良醫)를 백제에 청하므로 백제에서 고구려 의덕래를 일본에 보냈는데, 그 자손들이 대대로 나니와(難波)에서 의법을 계승하여 나니와약사(難波藥師)라는 칭호도 얻었다. 그 뒤 일본에 당의방(唐醫方)을 처음으로 직접 수입한 나니와약사 혜일(惠日)이 덕래의 5세손이다.
그리고 552년(성왕 30)에 일본이 백제에 의박사(醫博士) · 역박사(曆博士) · 역박사(易博士) 등의 체번(遞番)과 약물을 청하므로 다음해에 의박사 나졸(奈卒:六品) 왕유릉타(王有陵陀)와 채약사 시덕(施德, 八品) 반양풍(潘量豊)과 고덕(固德, 九品) 정유타(丁有陀)를 보냈으며, 561년에 오나라 사람 지총이 『내외전』 · 『약서』 · 『명당도』 등 164권을 가지고 고구려로부터 일본에 귀화하였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이다.
그리고 602년(무왕 3, 日本 推古王 10)에 백제의 승려 관륵(觀勒)이 천문 · 지리서 및 둔갑방술서(遁甲方術書)를 가지고 일본에 건너가서 그 방술을 접습하게 하였으며, 642년(선덕여왕 11, 日本 皇極王 1)에 기하변기남마(紀河邊幾男麽)가 신라에 가서 침술(鍼術)을 배우고 돌아와서 침박사에 추대되었다는 침가(鍼家)들의 전설이 있다 하였다.
670년(문무왕 10)에는 학술로써 일본의 작위(爵位)를 받은 백제인들이 많은데, 그 중에는 약물에 정통한 사람들이 많았으며, 685년(신문왕 5)에 시의(侍醫) 억인(億仁)이 임종시에 늑대일위(勒大一位)를 받고 이어 100호(戶)를 지급받기까지 하였는데, 억인은 후부약사주(後部藥使主)로 백제인의 후예였다. 이와 같이 백제의 후예들이 시의로 봉직한 것은 그 당시의 일본 의학이 백제에 많이 의존하고 있었던 것을 짐작하게 한다.
이리하여 일본 의학은 414년경으로부터 거의 300년에 걸쳐 삼국시대의 한의방에 의하여 발전의 기초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신라는 삼국통일을 완성한 뒤로 당나라의 학술과 제도들을 연구하기 위하여 많은 유학생들을 파견하였으며, 사절들의 왕래와 물화의 교역으로 당나라의 문물제도를 더 긴밀히 접촉할 수 있게 하였다.
의학에서도 의학교육과 의료제도들을 주로 당나라에 의거하도록 하는 한편, 불교의 융성과 함께 인도의 의설 · 의방 등에도 많은 관심을 갖게 하였다.
그러나 신라는 수 · 당 의학이나 인도 의설에만 의존하지 않고 양자를 융합한 자체 의방서를 편성하기도 하였다. 이 의방서들은 이미 망실되고, 겨우 그 방서의 이름과 3, 4개의 방문이 남아 있을 뿐이므로 그 내용을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한방의학과 인도 의설을 토대로 자체 의학의 전통을 보존하는 데 힘써 온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신라의 활동 중심지인 수도 경주를 비롯한 진한 · 변한의 고지는 오랫동안 우리 선민들의 생활 발전의 근거지로서 선행적 고유 전통이 깊은 근거를 갖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인접한 우수한 중국의 수 · 당 의학의 밀려드는 힘에는 어쩔 수 없이 그 의학의 권내에서 발전의 태세를 가지게 되었다.
『삼국사기』 직관지(職官志)에 692년(효소왕 1)에 처음으로 ‘의학’을 두고 박사 5인으로 학생들에게 『본초경』 · 『갑을경』 · 『소문경』 · 『침경』 · 『맥경』 · 『명당경』 · 『난경』 등을 교수하게 하는 의학교육제도가 밝혀져 있다.
이 제도는 당나라의 의학교육제도를 거의 그대로 옮겨 온 것이지만, 이런 의경들은 앞에서 이미 기술한 것과 같이 삼국시대 중기 이후에 고구려 · 백제에 이미 전해 온 것들이다.
이 의경들은 중국 한의방의 기초 지식에 속한 의서로, 한 · 위 및 서동 양진 · 남북조시대로부터 수 · 당에 이르도록 한방의가들이 반드시 배우고 통달해야 하는 귀중한 고전의경들이며, 아직까지도 한방의학을 연구하고 그 술업(術業)에 종사하는 의인들에게는 반드시 알아야 하는 고전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기초 부문에 속한 의경들이 신라 의학교육의 기초가 되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기초 의학 외에도 수 · 당 이래로 임상의가(臨床醫家)들이 귀중히 여겨 오던 『상한론』 · 『병원후론(病源後論)』 · 『천금방(千金方)』 · 『외대비요』 등 의방서들도 의경과 함께 널리 실용되었으리라고 추상하나, 그 방서들의 이름은 문헌에 보이지 않고, 다만 796년(원성왕 12)에 신라 하정사(賀正使) 박여언(朴如言)의 청으로 당나라의 덕종이 칙선(勅選)한 『정원광리방(貞元廣利方)』 5권이 신라에 전하여진 것이 문헌에 밝혀져 있을 뿐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불경을 주해한 박학고승으로서 의상 · 경흥 · 태현 · 원효 · 승장 · 혜초 등이 있는 것은 이미 아는 바이지만, 이들의 해석으로 불전 중에 흩어져 있는 인도 의설에 대한 지식도 널리 전파되었을 것이다.
『금광명경(金光明經)』의 제24 제병품(除病品) 같은 인도의 고대의설(古代醫說)도 경흥 · 태현 · 원효 · 승장 등 명승들의 소주(疏註)에서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신라시대의 의방서로서 불교적으로 윤식(潤飾)된 방서들이 단편적이지만 일본의 단파가 편술한 『의심방』 중에 보인다. 이상의 의방들은 약을 먹을 때 주문을 읽어서 병액을 제거하고자 하는 인도 고대의학의 전통을 가진 것이며, 그밖에 속수자(續隋子) · 노봉방(露蜂房) 등 약재를 사용하는 치료법방도 기록되어 있어 당시 신라 법사로서 의방에도 능한 승의가 많았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삼국시대에는 이미 중국 남북조시대의 본초서들이 수입되었으며,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와서는 『본초경』이 의학교육의 교과서로서 다른 의경들과 함께 채택된 것은 이미 앞에서 논하였다.
신라산 약재들이 국제간의 수호품으로 많이 증여되었거나 중국 및 일본의 여러 문헌 중에서도 신라산 약재들이 적지 않게 소개되었다. 그리고 남방열대 및 서역지방산의 의약품들도 당나라를 거쳐서 간접으로 수입되어, 신라 의인들의 본초학에 관한 지식은 학술적으로 많은 발전을 보았으리라고 믿어진다.
신라 사적에 기재된 국제간의 중요한 수호품의 약재로서 인삼 · 우황(牛黃) · 속수자 · 노봉방 · 차(茶) 등을 들 수 있는데, 특히 인삼과 우황은 국제간의 증품으로서 『삼국사기』에 여러 번 보인다.
이것은 신라산의 인삼과 우황이 그 품질이 우수한 것을 표시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신라인들의 약품 재배나 채집에 관한 지식이 우수하다는 것을 인정하였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신라산 약재로서 중국 및 일본에 소개된 중요한 품목들을 간추려 보면, 인삼 · 남등근(藍藤根) · 대엽조(大葉藻) · 곤포(昆布) · 백부자(白附子) · 토과(土瓜) · 박하(薄荷) · 형개(荊芥) · 해석류(海石榴) · 위령선(威靈仙) · 매인화(梅仁花) · 국(菊) · 가자(茄子) · 석발(石髮) · 해송자(海松子) · 도(桃) · 진자(榛子) · 올눌제(膃肭臍) · 신라양지(新羅羊脂)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약재들이 인접 대륙이나 해양을 격한 일본에까지 소개된 것은 신라 약품에 대한 우수성을 인정한 것이지만, 신라 의인들의 약물학에 관한 지식이 국제적으로도 널리 알려졌던 한 증거로도 볼 수 있다.
그밖에 남방 및 서역산의 약재로는 『삼국사기』 잡지(雜志)에 신라각골품층위(新羅各骨品層位)에 사용된 각 물품 중에 남방열대산으로 오서(烏犀) · 자단(紫檀) · 침향(沈香) 등을 들 수 있으며, 서역지방산으로는 석류 · 목숙(苜蓿) 등을 들 수 있다. 오서는 검은 서각(黑色犀角)을 말하는데, 서각 · 자단 · 침향 등은 남해 여러 나라에서 생산되는 것이다.
장식품 외에 약재로도 응용되며, 목숙은 일명 연지초(連枝草, 거여목 혹은 게목)라고도 한다. 목숙은 전한 때 사마천의 『사기』 대완열전(大宛列傳)에 그 이름이 보이는데, 신라에서도 말의 사료나 관상용으로 재배되었다.
중세 고려 의학은 초기에는 당나라 의학의 전통을 이어받은 신라 의학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불교의 융성과 함께 인도 의방의 영향도 받게 되었으며, 중기에 들어서는 중국의 신흥국가인 송나라와의 접촉이 빈번하게 됨에 따라 더욱 그 의학지식을 섭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송나라 상인 및 아랍 상인들을 통하여 아랍 · 서역 및 남방열대산의 약품들을 수입하게 되면서 그 지식을 융합시켜 점차로 자주적 발전의 태세를 보이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고려의 서북방에 멀리 떨어져 있던 몽고족이 차차 남으로 내려와서 중국을 통합하고, 원이라는 몽고제국을 건설하였다. 고려와 원나라는 특별한 관계로 문화의 교류가 빈번하였는데 의학적 지식에 있어서는 그 관계가 더욱 밀접하였다.
고려 의학은 인접한 송나라와 원나라의 의학을 수용하면서 수입된 서역 및 남방열대산 의약품들과 함께 우리 나라에서 산출되는 향약(鄕藥)에 대한 연구도 활발히 전개시켜 종말기(終末期)에는 자국산인 향약의 전문방서들을 보게 되었다. 그러므로 중세 의학의 변천과정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그 시기를 초 · 중 · 말 3기로 나누는 것이 서술하기에 편리하리라고 생각된다.
초기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나라를 세우던 918년으로부터 약 100년이 지난 제8대 현종 초인 1018년까지를 가리키는 것인데, 이 시기에는 수 · 당 의학의 영향을 많이 받아 온 신라 의학의 전통을 거의 그대로 답습하였던 것은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다.
의학교육에서는 개국부터 중앙 및 서경(西京:평양)의 학원에 의과를 설치하고 관설재단인 학보(學寶)를 두어 교육을 권장하였으며, 그 뒤 987년(성종 6)에는 전국 12목(牧)에 경학과 마찬가지로 의학박사 1인씩을 배치시켜 의학교육을 실시하였다.
의업의 과거고시(科擧考試)는 현재의 의사국가시험에 해당되는데, 958년(광종 9)에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그 고시제도는 의업식(醫業式)과 주금식(呪禁式)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의업식 고시과목은 통일신라시대에 의학교육의 교과서로 채용하였던 수 · 당 이래의 고전의경인 『소문경』 · 『침경』 · 『갑을경』 · 『본초경』 · 『명당경』 · 『맥경』 · 『난경』 · 『구경』 등이 거의 채택되었으나, 주금식의 과목에는 『맥경』 · 『명당경』 · 『본초경』 외에 『유연자방(劉涓子方)』 · 『대경침경(大經針經)』 · 『소경창저론(小經瘡疽論)』 등이 보일 뿐이다.
의료제도는 중앙의료기관과 궁내의 어약(御藥)을 담당하는 기구가 따로 나누어져 있었다. 중앙의 의사직제는 대의감(大醫監)을 설치하고 그 아래에 대의감 · 감(監) · 소감 · 승(丞) · 박사(博士) · 의정(醫正) 등이 있고, 궁내에는 상약국(尙藥局)을 따로 두어 봉어(奉御) · 시어의(侍御醫) · 직장(直長) · 의좌(醫佐) 등으로 임명하였으며, 그밖에 어선(御饍)을 맡은 상식국(尙食局)에는 식의(食醫)가 따로 전속되어 있었다. 이러한 직제나 직명들은 중국의 남북조 이래 수 · 당의 전통에 많이 의거하고 있다.
그리고 서민들의 구료사업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제위보(濟危寶) ·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 · 혜민국(惠民局)을 설치하였다. 보(寶)는 고려시대 관설재단의 명칭인데, 제위보는 동서대비원과 함께 인민들의 환과(鰥寡) · 고독(孤獨) · 빈궁(貧窮) · 질고(疾苦) 등을 구료하는 당시의 구료행정을 전담하는 상설기관이며, 혜민국은 일반서민들의 구료를 담당하는 관서이다.
이상과 같이 고려는 초기부터 신라의 구제(舊制)에 의존한 의학교육제도를 실시하면서 의업의 과거법을 새로 제정하고 의료행정제도의 정비, 구료정책의 실시 등 의학 및 의료사업에 눈부신 발전을 보게 되었다.
중기는 1018년(현종 9)경부터 1259년인 제23대 고종 말년까지 약 240여년 간이다. 이 시기는 중국의 신흥국가인 송나라와의 접촉이 빈번해지게 되어 송의(宋醫) · 송상(宋商)들이 수시로 왕래하였으며, 한편으로는 해외와의 교통도 넓어져서 우리 나라에서 산출되지 않는 희귀한 약재들이 많이 수입되었다.
그리고 불교의 대장경판(大藏經板)의 조각(雕刻)과 더불어 인도 의방서들의 보급도 늘게 되었는데, 중기의 후반기 경에 들어서는 그 지식들을 융합한 고려 자체의 경험방서들을 편집하기 시작하였으며, 그와 함께 고려에서 생산되는 향약의 경험방서들도 차차로 간행되어 고려 의학의 자주적 발전에 새로운 면모를 드러내었다.
고려와 송나라는 국제적 우호관계가 두터워졌으므로 문화적 교류도 활발해졌다. 의학과의 관계에서도 중기의 초기 경부터 차차로 왕성해지게 되었는데, 송나라 의학의 수입을 논하는 데에는 의서 · 의인 · 약품 등으로 나누는 것이 편리하리라고 생각된다.
송대 의서로는 1058년(문종 12)에 송나라에서 교정의서국(校正醫書局)을 따로 설치하고 한 · 당 이래의 고전 의서인 『소문』 · 『명추』 · 『상한론』 · 『맥경』 · 『갑을경』 · 『천금방』 · 『외대비요』 등을 교정, 복간하였는데 이 책들은 간행된 뒤 일찍부터 고려에 많이 전해져 왔다.
이것은 1093년(선종 10) 고려에 송대의 선본서(善本書)가 많다는 것을 듣고 1086년 송나라 철종의 요청에 따라 고려에서 『황제침경(黃帝鍼經)』 9권 1부를 송나라 철종에게 보냈다는 데에서 짐작할 수 있다. 그 당시 고려에 송나라 교정의서국의 복간의서들이 많이 수입, 보존되었던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1017년(현종 8)에 송나라에서 칙선의서(勅選醫書)인 『태평성혜방(太平聖惠方)』(100권)을 2회에 걸쳐 보내 왔으며, 1101년(숙종 6)에는 『신의보구방(神醫補救方)』(1,000권)을 보내오기도 하였다.
송나라 의인으로는 한림의관(翰林醫官) · 한림의유(翰林醫諭) · 태의국교수(太醫局敎授) · 의관(醫官) · 의조교(醫助敎) · 유의(儒醫) 등 수많은 의사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고려에 왕래하였다.
그 중에서 중요한 의인들은 1078년에 문종의 풍비증(風痺症)을 치료하기 위하여 송나라에서 한림의관 형조(刑慥) · 주도능(朱道能) · 심신(沈神) · 소화급(邵化及) 등을 파견하였으며, 1103년에는 고려의 요청으로 의관 모개(牟介) · 여병(呂昞) · 진이유(陳爾猷) · 범지재(范之才) 등을 국신사(國信使)와 함께 내조(來朝)하게 하였다.
1118년(예종 13)에도 고려의 청으로 한림의관 · 태의국교수 양종립(楊宗立)과 한림의유 · 태의국교수 두순거(杜舜擧), 한림의유 · 태의국교학 성상유(成湘遺), 공랑시(功郎試) · 태의(太醫) 진종인(陳宗仁), 태의 남출(藍茁) 등이 내조하였으며, 1123년(인종 1)에 고려의 청으로 한림의학 양인(楊寅), 의관 이안인(李安仁) · 학수(郝洙) 등을 보내오기도 하여 송나라와의 사이에 의학지식의 교류가 빈번하였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약품의 교역에서는 고려에서 송나라로 건너간 것은 주로 인삼 · 향유 · 송자(松子) 등을 들 수 있으나, 송나라로부터 수입된 약재들은 각종 향약(香藥) · 서각 · 용뇌(龍腦) 등을 들 수 있는데, 이것들은 주로 남방열대산의 희귀한 약품들이다.
그리고 문종의 풍비증을 치료하기 위하여 1079년에 송나라에서 보내 온 약재 100품이 있는데, 이들 중에는 서융산(西戎産)으로 천축향(天竺香) · 안식향(安息香) 등을 들 수 있으며, 경주(慶州) 및 광주(廣州) 등의 지명을 붙인 침향 · 목향(木香) · 정향(丁香) · 몰약(沒藥) · 빈랑(檳榔) 등을 볼 수 있다. 서융산은 서역으로부터 들어온 서양산 약재들을 의미한 것이며, 경주 및 광주산 등은 주로 남방열대산 약품으로 고려에서는 수입되기 어려운 것들이다.
그리고 송나라 조여괄(趙汝括)의 『제번지(諸藩志)』에는 신라 및 고려의 소산으로 인삼 · 수은 · 사향 · 송자 · 진자 · 석결명(石決明) · 송탑자(松塔子) · 방풍(防風) · 백부자 · 복령(茯苓) 등을 들었는데, 이것은 고려와 송나라와의 사이에 이런 약품들이 서로 교역되었다는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송나라 의서의 수입, 의인들의 왕래, 의약품의 교역은 당시의 고려 의학 발전에 현저한 영향을 미쳤으리라 짐작된다.
신라 의학의 전통을 이은 고려 의학이 인도 의설의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것은 이미 짐작할 수 있는 바이지만, 중기 초인 1010년경에 초조대장경판(初雕大藏經板)을 조각할 때에 인도계의 의방서들을 채록할 수 있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으나 불행히도 초조대장경판은 현재 그 목록조차도 전하지 않고 있어 그 사실을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중기 말경인 1236년(고종 23)경에 판각한 재조대장경판(再雕大藏經板)에는 『불의경(佛醫經)』 · 『의유경(醫喩經)』 · 『구료소아경(救療小兒經)』 · 『가섭선설의여인경(迦葉仙說醫女人經)』 등을 비롯한 십여 종의 의방서들을 볼 수 있어, 초조대장경판에서도 인도 의방서들이 채록되었으리라는 것을 연상할 수 있게 한다.
이상의 인도 의방서 외에도 당나라의 의정(義淨)이 역술한 『남해기귀내법전(南海奇歸內法傳)』 중의 27 선체병원(先體病源), 28 진약방법(進藥方法)과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 중의 제병품(除病品) 같은 인도 의설과 『송사예문지(宋史藝文志)』나 『숭문총목(崇文總目)』 등에 채록된 인도의 명의 기파(耆婆)의 『기파오장론(耆婆五臟論)』 · 『맥경』, 용수보살(龍樹菩薩)의 『용수안론(龍樹眼論)』 등과 같은 명의들의 의방서가 불교의 융성과 함께 고려에도 전해졌다.
또한 고려의 역대 군왕 중에, 특히 정종 · 문종 · 예종 · 인종 등은 병이 났을 때에는 먼저 불법의 기도로써 구병의 절차를 밟았으며,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의 고려 견문실록인 『고려도경(高麗道經)』 권18에도 보제사(普濟寺) 승당(僧堂)에 민중들에게 게시한 글에 대천경권(大千經卷)이 모두 약병의 설이라고 적고 있다.
이런 기사들은 당시 고려의 왕실이나 민중들 사이에 불교의 신앙과 함께 인도 의방에 관한 신념이 깊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하려니와, 그 당시 명승들 중에 의방에 통한 승의들에 의하여 인도 의방들이 상당히 보급되었으리라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아랍은 7세기부터 8세기 말경까지 동양 해상무역에 눈부신 활약을 해왔다. 그들은 페르시아만으로부터 인도양을 지나 말레이반도를 돌아 중국 남방의 광둥(廣東), 영남의 교주(交州), 강남의 양저우(揚州), 푸젠(福建)의 천주(泉州) 등을 거쳐서 한국 및 일본의 해안에 이른다.
아랍은 중국에서 대식(大食)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페르시아인들이 아랍인들을 타지크(Tadzhik)라고 부르는 소리를 한역한 것이다. 또는 회회(回回)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것은 아랍인들이 거의 회회교도인 까닭이다.
그런데 아랍 상인들이 고려에 직접 오기는 1025년(현종 16) 9월, 그 다음해 9월, 1040년(정종 6) 11월의 3회이다. 처음 1 · 2회에는 『고려사』에 방물(方物)들의 품목이 밝혀져 있지 않으나 제3회에 가져온 약품들은 수은 · 용치(龍齒) · 점성향(占城香) · 몰약 · 대소목(大蘇木) 등으로 되어 있다.
이 약품 중 용치는 해마치(海馬齒)의 화석으로 안신(安神) · 강정(强精) 작용을 가진 희귀한 약재이고, 점성향은 인도차이나반도의 교지(交趾)에서 생산되는 향료이며, 몰약은 홍해 연안에서 나는 관목의 나무껍질에서 생기는 흑색유집(黑色乳什)의 몰약지(沒藥脂)이며, 소목은 인도 동방에서 생산하는 소방목(蘇方木)을 가리킨 것인데, 약용 및 도료에 사용된다. 이러한 홍해 연안 및 교지의 열대약품들이 아랍 상인들을 거쳐서 고려에 직접 수입되었다.
그런데 중국 푸젠성 천주의 무역검사관인 조여괄이 1223년(고종 10)에 편술한 『제번지』에 대식국산으로 서각 · 유향 · 용연향(龍延香) · 목향 · 정향 · 안식향 · 몰약 · 붕사(硼砂) 등이 열거되어 있고, 진나라의 계함(稽含)이 편술한 것이라고 전하는 『남방초목상(南方草木狀)』 3권에도 이런 향약들은 중국 남방에서 산출되지 않고 서방(주로 대식국 · 페르시아 등)으로부터 수입된 것이라 하였다.
이러한 희귀한 약품들이 아랍 상인 또는 중국을 거쳐서 직접 · 간접으로 고려에 수입되어 고려 의인들이 아랍 의약에 관한 지식도 갖게 되었으리라고 추측된다.
고려의학은 중기의 후반기 경부터 자주적 발전의 태세를 갖추게 되었고, 1147년(의종 1)경에 김영석(金永錫)이 신라 및 송나라 의서를 참작하여 『제중입효방(濟衆立効方)』을 편술하였으며, 1226년에는 최종준(崔宗峻)이 종래 다방에서 사용해오던 약방에 다시 긴요한 경험방들을 첨가하여 『신집어의촬요방(新集御醫撮要方)』 2권을 편성하였다.
이 방서들은 이미 망실되었으나 조선 세종 때에 편집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중에 전자인 『제중입효방』은 겨우 한 방문이 보일 뿐인데, 후자인 『신집어의촬요방』은 십여 방문이 비교적 자세히 인용되어 있어 다소나마 그 면모를 짐작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민간 고로(古老)들이 우리 나라에서 산출되는 향약으로서 임시 구급에 쉽게 응용할 수 있는 경험 약방들을 수집하여, 1236년경에 강화에서 대장경판을 판각하던 대장도감에서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 상 · 중 · 하 3권 1책을 간행하였다.
이 책은 편자의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으나 그 책 이름을 특히 향약이라고 한 것은 우리 나라 향토에서 산출되는 약이라는 뜻인데, 중국에서 수입된 약재를 당재(唐材)라고 부르는 데 대한 우리 나라의 약재를 총칭한 것이다.
이 책은 우리 나라에서는 산일된 지 오래이고, 일본 궁내청 서릉부(書陵部)에 1부가 비장되어 있을 뿐인데, 이 간본도 대장도감의 원간본이 아니고 조선 태종 때인 1417년에 경상도 의흥군(義興郡)에서 재간한 것이다.
이 방서는 식독 · 육독(肉毒) · 정창(丁瘡) · 옹저(癰疽) · 부인잡병 · 소아잡병 등 59항목의 병명들을 상 · 중 · 하 3권에 나누어 열거하고, 그 아래에 구급향약방들을 인용하였으며, 부록으로 향약목초부(鄕藥目草部)에 향약 180종에 대한 속명(俗名) · 약미 · 약독 및 약초의 채취방법들을 간략하게 기술하였다.
이 방서는 고려 중기경의 의약지식을 고찰할 수 있는 중요한 구급방서이다. 그리고 각 약초 아래에 한자로 된 속명, 예를 들면 “葛根은 俗云 ○根이고, 吉梗은 俗云 刀人 (羅)次”들인데, 이것은 그 당시의 고전어의 연구 또는 그 시대의 이두식 한자 사용법을 고증하는 데에도 중요한 참고자료가 된다.
말기는 1260년(원종 1)경부터 1392년(공양왕 4)까지 132년 간이다. 이 시기는 신흥 몽고제국인 원나라와 특별한 관계로 왕래가 잦게 되면서 의학의 상호교류를 보게 되었으며, 남방열대산 약재들의 수입도 더욱 왕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중기의 후반기부터 연구해 오던 향약의 전문방서들을 더욱 발전시켜 고려 의학의 자주적 기초를 더욱 굳게 하였을 뿐 아니라 고려 의학의 명성을 원나라에까지 드높였다.
고려와 원나라는 특별한 관계로 모든 문물들의 교류가 쉽게 추진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의학 교류에서는 1275년(충렬왕 1)경부터 원나라 세조(쿠빌라이)의 공주인 충렬왕 비가 내환이 있을 때마다 원나라에 의사를 초청하였으며, 때로는 원나라에서도 제왕들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고려에 의사를 청하기도 하여 두 나라 사이에 의학지식의 교류를 보게 되었다.
원나라에서 고려에 내조한 의인들의 수는 적지 않으나 충렬왕의 병환 때에 보내 온 태의 요생(姚生)과 왕비의 병환 때에 보내 온 연득신(鍊得新), 태의 왕득중(王得中) · 곽경(郭耕) 등의 의인이 알려져 있다.
원나라 쿠빌라이의 병환을 치료하기 위하여 원나라의 초청으로 고려에서는 상약 어의 설경성(薛景成)을 보냈으며, 그 뒤 1267년에 원나라 성종의 병환으로 어의 설경성을 다시 원나라에 보냈는데, 설경성은 본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77세에 원나라에서 죽었다.
약품 교역에서는 1267년(원종 8)에 몽고왕의 병환에 필요한 아길아함몽피(阿吉兒含蒙皮) 17영(領)을 몽고에 보냈으며, 그 다음해에는 몽고의 승상(丞相) 안동(安童)으로부터 대령산향백자(大嶺山香栢子) · 비자(榧子) · 송고병(松膏餠) · 지운동금밀(知雲洞金密) · 유체인삼(有體人蔘) · 영동군향국자(永同郡香麯子) · 남해도실모송(南海島失母松) · 금강산석위(金剛山石韋) · 관음송상수(觀音松上水) · 풍면송엽(風眠松葉) 등을 요청하여왔는데, 이들 중에는 그 실물을 입증하기 어려운 것도 없지 않다.
그리고 1275년부터 1374년(공민왕 23)까지 약 100년 동안 거의 20여회에 걸쳐 약품들의 상호교역을 보게 되었다. 고려에서 원나라에 가져간 중요한 약품들은 주로 비실(榧實) · 오매(烏梅) · 인삼 · 향다(香茶) · 수과(水果) · 송자 · 탐라소유(耽羅酥油) · 곡육(鵠肉) · 우육(牛肉) 들이었으며, 원나라에서 고려에 보내 온 중요한 약품들은 포도주 · 앵무(鸚鵡) · 공작 · 향약 · 황향(黃香)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원나라의 판도는 중앙아시아로부터 유럽의 일각에까지 걸쳐서 그 관리들 중에는 서역 계통의 색목인(色目人)이 많았는데, 이들은 주로 회회교도인 아랍인과 페르시아인들로서 중세기에 유럽에 왕성하였던 사라센(Saracen)문명의 계승자들이다.
원나라 의약품 중에는 중앙아시아를 거쳐 온 서구의학적 요소와 상당한 교섭을 가진 것이 있었으리라고 추측된다. 그러나 원나라 의학의 주류는 당나라와 고려시대의 충주사고(忠州史庫)에 수장(收藏)되었던 의방서들이 거의 당 · 송 이래의 고전 의서들이라는 데에서도 넉넉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알코올류인 소주는 고려 말경에 원나라로부터 처음 수입되었다. 알코올의 증류법은 원래 아랍의 명의인 아비케나(Avicenna)가 발명하였는데, 원나라에서 이 증류법을 응용하여 소주를 만들었다. 이시진의 『본초강목』에도 소주의 증류방법은 원나라에서 처음으로 발견한 것이라 하였다.
1330년(충숙왕 17)에 몽고인 홀사혜(忽思慧)가 편성한 『음선정요(飮繕正要)』 권5에 아라길주(阿刺吉酒)의 번명(番名)이 아리걸(阿里乞)로 되었는데, 아라길이나 아리걸의 어원은 아랍말의 아라그(Arag)를 한역한 것으로 곧 알코올을 가리킨 것이라 하였고, 명초(明初)의 웅종립(熊宗立)이 편집한 『거가필용사류전집(居家必用事類全集)』에도 남번소주(南番燒酒)의 번명은 아리걸이라고 적었는데, 그 제조방법은 증류법과 일치된다고 하였다.
이덕무(李德懋)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앙엽기(盎葉記)에 소주는 아란타소주(阿難陁燒酒)인 아라길주라 하고,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도 아란타소주의 일명이 아라길주라고 적혀 있어서 소주의 일명이 아라길주 또는 아리걸로 통용되었던 것이다.
소주는 고려 공민왕 때의 「최영장군전(崔瑩將軍傳)」에 그 이름이 처음으로 보이고, 조선에 들어서도 1393년(태조 2) 12월에 맏아들 진안군 방우(芳雨)가 소주를 매일 마셔 병들어 죽었다고 『왕조실록』에 적혀 있다.
그런데 지금도 남도지방에서는 소주를 골 때에 풍기는 알코올 냄새를 ‘아래기’냄새가 난다고 하고, 소주를 고고 난 찌꺼기를 아래기라고 부르며, 개성에서는 소주를 ‘아락주’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최근까지 남도 각 가정에서 사용하던 증류기는 근대 화학실험실의 증류기와 비슷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아랍에서 발견된 알코올증류법이 그 어원의 원명과 증류기구와 함께 원나라로부터 고려 말경에 처음으로 수입된 것을 알 수 있다.
향약을 고려 중기 이후부터 연구하게 된 것은 앞에서 이미 말하였거니와 말기에는 연구와 함께 민간 고로들의 향약고방들을 수집한 향약전문방서들을 보게 되었으며, 그밖에도 1389년에 정도전(鄭道傳)이 병을 진단하는 맥법(脈法)을 알기 쉽게 그림으로 해설한 『진맥도결(診脈圖訣)』을 편집하였는데, 그 방서들은 『삼화자향약방(三和子鄕藥方)』 · 『향약고방(鄕藥古方)』 · 『동인경험방(東人經驗方)』 · 『향약혜민경험방(鄕藥惠民經驗方)』 · 『향약간이방(鄕藥簡易方)』 · 『진맥도결』 등이다.
이상의 방서들은 이미 산일되었으나 끝의 『진맥도결』을 제외한 다른 방서들은 근세조선 세종 때에 간행한 『향약집성방』 중에 그 방문들이 인용되어 있어, 그 방서들의 대략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방문들의 내용은 송 · 원 시대의 의약방을 토대로 한 것이나 약재는 주로 향약을 권장하였고, 약재들의 조제방법에서도 자체의 체질과 풍습에 적합한 술법들을 많이 응용하였으며, 송 · 원 의학전통을 벗어나서 향약의 약성 및 약미에 중점을 두어 의학의 독자적인 발전에 힘써 왔다.
조선 의학은 초기에는 고려 의학의 전통을 주로 이었으나, 새 나라의 행정이 차차로 정돈되어 감에 따라 의료제도들의 개혁, 의육 및 의과취재(醫科取才)의 혁신과 함께 새로운 전문의방서들을 편성하기 시작하였다.
그 중에도 세종대왕의 자주적 민족문화 건설의 일환으로 고려 중반기 경부터 시작해온 향약의 연구를 집대성하여 『향약집성방』 85권을 편성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우리 나라에 이미 전해 온 한의방서들을 다시 각 부분에 나누어 함께 모아 그 지식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한 『의방유취(醫方類聚)』(266권)를 편찬하였다. 그밖에 형사재판(刑事裁判)에 법의학적 지식을 응용한 검시제도(檢屍制度)를 새로 실시하였다.
임진왜란이 지난 1610년(광해군 2)에 어의 허준(許浚)이 『동의보감』 25권 25책을 출판하였는데, 이 책은 고금 한의방서의 정화(精華)를 채집한 당시 한의학의 백과전서(百科全書)로서, 그 뒤 일본 및 청나라에서도 여러 차례 번각(飜刻)되어 우리 의학의 실력을 국내외에 알렸다.
그리고 1623년(인조 1)경부터 명나라를 왕래하던 사절들을 통하여 서양의학의 감화를 받은 한역의서(漢譯醫書)들을 접촉하게 되면서, 실증적 학풍에 의한 의인들 자신의 관찰과 경험을 중심으로 한 간략한 경험 방서들을 많이 보게 되었다.
그 뒤 명나라 말에서 청나라 초부터 왕래하기 시작하던 야소회사(耶蘇會士)들의 교리서의 한역서 중에 섞여 있는 서의학 지식과 우두종법(牛痘種法)을 비롯한 서양 의방서들의 한역서가 우리 나라에 차차 전해 오게 되어 서의학에 대한 흥미와 자극을 갖게 하였다.
그러나 그 지식들의 술법은 일부분에 국한되었고 서의학의 지식이 일반적으로 보급된 것은 1876년(고종 13) 이후 일본 및 미국, 유럽 각국들과 수호통상조약이 성립되면서부터이다.
그리하여 1894년 갑오개혁 이후로 의료행정 및 의학교육을 서의학 중심으로 실시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조선 의학의 변천과정을 살피기 위해서는 임진왜란을 중심으로 그 이전을 전기, 그 이후를 후기로 나누고, 후기의 종말기인 1864년경부터 현재에 이르는 약 120년간을 최근세기로 따로 나누는 것이 서술하는 데에 편리하리라고 생각된다.
조선은 건국 후에 고려의 의료제도를 그대로 계승하면서 필요에 따라 새로운 기관들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그 제도들을 총괄하면 중앙에 있는 의료기관으로서 내약방(內藥房, 內醫院) · 전의감(典醫監) · 혜민국(惠民局) · 동서대비원(東西活人院이라고도 함) · 제생원(濟生院) · 종약색(種藥色) · 의학(醫學) 등을 들 수 있고, 지방의료기관으로는 의원(醫院) · 의학교수관(醫學敎授官) · 의학교유(醫學敎諭) · 의학원(醫學院) · 의학승(醫學丞)들이 지방에 따로 설치되었다.
내약방은 왕실의 내용약, 즉 내약을 전담하는 기관인데 세종 때에 내의원으로 개칭하였다. 전의감은 국내 의료행정을 총괄하는 중앙관서로 의학교육 및 의과고시의 직무까지 겸행하였다. 전의감의 관직은 그 품위에 따라 판사 · 감 · 소감 · 승 · 경승 · 주부 · 겸주부 · 직장 · 박사 · 검약 · 조교 등으로 구분되어 있어 제각기의 직무를 분담하였다.
혜민국은 고려 때의 이름을 그대로 답습한 것인데, 일반 민중들의 질환을 구치하는 기관이다. 직명은 품위에 따라 승 · 부승(副丞) · 녹사(錄事) · 부녹사 등으로 구분되어 있다.
동서대비원은 불교의 대자대비의 사상에 기인한 고려시대의 직명을 그대로 습용해 오다가 숭유배불(崇儒排佛)의 정책에 따라 1414년(태종 14)에 동서활인원으로 고쳤다. 동서활인원에는 의사 외에 무당을 따로 두어, 도내(都內) 환자들 가운데 의탁할 곳이 없는 자들과 전염성 환자들을 주로 취급하였다. 그러므로 이 활인원은 인구가 희소한 동소문 밖과 서소문 밖에 따로 설치하였다.
제생원은 혜민국과 함께 일반 민중들의 구료기관인데, 주로 부인병자들을 치료하는 의녀(醫女)의 양성과 각 도의 향약재의 수납과 『향약제생집성방』의 편집 등과 같은 중요한 의료사업을 겸행하여 왔다.
종약색은 예조 소속으로 그 직무는 이름 그대로 약초들을 재배하는 곳인데, 설립된 뒤 얼마 되지 않아 전의감에 통합되었다. 의학은 건국과 함께 병(兵) · 율(律) · 자(字) · 역(譯) · 산학(算學) 등 6학의 하나로서 설치된 의학교육기관이다.
지방의료기관으로는 주로 의학교육을 담당한 의원 · 의학교수관 및 의학교유들이 각 도에 배치되었으나 지방에 따라서, 혹은 의무관으로 의학승을 두기도 하였다.
이상에서 기술한 제도와 함께 의과취재의 제도도 개국 초부터 잡과(雜科)의 하나로 무(武) · 한(漢) · 자 · 역 · 음양(陰陽) · 산(算) · 율 등 모든 학술과 함께 실시하여 왔다.
시행방법은 초시(初試) · 복시(覆試) 및 의과취재로 나누어져 있는데, 초시는 전의감에서 녹명 고시한 뒤에 복시로서 전의감제조가 의학강서(醫學講書)들을 다시 고시하고 최종의 합격을 결정한다. 의학취재에는 의학과 침구학(鍼灸學)을 따로 나누고, 고시방법이나 고강과목도 서로 다르게 규정되어 있다.
건국 후 8년이 지난 1399년(정종 1)에 제생원에서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 30권을 편성한 뒤에 향약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거듭하여 1431년 (세종 13)에 『향약제생집성방』의 구증(舊症)과 구방(舊方)을 기본으로 하고, 다시 다른 향약방서들을 널리 참고하여 구증 338을 959증, 구방 2,803을 1만706방으로 첨가시키고, 그밖에 침구법과 향약본초 및 포구법(炮灸法) 등을 종합하여 『향약집성방』 85권을 집성하여 그 해 8월에 전라 · 강원 양도에서 나누어 간행하게 하였다.
이 『향약집성방』은 자기 나라 풍토에서 산출되는 향약이 자기 나라 사람들의 질병을 치료하는 데 더 효과적이라는 병과 약에 대한 의토성(宜土性)을 강조하여 의약제민(醫藥濟民)의 자주적 방책을 수립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국내 각 지방에 분포된 향약들의 실태를 조사하고, 그 다음에는 향약채취의 시기를 적절히 하는 『향약채취월령방(鄕藥採取月令方)』을 간행하였다. 때로는 향약과 당약(唐藥)과의 약효를 비교, 검토하기 위하여 약리에 정통한 의인들을 명나라에 파견하여 그 지식을 넓히기도 하였다.
이 책은 우리 의약의 자주적 발전과 향약의 전통적 지식을 고증하는 데 커다란 공적을 남겼을 뿐 아니라, 우리 나라의 자연과학 내지 일반 문화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취를 남겼다.
그 다음에는 우리 나라에 이미 전해 온 한의방서들을 분류, 정리하여 그 지식을 자주적으로 쉽게 수용할 수 있도록 1445년에 『의방유취』 266권 264책을 편성하였다.
이 책은 91대강문(大綱門)으로 나누어 각 문에 해당되는 병론(病論)을 들고, 그 다음에는 의방들을 간행된 연대순에 따라 원전(原典)과 함께 그 원문들을 질서정연하게 유취, 편성하였다. 이 병문(病門)들의 분류에는 병증을 중심으로 한 병문과 신체 각 부위를 본위로 한 문들이 서로 섞여 있으나 대체로 근세 임상의학의 각 분과들이 거의 포괄되어 있다.
이 『의방유취』는 그 당시의 한의방서들을 집대성한 한방의학의 백과대사전이며, 한의학의 원산지인 중국에서도 볼 수 없는 훌륭한 지보의 거질(巨帙)이다. 여기에 인용된 방서들은 중국의 한 · 당 이래로 명나라 초기에 이르는 의방서 153부가 유취되었는데, 그 중에는 원산지인 중국에서도 이미 망일(亡佚)된 것이 40여부나 된다.
이 책은 출판된 뒤 거의 400여 년이 지난 1852년(철종 3)에 일본에서 10년에 걸쳐 목활자로 인출하였는데, 1854년경에 일본에서 이를 초출하여 일서(佚書) 30여 부를 채집, 복원하였다.
이 채집본들은 원상 그대로 복원된 것은 아니지만, 이미 망일된 30여부의 의방서들의 대략을 고증하는 데에는 없어서는 안 될 절세의 귀중본이다. 이 유취는 한의방서들을 원문 그대로 분류, 수집한 단순한 유서라고 생각할 것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자주적 의학을 발전시킬 것을 전제조건으로 수용하기 쉽게 일관적으로 유취, 정리한 것이다.
그리고 형사재판에 법의학적 지식을 요하는 검시제도를 실시하기 위하여 1438년에 원나라의 왕여(王與)가 편술한 『무원록(無寃錄)』에 음주(音註)를 붙여서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을 간행하고, 그 다음해에는 『신주무원록』에 의한 검시장식(檢屍狀式)을 전국에 반포하여 인명치사에 관한 사건에는 이 검시장식에 따른 사체검안서에 의하여 재판을 실시하도록 하였는데, 검시의 절차는 초검(初檢) · 복검(覆檢) · 삼검(三檢) 등의 3검제도를 실시하였다.
과거 우리 나라에서는 행정과 사법이 나누어져 있지 않아 사법이 흔히 행정관들의 주견에 좌우되기 쉬웠는데, 사체를 검증하여 사인이 될 만한 상해 부위를 실증하도록 하여 형률(刑律)의 공정성을 기하도록 하였다.
이상에서 기술한 의방서 외에도 노중례(盧重禮)의 『태산요록(胎産要錄)』, 전순의(全循義)의 『식료찬요(食療纂要)』, 임원준(任元濬)의 『창전집(瘡痊集)』 등을 비롯한 『구급이해방(救急易解方)』 · 『벽온방(辟瘟方)』 · 『창전방(瘡痊方)』 · 『촌가구급방(村家救急方)』 · 『구황촬요(救荒撮要)』 · 『의림촬요(醫林撮要)』 · 『침구요결(鍼灸要訣)』 등을 들 수 있다.
근세조선에서는 초기부터 의과고시에 침구학이 다른 의학과 분리되었으며, 전의감 · 혜민국 · 제생원의 3의사(三醫司)에서도 의원들과는 별도로 침구전문생들을 배치하였다.
그밖에 제생원에는 나력(瘰瀝)을 전치하는 나력의(瘰瀝醫)가 따로 있었으며, 창종을 전치하는 치종청(治腫廳)에는 치종의(治腫醫)가 있어서 관혈적(觀血的)인 외과에 속한 침구의 · 나력의 · 치종의 등의 전문외과의가 양성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외과전서로서 『치종비방(治腫祕方)』 · 『치종지남(治腫指南)』을 들 수 있다. 『치종비방』은 1559년(명종 14)에 임언국(任彦國)이 전라도 금산(錦山)에서 간행한 것인데, 그 치법은 종래와 같이 고식적인 침술과 같은 종양의 절개술이 아니고 농양(膿瘍)에 관한 현대의 관혈적 절개요법을 연상할 수 있는 방법들이 많이 섞여 있다. 이 책은 우리 나라에서는 이미 망일되었으나 현재 일본 궁내청 서릉부에 비장되어 있다.
『치종지남』은 초본으로서 저자는 밝혀져 있지 않으나, 상권에는 배종도(背腫圖) · 내종도(內腫圖) 등 30여 도가 배열되어 있고, 종농(腫膿)을 절개할 때에는 종농의 주위 심천(深淺)을 잘 살펴 침공의 광협(廣狹)을 정하거나 또는 지연(紙撚)을 침공에 삽입하는 합리적 요법들이 제시되어 있다.
하권에는 배종 · 내종 등의 증치(症治) 59종과 취법요강 및 용약법들이 자세히 설명되었을 뿐 아니라, 옹종(癰腫)들을 십자형으로 절개하여 독기를 발산시키는 등 근대 외과학의 수술방법을 연상할 수 있게 하였다. 이 책의 절개술법들은 종래의 다른 한의방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방법들이다.
1592년(선조 25)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두 나라 사이에 살벌한 참화(慘禍)가 벌어졌으나, 한편으로는 서양의학의 영향을 받은 지식을 접촉할 기회를 가지지 않았나 하고 추상할 수 있다.
당시 일본에서는 서양의학 전통인 남만류의학(南蠻流醫學)이 이미 실용되었으며, 우리의 후원군인 명장(明將) 심유경(沈惟敬)도 서의학 전통의 감화를 받은 지식을 엿볼 수 있어서 그러한 지식 전통이 미미하나마 우리 의학에도 스며들어 온 자취를 엿볼 수 있게 되었다. 그 예로 안경(眼鏡)을 들 수 있다.
안경은 일명 애체(靉靆)인데, 서역만라국(西域滿刺國)에서 생산되는 남만(南蠻)의 박래품(舶來品)으로 임진왜란 때에 심유경과 왜승(倭僧) 현소(玄蘇)를 통하여 우리 나라에 알려지게 되었다.
심유경은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그 다음해인 1593년부터 1596년까지 4년 동안 우리 나라에 주재하였다. 또한 현소는 임진왜란 때 왜의 서북군(西北軍) 총사령으로 평양을 침략하던 고니시(小西行長)의 막료로서 명나라와의 강화회의에도 관련되어 자주 우리 나라에 왕래하였으므로, 남만으로부터 전해 온 안경은 명나라와 일본을 거쳐 전란을 통하여 우리 나라에 수입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사실은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峰類說)』이나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자세히 적혀 있다.
그리고 연초(煙草)는 일명 담파고(淡婆姑), 또는 남영초(南靈草)라고도 한다. 1614년(광해군 6)에 성립된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의하면 근년에 처음으로 왜국에서 생산된 것인데, 그러나 요즘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여 담습(痰濕)을 제거하는 데 효과를 본다고 하였다.
연초는 원래 중국이나 일본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고 남만지방으로부터 전해 온 것인데, 우리 나라에서는 그 이름을 담배라고 부르나 일본에서는 ‘단바고’라고 한다.
이 연초도 처음에는 약용으로 임진왜란을 계기로 일본을 거쳐 우리 나라에 전해져서 차차 성행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실은 장유(張維)의 『계곡만필(谿谷漫筆)』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다음은 고초(苦草)이다. 고초는 남만초(南蠻椒) · 번초(蕃椒) · 당초(唐椒) · 왜개자(倭芥子)라고도 부르는데, 현재 우리 나라에서 널리 이용되는 중요한 조미료이다. 고초는 원래 아메리카의 남방열대산인데, 아메리카대륙이 발견된 뒤 스페인을 거쳐 유럽과 아시아에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초가 어느 때부터 우리 나라에 전해졌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지봉유설』에 일본으로부터 처음 전해져온 것으로 적혀 있다. 그 시기는 아마 연초와 비슷하게 임진왜란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동의보감』은 내경편(內景篇) · 외형편(外形篇) · 잡병편(雜病篇) · 탕액편(湯液篇) · 침구편(鍼灸篇) 등 5편으로 나누어져 25권 25책으로 편성되었다.
내경편은 주로 내과 소속인 각 장기들의 질병과 혈액병으로 되어 있고, 외형편은 두부(頭部)로부터 사지골맥(四肢骨脈)에 이르는 신체 각 부의 외과적 질환, 잡병편은 질병의 진단을 비롯한 전염성병 · 제창(諸瘡) · 제상(諸傷) · 구급 및 부인과 · 소아과들이 포함된다. 탕액편은 약물학, 그 밖에 침구편이 따로 첨부되어 있어 근세 임상의학의 각 과가 거의 망라되어 있는 한방의학의 백과전서이다.
이 책이 간행된 뒤 1724년(경종 4)에 일본 경도서림(京都書林)과 1799년(정조 23)에 대판서림(大阪書林)에서 번각되었으며, 청나라에서도 1763년(영조 39)에 처음으로 간행된 뒤 여러 차례 복간되었으며, 현재까지도 계속 영인 출판되어 많은 의인들의 수요에 응하고 있다.
우리 나라의 저서로서 『동의보감』처럼 중국이나 일본에서 그렇게 널리 읽혀진 책은 보기 드물다. 이름은 『동의보감』으로 되어 있으나 실은 동양의학의 보감이다.
그리고 이 『동의보감』의 전통을 이은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은 1724년경에 주명신(周命新)이 편술한 『의문보감(醫門寶鑑)』, 1790년에 이경화(李景華)의 『광제비급(廣濟祕笈)』, 1799년에 내의원 수의(首醫) 강명길(康命吉)의 『제중신편(濟衆新編)』 등을 들 수 있다.
그밖에도 소아과전문서로서 조정준(趙廷俊)의 『급유방(及幼方)』, 진역전문서로 임봉서(任鳳瑞)의 『임신진역방(壬申疹疫方)』, 이헌길(李獻吉)의 『마진방(麻疹方)』, 정약용(丁若鏞)의 『마과회통(麻科會通)』, 홍석주(洪奭周)의 『마방통휘(麻方統彙)』, 이원풍(李元豊)의 『마진휘성(麻疹彙成)』 등을 들 수 있다.
약물 및 본초학으로는 서유구(徐有榘)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중의 인제지(仁濟志)를 비롯한 산림경제(山林經濟) 및 『고사신서(攷事新書)』 중의 의약방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서양 학술의 영향으로도 짐작할 수 있는 실증적 학풍에 따라 종래와 같은 선험적 사고의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경험과 관찰을 중심으로 한 경험방서들도 많이 볼 수 있게 되었는데, 그 중의 중요한 방서로서 허임(許任)의 『침구경험방(鍼灸經驗方)』, 박진희(朴震禧)의 『두창경험방(痘瘡經驗方)』, 이석간(李碩幹) · 채득기(蔡得己) 등의 『사의경험방(四醫經驗方)』, 백광현(白光鉉)의 『치종경험방(治腫經驗方)』 등을 들 수 있다.
그밖에도 법의학적 재판에 관한 사체검안의 전서로서 종래 사용해 오던 『신주무원록』에 청나라 강희연간(康熙年間)에 실용해 오던 『세원록(洗寃錄)』과 『평원록(平寃錄)』 등을 참작하여 구택규(具宅奎)가 『신증무원록(新增無寃錄)』(상하편)을 개수하였으며, 그 뒤 그의 아들 윤명(允明)이 약간의 증산을 가하여 1796년에 『증수무원록대전(增修無寃錄大全)』(상하 2권)과 함께 언해서(諺解書)를 붙여 간행하여 사체검안의 수속 절차에 일정한 규례를 확인하게 하였다.
명말청초에 중국에 왕래하던 야소회사들의 한역교리서(漢譯敎理書)를 통하여 서의학 지식과 접촉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1622년에 야소회 선교사인 샬(Shall, A., 湯若望)이 중국의 명 말에 와서 천주교리를 전도하면서 한역한 교리서인 『주제군징(主制群徵)』 중에 로마의 갈레노스(Galenos)의 「인체생리설」을 간략하게 소개하였다.
이 『주제군징』이 어느 때 우리 나라에 전해졌는지 자세하지 않으나, 이 서의설은 1675년(숙종 1)∼1776년(영조 52) 때의 거유(巨儒)인 이익(李瀷)이 『성호사설』(권5)에 서국의(西國醫)라는 제목 아래 이 생리설의 원리와 혈액 · 호흡 및 뇌척수신경에 관한 이론을 소개하였다. 이 책의 생리설은 그리스 의학 전통인 서구 중세기의 의학사상을 거의 그대로 서술하였다.
그 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권19)에도 인체내외총상변증설(人體內外總象辨證說)에서 『주제군징』의 생리설을 그대로 인용하였다. 그밖에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권38)에도 하란타방(荷蘭陀方)과 서양수로방(西洋收露方)이 기술되어 있고, 정동유(鄭東愈)의 『주영편(晝永編)』과 정약용의 『의령(醫零)』에도 서구 의학의 이론이 전개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최한기(崔漢綺)의 『명남루문집(明南樓文集)』 중에는 서양철학 · 천문지리서 외에 서의생리설인 『신기천험(身機踐驗)』과 함께 1851년(철종 2)부터 1858년까지 청나라 상해의 인제의원(仁濟醫院)에서 영국의사 합신(合信, Holson)이 역술한 5종 의서인 『전체신론(全體新論)』 · 『서의약론(西醫略論)』 · 『내과신론(內科新論)』 · 『부영신설(婦嬰新說)』 · 『박물신편(博物新編)』들이 채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한역 서의서들이 우리의 실지 의술에 얼마만한 영향을 미쳤는지 속단하기 어려우나, 당시 서학에 관심을 가졌던 실학파들을 통하여 일반의인들도 서의학에 관한 흥미를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정약용이 편술한 『마과회통』 권말에 부기된 종두기법은 1796년(정조20) 5월 10일에 영국의 제너(Genner, E.)가 발견한 우두종법을 중국에 소개한 최초의 한역종두서이다. 그런데 이 종두기법이 어느 때 우리 나라에 수입되었으며, 우두종법이 어느 때부터 우리 나라에서 실시되었는지 자세하지 않다.
『오주연문장전산고』(권12)의 종두변증설(種痘辨證說)에 의하면 1835년(헌종 1)경에 정약용이 우두종법을 실시하였다는 것을 전해들었고, 1854년경에 평안도 · 황해도 · 강원도에서도 우유종두법(牛乳種痘法)을 실시한 소문을 들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1835년경에는 정약용이 중국 북경 방면에 비밀히 왕래하던 천주교 관계자들로부터 제너의 우두종법의 최초 한역서인 『종두기법』을 입수한 뒤 그 방법이 실시되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더욱이 정약용은 1800년경부터 우리 나라에서 실시하여 온 인두종법(人痘種法)에 정통하였으므로, 우두종법을 실시하는 데 기술적 곤란은 없었을 것이다.
그 뒤 평안도 · 황해도 · 강원도에서 실시된 것은 정약용과는 별도로 만주 봉천성(奉天省)으로부터 국경인 의주를 거쳐서 차차 남으로 내려오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이 우두종법은 그 뒤 널리 보급되지 못하고 국부적으로 시행되다가 서학 및 천주교의 압박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최근세의 초기에는 주로 종래의 한의방을 거의 그대로 계승하였으나, 1876년 이후 일본을 비롯한 구미 각국들과 수호통상조약을 맺게 되면서 서양의학의 술법이 직접 또는 간접으로 우리 나라에 밀려들기 시작하여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의료행정 및 의학교육을 서의학 중심으로 실시하여 왔다.
초기의 한방의학은 먼저 『동의보감』의 전통을 이은 황도연(黃度淵)과 그의 아들 필수(泌秀)를 들 수 있다. 황도연은 일찍이 서울 무교동에서 의업에 종사하면서 명성을 크게 떨쳤는데, 그의 저서로 『부방편람(附方便覽)』 14권, 『의종손익(醫宗損益)』 12권, 『의방활투(醫方活套)』 1권이 전해지고 있다.
필수는 그의 아버지 황도연이 세상을 떠난 1884년 이후로 그의 가업을 계승하면서 『의종손익』에 부록된 본초와 『의방활투』를 합하고 다시 용약강령(用藥綱領)과 응급 · 금기 등을 첨가하여 『방약합편(方藥合編)』(1권)을 편술하였다.
이 의방서들은 『동의보감』 중에서 실용에 긴절한 처방들을 중심으로 그 처방에 대한 약물학적 지식을 첨부시켜, 실제로 의인들이 쉽게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도록 상 · 중 · 하 3단으로 나누어 표기식으로 편집하여 많은 임상의인들에게 환영을 받게 되었다. 특히, 이 『방약합편』은 간편하고도 실용에 적합하며 응급적 참고에도 적절하여, 한의방의 편람서로서 늘 손쉽게 참고할 수 있는 상비처방서로 되어 있다.
그 다음은 사상의설(四象醫說)을 주창한 이제마(李濟馬)의 『동의수세보원』과 부양론(扶陽論)을 강조한 이석곡(李石谷)의 『의감중마(醫鑑重磨)』를 들 수 있다.
이제마의 『동의수세보원』은 상 · 중 · 하 3권으로 되었는데, 인체를 그 기질과 성격의 차이에 따라 태양(太陽) · 소양(少陽) · 태음(太陰) · 소음(少陰)의 4형(型), 즉 4상으로 나누었다. 질병을 치료하는 데 병증보다는 체질에 중점을 두어 같은 질병에도 4상의 체질에 따라 처방을 달리하여야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양형(陽型)에 속한 체질에는 사지궐냉(四肢厥冷) · 맥침쇠(脈沈衰) · 설사와 같은 음증(陰症)에 걸려도 온제(溫劑)인 인삼이나 열제(熱劑)인 부자(附子)를 쓸 수 없고, 그와 반대로 음형의 체질에는 신열 · 두통 · 맥실(脈實) · 변비 같은 양증에도 냉제인 석고(石膏) · 대황(大黃) · 망초(忘硝) · 시호(柴胡) 등을 금하였다.
이러한 4상인들의 체질분류와 처방의 차이는 종래 한의방의 음양오행설에 의거한 것이 아니고 병인들의 체질에 중점을 둔 것으로서, 한의방의 전통적 치료방법을 깨뜨린 새로운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이석곡의 부양론은 한의학의 금원사대가(金元四大家) 중의 한 사람인 주단계(朱丹溪)가 주창한, “양은 항상 유여하나(陽常有餘), 음은 항상 부족(陰常不足)하다.”는 설에 반대하여 “양은 늘 부족한 것을 걱정하고(陽常患不足), 음은 늘 유여한 것을 걱정한다.”는 설을 주장하여 주단계가 애용하던 자음강화(滋陰降火)의 법을 배척하고, 어린아이로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양을 돕는 약을 늘 중용하면서 온열제(溫熱劑)에 속한 인삼 · 부자를 애용하여 왔으므로 이부자라는 별명까지 있었다.
이석곡의 『의감중마』 3권도 『동의보감』 중에서 자설의 부양론에 서로 통할 수 있는 부분만을 주로 발췌한 것이다. 이 책 외에도 『황제소문절요(黃帝素問節要)』 2권과 본초 상 · 하 2책이 전해져 온다.
이석곡은 원래 유학자로서 『경사집설(經史集說)』에 능통하여 『사서』 · 『육경』 등의 소주(疏注)를 산정(刪定)하였으며, 그밖에도 『포상기문(浦上奇聞)』, 『석곡심서』 1책, 『구장요결(九章要訣)』 1책 등이 전하여지고 있다.
그리고 고종 때의 태의원전의(太醫院典醫) 이준규(李峻奎)의 『의방촬요(醫方撮要)』 1권과 전의인 최규헌(崔奎憲)의 『소아의방(小兒醫方)』 등이 전해져 내려온다.
1876년에 조일수호조약이 성립되면서 일본은 일본 거류민들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서울 및 부산 등 각 개항지에 서양의학에 의한 병원들을 정식으로 개설하고 의료사업을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조약이 체결된 그 다음해부터 일본 해군에서 처음으로 부산에 제생의원(濟生醫院)을 설치하고 일본 거류민들과 함께 우리 나라 사람들도 이용할 수 있게 하였는데, 이 의원이 일본이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개설한 서의식 의료기관이다.
그 뒤 1880년 원산에 생생의원(生生醫院)을 개설하고, 1883년에는 인천이 개항되면서 일본 영사관에서 일본 병원을 설치하였으며, 그 뒤 목포 및 진남포 등 개항지에도 병원을 개설하였다. 그리고 서울에도 1883년에 일본 공사관에서 일본관의원(日本館醫院)을 설치하였으며, 그밖에도 일본 공사관의 의관(醫官)이나 우리 나라의 위생 고문을 지낸 일본인 의사들이 서울에서 의료사업을 개시하였다.
그런데 1876년 병자수호조약 때에 수호사의 수원(隨員)으로 일본에 갔던 박영선(朴永善)이 일본 동경의 순천당의원(順天堂醫院)에서 우두종법을 배우고 돌아올 때에 『종두귀감(種痘龜鑑)』 1책을 가지고 와서 책과 함께 그 법을 제자인 지석영(池錫永)에게 전해주었다.
그러나 지석영은 이 종두법을 더 실습하기 위하여 1879년에 부산의 제생의원에서 2개월 동안 우두종법을 실습하고, 두묘(痘苗)와 종두침(種痘針)을 얻어 가지고 돌아와서 종두를 실시하였다.
그 뒤 지석영은 두묘제조법을 배우기 위하여 1880년에 제2차 일본수호사의 수원으로 일본 동경에 가서 내무부 위생국의 우두종계소장(牛痘種繼所長)에게서 두묘제조법 및 축장법(蓄藏法)과 독우(犢牛)의 채장법(採漿法) · 사양법(飼養法)들을 완전히 전습한 뒤에 본국으로 돌아와서 두묘를 제조하기 시작하는 한편, 종두를 실시하였다.
당시의 일본은 18세기 말경부터 세계 의학의 지도권을 장악해 온 독일 의학을 19세기 말경 직접 수입하여 상당한 발전을 보게 된 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본을 통하여 간접으로 독일 의학에 접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미국 의학은 미국 선교의(宣敎醫) 알렌(Allen, H.N.M.D., 安連)으로부터 전해지기 시작하였다. 알렌은 1884년 9월에 미국 북장로교회(北長老敎會) 선교의로서 청나라로부터 서울에 파견되었다.
알렌은 서울에 오자 곧 미국공사관의로 임명되고 다른 외국공사관들의 의사로도 위촉되었다. 그가 서울에 도착한 뒤 겨우 20여일이 지난 10월에 갑신정변으로 인하여 금위대장 민영익(閔泳翊)이 자객에게 중상을 입게 되자, 그 자리에 함께 참여하였던 외무독판 묄렌도르프(Möllendorff, P.G.V., 穆麟德)가 민영익을 자기 공관으로 데려가서 곧 알렌에게 응급왕진을 청하고 그 상처를 치료하게 하였다.
알렌은 출혈이 심한 상처에 약을 주입하여 곧 지혈시켰으나, 한때 그 상처가 곪아서 병세가 매우 위독하다가 다행히 경과가 좋아 3개월 후 완전히 건강을 회복하였다.
그리고 갑신정변이 일어나던 그때에 궁성을 호위하던 일본 병사와 선화문(宣化門) 밖에 주둔하던 청나라 병사들이 서로 충돌하여 청나라 병사 100여 명이 부상하였는데, 이 부상병들도 알렌의 치료로 많은 효과를 보았다.
이때 알렌의 명성은 서울에 자자하였으며 우리 민중, 특히 상류층에서 서양의술에 대한 신뢰심이 더한층 두터워지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알렌은 그 다음해인 1885년 2월에 미국 공사와 상의한 뒤 한국 정부에 건의하여 왕립병원(王立病院)을 설치하게 되었다.
이 병원은 혜민(惠民) · 활인(活人) 양원을 혁파하고 그 재원으로 재동(齋洞)에 설립하여 그 이름을 광혜원(廣惠院)으로 하였다가 약 2주일 후에 다시 제중원으로 고쳤다.
이 병원은 개설 당시부터 감리교파의 선교의에게 응원을 청하였으나 그 다음해에 미국 북장로교회로부터 엘러스(Ellers, A.J.M.D., 蕙論)가 파견되었다. 그 뒤 이 병원은 1887년에 남부 구리개[銅峴]의, 갑신정변 때 참화를 당한 홍영식(洪英植)의 집으로 옮겨 그 사업을 확장하였으나, 알렌은 그 해 가을에 워싱턴 한국공사관 고문으로 전직되고 제중원은 엘러스가 대행하게 되었다.
1890년 알렌은 서울에 돌아와서 왕립제중원의 일을 다시 맡았으나 그 해 10월에 미국공사관 서기관으로 총영사대리직을 맡게 되었다. 그와 함께 왕립제중원은 재정이 잘 지출되지 않아 경영의 곤란을 받던중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본부에서 캐나다 토론토대학교 의과대학의 에비슨(Avison, O.R., 魚丕信)을 파견하였다. 에비슨은 1893년 서울에 도착하여 제중원의 일을 보면서 왕실의 촉탁전의(囑託典醫)를 겸하였다.
그 다음해인 1894년 5월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그 해 6월 갑오개혁에 의한 관제(官制)가 반포되어 내무아문에 위생국을 두고 모든 의료행정을 서의법에 의하여 개혁하였는데, 개혁과 함께 정부의 재정도 곤란해져 왕립제중원의 관제를 폐지하고 제중원의 경영을 미국 북장로교파 선교회에 이관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제중원은 왕실의 경영을 떠나 선교회사업으로 조직되게 되었다.
이상과 같이 미국 북장로교파의 선교의들은 제중원을 중심으로 서울에서 많은 의료활동을 전개하였거니와, 미국 북감리교회와 영국 성공회감독교회 선교의들도 서울을 비롯한 각 지방의 주요 도시에서 의료사업을 개시하였다.
북감리교회에서는 서울의 종로와 정동 또는 동대문 북쪽에서 부인병원을 개설하고 부인전문의료사업을 실시하였으며, 영국성공회에서는 서울 남부 낙동에 성메듯병원을 개설하고 주로 남자 환자를 치료하였다.
그 밖의 지방으로 경기도에는 인천 · 개성, 충청남도에는 공주, 충청북도에는 청주, 전라남도에는 광주 · 목포, 전라북도에는 군산 · 전주, 경상남도에는 부산 · 진주, 경상북도에는 대구 · 안동, 강원도에는 춘천, 황해도에는 해주 · 재령, 평안남도에는 평양, 평안북도에는 선천 · 강계, 함경남도에는 원산 · 함흥, 함경북도에는 성진 · 회령 등 주요도시를 여러 교회의 교파들이 나누어 의료사업을 분담하여 실시하였으며, 그밖에 대구 · 부산 · 광주에는 나병요양소도 설치되어 각 교파들의 의료사업이 전국 각지에 널리 보급되게 되었다.
의료행정제도는 1894년 6월에 개혁을 단행하면서 의약행정제도로서 내무아문에 위생국을 설치하고, 서의학에 의한 일반 의료사무를 관장하게 하는 이외에 위생시험소를 따로 설치하여 두묘의 제조, 세균검사 · 혈청제조 및 음식물의 화학검사 등을 실시하였다.
그밖에 1899년에 내부직할병원의 설립관계를 반포하고, 그 다음해에 내부병원을 광제원(廣濟院)으로 고치고 일반 구료사업을 실시하였는데, 여기서는 종래 한의방의 한약소(漢藥所)도 병설하였다.
광제원은 내부병원 업무를 그대로 계승하여 일반 구료사업을 실시하는 것 외에도 죄수들의 진료 또는 전염병 치료시설도 갖추게 되었으며, 1906년부터는 창녀들의 검사를 실시하였다.
그런데 1907년에 의정부 직할로 대한의원(大韓醫院)이 설립되면서, 광제원의 업무를 그대로 인계하고, 그밖에 교육부와 위생부를 따로 증설하였는데, 그 해 12월에 대한의원관제를 개정할 때에는 치료부 · 의육부 · 위생시험부 3부로 나누게 되었다.
이밖에 군부(軍部) 소관으로 의무국과 육군위생원이 따로 설치되었고, 궁내부 소관으로 내의원(內醫院)을 태의원(太醫院)으로 고쳤는데, 이 원에서는 한의 출신의 전의들이 주로 진료에 종사하고, 그밖에 서의들을 궁내부 촉탁전의로 위촉하기도 하였다.
의학교육제도는 1899년에 학부 직할로 서의학에 의한 관립의학교가 설립되었는데, 수업연한은 3년이었다. 이 의학교는 1907년에 대한의원이 설립되면서 대한의원에 인계되어 대한의원 교육부로 개칭되었다가, 1910년에는 대한의원 부속 의학교로 되면서 의학교 안에 의학과와 약학과를 두었으며, 그밖에 산파 및 간호과도 병설하였다.
1906년에 대구와 평양의 동인의원(同仁醫院)에서 의학강습소를 설치하였으나 졸업생을 내지 못하고, 1910년 8월에 한일합병이 강행된 뒤 대구의학강습소 학생을 대구자혜의원(大邱慈惠醫院)에 인계하고, 평양강습소 학생은 대한의원 부속의학교가 새로 개편된 의학강습소에 전임시켰다.
그리고 사립의학교로서는 1899년에 제중원의 에비슨이 제중원의학교를 설립하고 의학교육을 실시하였으나 졸업생을 내지 못하고, 1904년에 미국 오하이오주 세브란스의 기부금으로 제중원을 세브란스병원, 제중원의학교를 세브란스의학교로 그 이름을 고치고 1908년에 처음으로 제1회 졸업생을 내게 되었다. 그 다음해인 1909년 정식으로 사립 세브란스병원의학교로 정부인가를 받게 되었다. 이것이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이다.
국치적 수난기의 의료행정은 조선총독부의 경무총감부 안에 위생과를 설치하고 의료사무를 전담하게 하였는데, 이것은 경찰에 의한 무단정책으로 그 사무를 강행하고자 한 것이다.
의료행정은 보건과 방역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졌는데, 보건사업에 종사하는 의인들을 서의학에 의한 의사와 종래의 한의법에 의한 의생(醫生)으로 나누는 이원적 제도를 채택하고, 의사는 의사 · 한지의사(限地醫師) 또는 치과의사 및 입치영업자(入齒營業者)로 구분하였다.
한지의사와 입치영업자는 그 당시의 부족한 의인들을 임시로 보충하기 위한 것이지만, 일정한 시험을 치러 그 자격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밖에 산파 및 간호부 · 안마술 · 침구술 등의 면허도 별도로 정하고 약업에 종사하는 자는 약제사 · 약종상 · 제약사 · 제약업자 및 매약업자 등으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그 당시의 의료사업을 보충하기 위하여 공의 · 촉탁의 제도를 두었는데, 공의는 공무의료에 종사하고 촉탁의는 주로 경찰의무의 필요에 따른 것으로 그 중에는 경찰의무전임자와 임시촉탁의 2종이 있었다. 전자를 촉탁경찰의, 후자를 경찰의촉탁이라 하였다.
공의와 촉탁경찰의들의 직무는 공통된 것이 많으나 공의는 주로 전염병 예방, 지방병 조사, 종두와 학교 및 공장 위생, 예기(藝妓) · 창기 · 작부들의 건강진단, 사체검안 등을 취급하고, 촉탁경찰의는 경찰관 및 지방공무원들의 공무상의 상해 · 질병 · 진단, 행려병자들의 처치 등의 업무를 취급하였다.
방역은 전염병 예방에 관한 것인데, 예방령에 규정된 전염병은 콜레라 · 적리(赤痢) · 장티푸스 · 파라티푸스 · 두창 · 발진티푸스 · 성홍열 · 디프테리아 · 페스트 등의 9종으로 되어 있었다. 이상의 9종전염병 이외에 만성전염병으로 폐디스토마 · 나병 등 지방병과 마진 및 폐결핵 등의 예방규정도 반포되었다.
의학교육제도는 대한의원 부속 의학교가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로 되었는데, 1916년 이 강습소가 4년제 경성의학전문학교로 승격되면서 3분의 1은 일본학생들을 수용하였다.
세브란스의학교는 그 뒤 4년제의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로 승격되고, 제2차 세계대전의 종말기에는 강압적으로 한때 아사히의학전문학교(旭醫學專門學校)로 그 이름을 바꾸기도 하였다.
그리고 1932년에는 수업연한이 예과 2년, 본과 4년의 6년제인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를 설립하였는데, 이 의학부는 일본학생 중심으로 설치되어 우리 학생들은 겨우 4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그밖에 대구의학강습소는 대구의학전문학교, 평양의학강습소는 평양의학전문학교, 경성여자의학강습소는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로 승격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1년 전인 1944년에 광주(光州) 및 함흥에도 의학전문학교가 설치되었으나 겨우 2학년을 모집하였을 뿐이다. 그리고 1922년에 치과의학교가 설치되었다가 1929년에 치과의학전문학교로 승격되었다.
이상과 같이 세계 의학의 지도권을 가졌던 독일 의학전을 일본을 통하여 간접으로 수용할 수 있었으며, 미국의 기독교 각 교파들의 전도사업과 함께 직접으로 미국 의학을 수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국치적 수난중에도 일본 · 독일 및 미국에 유학하고 돌아온 우리 나라 의학생들이 적지 않았으며, 국내의 의과대학이나 각 의학전문학교의 기초 교실과 임상학과에서 실지의료에 종사하면서 현대의학의 연구 · 실험논문들이 적지 않게 발표되었다.
이러한 연구논문들은 당시 국제의학의 수준을 능가할 만한 업적은 아니지만, 분과적으로 세분된 문제에 관한 독창력을 지닌 국제의학의 일원으로서 그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였다.
일제통치 하에서 고위 행정직이나 교수직으로부터 철저히 배제 당해온 우리 의학자들에게 광복 후 우리 의학을 독자적으로 발전시키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더욱이 정치적, 사상적 대립과 경제적 역경 속에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탄생되고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가던 우리 의학계는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로 그나마 남아 있던 공립병원 시설 등, 대부분 일제시대의 유산인 물적 기반까지 송두리째 잃고 말았다. 이후 1960년대까지 약 10년 동안 한국의 의학은 잿더미에서 모든 것을 다시 일으켜야 하는 고난의 시대를 보냈다.
이런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는 데에는 제2차 세계대전중 세계 일류의 의학을 이룩한 미국의 도움이 컸다. 특히 한국전쟁중에 들어온 미국의 군진의학, 스칸디나비아 3국의 의학, 그리고 미국해외재활본부(FOA), China Medical Board, 미국국제협조처(ICA), 미국민사원조처(CRIK) 등 각종 민간원조기관을 통한 교육기관의 재건과 교수들의 해외연수는 우리 나라 의학과 의술이 국제화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또 이를 통해 보건행정기관이나 민간의 의료기관도 새로운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그러나 재건의 빛이 감돌던 1960년대, 한국 의사들의 미국이민 붐이 일어나 이후 약 15년 동안 상당수의 한국의사들이 미국으로 건너갔고, 그들의 대부분은 아직도 미국에 남아 있다.
이는 우리 나라만의 현상은 아니며, 전후 구(舊) 식민지에 대한 의학적 원조의 결과들에서 으레 목격하는 공통적 부작용이다. 20세기 한국 의학의 주체성 문제를 생각할 때 안타까운 일이며, 1945년 이후 30여년간 한국의 의학은 미국 의존적인 모방의학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같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한국 의사들은 학회를 창설하고, 의학교육을 일으키고 병원 관리체계를 혁신하는 등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룩하였다. 현대 의학사에 대한 체계적 연구가 거의 없는 형편에서 명확한 근거를 가지고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 나라 의학은 1975년을 전후하여 본격적으로 독자적인 좌표를 설정하고 발전의 기틀을 잡았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해외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분야별 전문가들이 국내 학계에 자리잡고 분과학회별로 활발한 학술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의과대학도 양적, 질적으로 향상되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들어와 우리 의학은 점차 국제화하였고, 우리 의학자들이 생산하는 의학논문이 세계 유수 학술지에 속속 소개될 뿐 아니라 1995년 이후에는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특히 장기이식술, 암의 화학요법 등 첨단의학의 발전도 특기할 만하다.
그러나, 의학의 장기적 발전을 위해서는 기초의학과 임상의학, 그리고 한의학의 조화가 필수적임에도 불구하고 광복 후의 발전이 임상의학에 치우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역사적으로 우리는 과학기술 분야의 학문적 전통이 강한 편이 아니었다. 이 같은 전통의 취약성은 전후 폭발적으로 도입된 미국식 실용주의 의학의 조류에 편승하여 임상의학에 편중한 결과라 하겠다.
광복 후 일본인이 일시에 철수하자 의료계의 공백상태는 심각한 것이었다. 모든 의학교의 교수직은 공백이었고 학생수도 일본인 학생의 철수로 대폭 감소하였다. 학교 당국은 일본식 의학 교육제도와 교과과정을 개편하지 못하고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각 의과대학에서의 의학교육은 비교적 빠른 시기에 시작하였으나 교육관련기구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하여 미군정 초인 1946년에 문교부 고등교육국 내에 의학특수교육과를 신설하고 의학 교육제도를 미국식에 가깝게 개편하게 되었다. 개편에 있어서 4년제 의학전문학교를 폐지하고, 2년의 예과과정을 추가하여 6년제 의과대학으로 승격시키고 전국의 의학교육기관을 통일시켰다.
그러나 이에 대한 정돈작업도 상당히 오래 계속되었다. 당시는 졸업 후에 교육이나 수련이 일정한 기준이 없이 무질서하게 진행되고 있었고, 이에 따른 무질서한 전문과목 표방이 행해지고 있었다.
이를 시정하기 위해 1951년 9월 25일 「국민의료법」 시행세칙에서 전문과목을 내과 · 외과 · 소아과 · 산부인과 · 안과 · 이비인후과 · 피부비뇨기과 · 정형외과 · 정신과 · 방사선과 등의 10개 과목으로 정하였고 자격취득에 소요되는 수련연한을 5년으로 정하였다.
당시 한국에는 38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양분되었고 남한에는 경성의학전문학교 ·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 대구의학전문학교 · 광주의학전문학교 등 6개의 의학교가 있었고, 북한에는 평양의학전문학교 · 함흥의학전문학교가 있었다.
1945년 10월 행림원에 의학부가 신설되었는데, 이는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이다. 1953년 부산대학교 의과대학이, 1954년 가톨릭대학이 성신대학 의학부로 신설되었다.
1966년 경희대학교에, 1968년에 한양대학교, 충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에, 1970년에 전북대학교에 의과대학이 신설되었다. 전문과목의 증설은 1962년 3월 26일에 신경외과 · 마취과 · 병리학과 · 흉부외과 · 예방의학과 등 5개 과가 추가되었다. 또 1963년부터 병리학과는 임상병리학과와 임상병리과로 분리되었고, 1967년에는 결핵과가 전문과목으로 증설되었다.
1970년대에는 1971년 중앙대학교에, 1977년 연세대학교 원주분교에, 1978년 순천향대학교 · 계명대학교 · 영남대학교 · 인제대학교 등 4개 대학교에 의과대학이 차례로 신설되었다. 1975년에는 전문과목으로 성형외과가 신설되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서는 1980년 경상대학교 · 고신대학교, 1981년 원광대학교, 1982년 한림대학교, 1985년 동아대학교 · 인하대학교, 1986년 동국대학교 · 건국대학교, 1987년 충북대학교, 1988년 단국대학교 · 아주대학교 등 11개 대학교에 의과대학이 신설되었다.
1982년도에는 재활의학과가 신설되었고, 신경정신과가 신경과와 정신과로, 방사선과는 진단방사선과와 치료방사선과로 분리하여 전문과목을 표방하도록 하였다. 1986년에는 가정의학과가 신설되었다.
1990년대에는 1990년 울산대학교, 1991년 대구효성가톨릭대학교, 1995년 관동대학교 · 건양대학교 · 서남대학교, 1996년 제주대학교, 1997년 가천의과대학교 · 강원대학교 · 을지의과대학 · 포천중문의과대학, 1997년 성균관대학교 등 11개 대학에 의과대학이 신설되었다.
이로써 1998년 전국 의과대학 수는 총 41개에 이르게 되었고, 1998년 현재 졸업생을 배출하고 있는 대학은 32개로 1998년 한해의 졸업생 수는 2,842명이었다. 1995년에는 응급의학과 · 산업의학과 · 핵의학과가 전문과목을 표방하게 되었다.
급성전염병으로 장티푸스 · 발진티푸스 · 파라티푸스 · 발진열 · 성홍열 · 이질 · 뇌막염 · 뇌염 등이 해마다 유행하였다. 또 만성전염병으로 폐결핵 · 복막염 · 늑막염 · 결핵성 복막염 등이 유행하였고, 그 치료로서는 대기요법 · 영양요법 · 천자 등이 이용될 뿐이었다. 기생충도 만연하여 산토닌으로 치료하였다.
소아과 질환으로는 영양실조 · 위장질환 · 폐렴이 흔한 질환으로서 대중요법으로 치료되었고, 급성질환으로는 홍역 · 백일해 · 디프테리아 등이 유행하였고, 만성전염병으로 결핵성 뇌수막염 · 결핵성 장관결핵 등이 유행하였고, 디프테리아 치료혈장은 1930년대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진단용 기재로서는 1913년 우리 나라 최초로 세브란스 병원에 X-선 기구가 도입, 설치되었다. 개인병원에서는 문진 · 촉진 · 병력 · 청진기 등을 이용하여 환자진료를 하였고, X-선이나 심전도는 대학병원에서나 이용되었다. 치료제로서는 중조 · 디아스타제 · 건말 · 에비오제 · 비오페르민 등의 소화제와 아스피린 · 노발긴 · 아미노피린 · 펜아세틴 등의 해열진통제가 사용되었다.
1913년부터 수술에 클로로포름(chloroform)으로 전신마취와 척추마취가 시행되었고, 1914년부터 프로케인(procaine)에 의한 국소마취가 임상에 도입되었다. 1915년에 처음 충수절제술이 시행되었고, 1917년 간농양에 대한 수술로 천자배농법이 성공하였다. 산부인과에서는 자궁근종 · 난소종양 · 인공유산 · 임신중독증 · 난산 · 제왕절개술 · 자궁암 등의 수술이 시작되었다.
1930년에는 애버틴(avertin) 등의 정맥마취제가 도입되었고, 이와 함께 아편전 처치가 에테르(ether) 점적마취와 병행하여 시행되었다. 1940년 35mm X-선 간접촬영기가 도입되어 처음으로 X-선 집단 검진이 시작되었다.
내과적으로는 쇼크에 대한 치료, 수분전해질 균형, 정맥주사요법, 비경구영양법, 수혈 등이 소개되었고, 항생제, 항암제, 항응고제, 항결핵요법, 홍역 및 폴리오 예방주사, 생백신, 항나병 화학요법 등이 소개되었다.
디기탈리스 치료법, 신경안정제, 방사성동위원소 등도 이 시기에 소개되었다. 항생제로는 페니실린과 스트렙토마이신 및 INH가 소개되어 결핵 · 임질 · 매독 등에 사용되어 좋은 효과를 보았다. 그 후 항결핵제로는 1960년대까지 스트렙토마이신 · INH · PAS 등의 2자 병용요법이 시작되었다.
진단방법으로서는 생검법, 탈락세포진 검사, 투베르쿨린(tuberculin) 테스트, 혈청GOT, 혈청GPT, 폐기능검사, 조직배양, 형광항체면역법, C-reactive protein 등이 이용되기 시작하였다. 또 X-선 혈관조영 촬영이 국립의료원에 도입되었다.
외과적으로는 수혈, 전기소작 등의 지혈법이 소개되었다. 반측 전폐절제수술이 국소마취하에 실시되었고, 위식도 문합, 공장을 이용한 전흉벽식도 성형술, 교약성 심낭염 환자에게 심낭절제술, 십이지장위궤양 환자에게 미주신경절단술, 비신정맥문합술, 선천성 폐동맥협착증 수술, 개방성동맥관 수술 등이 시행되었다. 1959년에는 인공심폐기를 이용한 개심술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성공하였고, 1950년대 말에는 간침생검이 시작되었다.
1962년 치료방사선 장비인 Cesium-137이 한일병원에 처음 도입되고, 1963년 방사선 원격치료를 시작하였다. 1965년 심도자검사법이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내과에서 국내에 처음 소개되어 심기능 검사실을 개설하고 심질환 진단과 외과적 교정수술이 시행되었다.
1969년에는 생검용 위십이지장 fiberscope를 조기 위암진단에 이용하였다. 1964년 전신마취제로 할로탄(halothane)이 보급되기 시작하였고, 1967년 전신마취기에 자동호흡기가 부착된 장치가 사용되었다. 1969년 심장 초음파 검사(가톨릭의대 김삼수)가 시작되었다.
1960년 간암환자에서 간우엽절제술이 시술되었고, 1962년에 인공심폐기를 이용하여 국내 최초로 선천성 폐동맥협착증에 대한 직시하판막절개술이 성공되었다. 1969년에는 국내 최초의 신장이식이 가톨릭의대 이용각 교수팀에 의해 성공적으로 시행되었다. 이후 국내에서도 활발히 장기 이식이 시도되었다.
초음파진단법이 개발, 소개되어 담석증 진단 및 심초음파 진단에 이용되었다. 1977년 컴퓨터 단층 촬영기가 경희대학교와 연세대학교에 처음 도입되고, 감마카메라가 소개되어 영상진단의 커다란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다. 한편, 방사면역분석법에 대한 내분비기능검사가 소개되어 내분비학에 발전을 가져왔다.
한국형 출혈열의 원인인 한탄바이러스가 고려대학교 이호왕 교수에 의하여 발견되었고, 면역학의 발달로 A형 간염과 B형 간염의 바이러스 표지자 검사가 시작되었으며, 1979년 B형 간염 바이러스 보유자 혈청에서 백신을 개발, 실용화하여 간염 퇴치에 큰 공헌을 하였다.
1975년 수술현미경과 미세수술기구가 소개된 이후 동맥물합술, 뇌동맥류, 뇌동맥 기형 등의 치료가 가능하게 되고 미세혈관 수술이 발달되어 1975년 절단수지접합수술이 성공되었다. 그리고 인공 심박동기, 인공 신장기(혈액투석) 등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결핵치료가 INH · 스트렙토마이신 · PAS의 3자 병용요법시는 12∼24개월의 장기치료로, INH · 스트렙토마이신 · 리팜피신 · 피라진아마이드의 4자 또는 INH · 리팜피신 · 피라진아마이드 · 에탐부톨의 4자 병용요법시는 6개월 단기치료로 대체되었다.
1980년대에 관상동맥 조영술이 시작되었고, 1983년 관상동맥 풍선성형술이 시술되어 우리 나라에도 관상동맥질환에 대한 적극적인 진단 및 치료가 시작되었다. 이식수술의 면역억제제인 cyclosporinc-A가 국내에 도입되었고, 1981년 국내 최초의 골수이식을 성공하였다. 1984년 경피적신쇄석술이, 1988년에는 우리 나라 최초의 간장이식수술이 성공하였다.
1990년 복강경담낭절제술이 시술되었으며, 1992년 심장이식이, 1996년에는 폐이식 수술이 성공하였다. 1996년 유방암환자에 내시경을 이용한 최소침습수술법이 시행되었고, 1998년 심장수술에 최소절개수술(minimal invasive)이 시작되는 등 점차로 치료시 내시경 등을 이용한 비침습적 수술적 치료가 시도되고 있다.
1945년 말 일본인은 모두 귀국하였다. 38선 이남에 있던 5개 의과대학을 우리 나라 의사와 몇 안되는 기초의학자가 인수하였고, 의학전문학교를 의과대학으로 개편하였다.
세브란스의과대학은 예외였지만 다른 의과대학의 기초의학에는 대폭적인 자리이동이 있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기초의학 교수직에는 서울여자의과대학에서 대거 이동하여 취임하였다.
당시 만든 의과대학의 틀은 대부분 일본의 의과대학을 답습한 것이며, 해부학 · 생화학 · 생리학 · 병리학 · 미생물학 · 약리학 · 위생학 등 7개 교실로 구성되어 선진국 기초의학 모습과 같게 유지하였다. 고등교육을 받은 엘리트 집단이었던 의사 중에는 그 때에 기초의학 전공으로 전환한 경우가 많았다.
기초의학 전공자들은 광복 이후 6 · 25까지 짧은 기간동안 우선 학교 행정조직의 틀을 만들고 그 일부는 행정 보직을 맡는 교수가 되었고, 또 일부는 군정청과 정부의 고위 관리로 취임하였다.
그리고 각 기초의학 전공마다 학회를 결성하였다. 1945년 11월 30일 생리학자 15명이 창립한 조선생리학회를 시작으로 1946년 미생물학회 · 병리학회, 1947년 해부학회 · 약리학회, 1948년 예방의학회 · 생화학회 등을 각각 창립하였다. 이 시기에 기초의학 연구는 매우 미약했고, 당시 유행하였던 전염병 관리에 미생물학과 예방의학 학자들이 참여하여 역질의 전파를 방지하는데 노력하였다.
한국전쟁중 기초의학 교수들은 전시연합대학에 모여 계속 학생을 교육하거나, 군의관으로 근무하거나, 기초의학을 포기하고 개업하는 길을 걸었다. 육군과 해군, 공군에는 당시 최고급 기초의학자의 풀을 갖고 있었고, 이들은 전쟁 후 의과대학 재건에 기초가 되었다.
1952년 우리 나라 정부는 의사 면허제도를 바꿔 의과대학 졸업생에게 국가고시를 실시하고 보건사회부 장관의 의사면허를 발급하는 제도를 채택하였다. 그러나 의사면허 시험에 기초의학은 시험 과목에 포함되지 않았고, 이러한 관행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1953년 휴전이 된 다음 1960년대 초까지 우리 나라 의과대학은 급격한 변혁을 맞게 되었다. 미국 정부가 전쟁 후 복구를 원조하면서 ICA를 통하여 교수 재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 지원하였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뿐만 아니라 록펠러재단의 China Medical Board 등 공사립 재단의 지원으로 많은 기초의학자가 미국에서 현대의학을 접하게 되었고, 이것이 현재 기초의학 교육의 밑바탕이 되었다. 1959년에는 대한기생충학회가 대한미생물학회에서 분리하여 독립된 학문분야로 분화하였다.
1960년대 경제 성장과 함께 일반 국민으로부터 열화와 같은 지지를 받은 우리 나라 현대의학은 그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이었기 때문에 정부 주도로 의과대학을 대폭 증설하였다.
한편, 미국은 의사배출과 의료수요 사이에 불균형이 일어나고 월남전 참전으로 생긴 의사 부족현상을 메우기 위하여 외국의 의대 졸업생을 받아들이는 정책을 약 15년간 시행하였는데, 이 기간중 우리 나라 젊은 의사 약 4천명이 도미하여 국내 병원의 인력 수급에도 영향을 줄 정도였으며 더욱이 기초의학을 지원하는 의사는 매우 적었다.
1960년대 초부터 전국의 기초의학에서는 연구결과가 나오기 시작하여 1950년대 말부터 각 학회의 학술대회가 활성화되었다. 1960년대 후반기부터는 봄철 학술대회를 추가하기 시작하여 1년에 두 번 학술대회를 개최하는 것이 기초의학 학회의 기본 틀로 자리잡았다.
각 학회가 발행하는 학술지는 『대한미생물학회잡지』(1959년 창간, 1968년부터 속간) · 『기생충학잡지』(1963년 창간)를 시작으로 1964년 『대한생화학회지』, 1965년 『대한약리학잡지』 · 『대한생리학회지』, 1967년 『대한병리학회지』, 1968년 『대한해부학회지』 · 『예방의학회지』 등이 창간되어 기초의학 기본 8개 전공별로 학술지를 발간하게 되었다. 그 뒤 1976년 『대한법의학회지』, 1992년 『의사학』이 창간되었다.
의학교육 체제의 변혁을 우리 나라 의학교육에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1970년대 초반에 있었으나, 실제로 일어난 변화는 기초의학 교육 시간을 축소하여 통합강의에 할애하고 교과목의 학기별 배치에 자율성을 주는 정도로 그쳤다.
새로운 교육 체제에서 필요한 능동적 교육(active learning)에 교수와 학생이 모두 익숙하지 않았으며, 나쁜 상황에서 개혁하려고 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나라 기초의학이 가장 격심하게 변화하는 시기이다. 정부는 의과대학을 계속 신설하여 41개로 증가하였다. 그 결과 기초의학교실의 인원 구성은 계속 한계인원에 못 미쳤고 좋은 연구성과를 많이 얻을 수 없었던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미국의 경우 연구중심 의과대학이 아니라 할지라도 기초의학 교실은 교직만 보통 15인으로 구성하는 것과 너무 판이한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은 의대 기초의학에 대한 투자가 늘어나지 않는 한 개선될 가능성은 적다.
1990년대에 들어 기초의학과 의학연구 전반에 대하여 한국과학재단 · 한국학술진흥재단 · 보건복지부가 연구비를 투자하기 시작하였다. 연구비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연구비 지급 조건도 과거에 비하여 크게 개선되었고, 경쟁 체제로 심사 후 지급하므로 연구비 투자의 효율성도 상대적으로 좋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1997년 금융위기 이후 연구비 규모와 심사 및 지급체계를 대폭 개혁하였으며, 그 방향은 대형 연구과제 위주, 상업적으로 가시적인 결과가 기대되는 분야에 지급하는 것이어서 아직 소규모 연구에 머무른 대부분의 기초의학 연구실은 연구비의 위기상황을 맞았다.
1990년대 제일 큰 변혁은 기초의학에서 세분화, 전문화와 동시에 분자생물학 · 세포생물학 · 유전학 연구기법상의 통합과정이 일어나고 있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변화는 기존의 학문 분야를 애매하게 만들고 기초의학 교실의 장비와 연구기법을 거의 비슷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변화는 문제중심 교육(problem based learning)의 도입과 함께 기초의학교실의 구조를 재편하도록 하였다.
지난 40년간 우리 나라 의학교육과 연구에 투자가 적었던 결과 전공자 수가 적고 연구 수준도 전반적으로는 세계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세계적 보편성을 요구하는 의학지식 생산 산업에서 지난 50년간 NIH를 통하여 매년 100억불 이상의 투자를 계속한 미국의 의학과 경쟁할 수 있는 나라는 별로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초의학을 어떻게 재정비하느냐를 현명하게 결정하여야 시기가 가까워지고 있다.
다른 과학분야와 마찬가지로 과학지식 도입의 역사이다. 해부학 분야에서는 우리 나라 사람의 신체 계측치, 해부학 용어, 신경해부학, 면역 기구, 내분비, 위장관계에 대한 연구를 꾸준히 실시하였다. 자기방사선(autoradiography)과 조직화학, 면역조직화학 기법, 전자현미경 등을 도입하여 운영하였다.
생화학 분야는 가장 눈부시게 발전한 분야이다. 생리학 분야도 이 기간에 크게 발전하였으며, 특히 1980년대 중반 이후 전기생리학과 patch clamp를 빨리 도입하여 심장 생리학, 평활근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업적을 쌓았다.
병리학 분야는 1960년대 이후 외과병리학을 크게 발전시켰다. 외과병리학의 발전은 큰 의미가 있다. 병원의 진단 체계를 현대의학의 틀 안으로 안내하는 역할을 하고, 질병 발생 양상을 파악하는 기초적인 자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병리학계는 이 역할을 강화하기 위하여 인력 양성 체제를 1976년부터 레지던트 교육으로 전환하였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신경병리학 · 소화기병리학 · 부인과병리학 · 소아병리학 · 골병리학 · 피부병리학 · 세포병리학 등으로 전문화하였다. 1980년대 이후 실험병리학이 되살아나기 시작하여 면역병리학 분야에서 많은 업적이 나오고 있다.
미생물학 분야는 사회적 수요가 많았던 분야이다. 연구 업적으로 가장 뚜렷한 것은 한탄바이러스의 발견이다. 이것은 우리 나라 기초의학계가 세계에 내세울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연구 성과이다.
그리고 나병 · 쯔쯔가무시병에 관한 연구와 Helicobacter pylori 연구도 우리 나라 실정에서 필요한 연구였다. 미생물학 분야는 기생충학회 · 감염병학회 · 바이러스학회 · 면역학회와 화학요법학회를 파생시켰다.
약리학 분야는 인삼을 비롯한 천연물에 대한 약리학적 연구를 1970년대까지 지속하다가 그 이후 위장관 약리학을 비롯하여 심장약리학 · 임상약리학 분야로 발전하였다.
예방의학 분야는 우리 나라 정부가 필요성을 가장 절실하게 느끼는 분야로서 1950년대 말부터 보건대학원을 파생시켰다. 사회의학적으로 매우 다양한 분야를 관장하는 분야이며, 우리 나라 의료보험 정착에 크게 기여하여 현대의학이 그 주축이 되도록 하는데 역할을 하였다. 질병 통계를 비롯한 각종 자료를 분석하는 역학, 그리고 병원 관리, 의료 관리, 노동의학, 환경의학 등 사회적으로 중요한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기생충학 분야는 기초의학 기본 8개 분야 중 가장 작은 분야이다. 우리 나라에서 유행하는 기생충 질환은 세계적으로 주연구대상이 아니어서 그 문제를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밖에 없었던 사정을 이용하여 좋은 연구업적을 많이 발표하였다.
예를 들면, 회충과 같은 토양매개성 감염의 관리 과정을 면밀히 기록하고 그 역학적 특성을 전진적으로 연구하였으며, 간흡충 치료제 등을 새로이 평가하였고, 각종 조직 기생충 질환의 면역진단법을 자체적으로 개발한 것 등이다.
법의학 분야는 우리 나라에서 1970년대가 되어서야 꽃피기 시작한 분야이다. 동양 각국은 매우 오랜 법의학 전통이 있고, 1980년대의 정치적 소요 속에서 법의학의 사회적 필요성을 확고하게 정립하였다. 과학수사에 필요한 DNA finger printing기법을 도입하여 사회에 기여하였다.
의사학 분야가 오래동안 제 대접을 받지 못한 것은 우리 나라 의학계의 수치이다. 의학이 각 전문분야에서 심혈을 기울이는 각론의 학문이기는 하지만 거시적인 인문적인 안목이 없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으며, 1990년대에 연구성과들이 발표되기 시작하였다.
기존 일본식 학제와 새로운 미국식 제도 추가가 서로 잘 맞지 않는 모순을 내포한 상태였지만, 광복 후 약 40년간 임상의학은 세계수준으로 육박하리 만큼 발달해왔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여 일제강점시기의 경무청 산하에 있던 위생과를 보건사회부로 독립 편성하고, 의료인들은 의사협회 산하에 각 분과마다 학회를 결성하고 체계를 세워나갔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UN에서는 미국을 비롯하여 18개국에서 우수한 장비와 능력 있는 군의관을 파견하였다. 우리 국군의 군의관들은 이들과 함께 현지에서 부상병의 조기 이송, 혈액은행의 새로운 개념, 최신 마취법의 도입, 임상병리의 도입, 상처치료의 새로운 방법, 혈관외과의 시도, 상실된 신체의 재활을 위한 의지족 · 의안 제조 등 군진의학의 실지체험에 임하게 되었다. 한편 일부 군의관은 미국의 육 · 해 · 공군 병원에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기도 하였다.
민간에서는 미국해외재활본부(FOA)의 원조계획에 따라 초토화된 의료시설의 복구, 구미 여러 나라에서 파견된 민간병원에서 발전된 선진의학을 직접 받아드리게 되어 일제강점시대의 독일식 일본교육의 잔재를 완전히 씻어버리게 되었다.
의학교육기관에서는 China Medical Board에 의한 학교 병원 재건의 원조와 교환교수의 연수, 미네소타 프로젝트에 의한 교환교수들의 미국유학, 미국 국제협조처(ICA)와 미국 민사원조처(CRIK)의 후원에 의한 교육기관의 재건과 교수들의 해외연수 등으로 의학교육의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러한 원조는 196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1960년 이후는 각 분야에서 독자적인 발전을 하기 시작하였다. 1969년 신장이식을 시도하여 성공하였고 이때부터 시작된 신장이식은 1992년 이후는 보편화되었다.
1967년부터 시작된 각막이식 수술은 초기에는 69%의 성공률을 가지고 있었으나 1970년 이후는 90%의 성공률을 가져오게 되어 1997년 말에 이미 각막이식수술이 6,000건을 넘고 있어 각막이식 수술의 보편화를 말해주고 있다.
신장이식이 보편화되던 1992년경부터 간장 · 췌장 · 심장 등의 장기이식이 시작되어 1996년도 집계로는 간장이식 112예, 췌장이식 14예, 심장이식 69예를 시술하고 있다. 1997년 4월에는 뇌사자로 부터 폐와 심장을 얻어 동시 이식수술에 성공하였다.
1986년부터 시작된 골수이식은 현재 성공율이 매우 높아 90%이며, 1994년 1월에 설치된 골수은행에는 현재 약 2만5000명 이상의 골수 자원자가 등록되어 있다. 골수 채취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골수은행은 1997년 5월에 Umbilical Cord Blood Bank로 전환하여 성공리에 운영되고 있다.
1951년 한국전쟁 때에 경기 · 강원 지방에서 일선 장병에게 유행된 출혈열의 병원 바이러스를 1969년 우리 연구팀이 발견하여 1980년에는 진단용혈청과 예방약이 개발되어 제조판매에 들어 갔고, 역시 한국전쟁에 UN군으로 참전한 미국 군의관이 1951년 쯔쯔가무시병 환자 6명을 보고하여 한국에도 쯔쯔가무시병이 있음을 알게되었고, 1990년에는 한국형 쯔쯔가무시병의 진단혈청이 규명되고 1993년에는 예방약도 개발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전하고 남한에는 미군에 의한 군정이 시작되었다. 갑오개혁 이후 50년간 침체되어 있던 한의사들이 광복과 더불어 1945년 11월 3일 조선의사회를 창립하고 우선 법적지위의 복구와 한의학 육성에 착수하였다.
당시 미군정청에서는 법령 제1호로 중앙보건기구를 위생국으로 발족시켰으나 곧 보건후생국으로 개칭하는 등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수립되어 미군정은 한국정부에 정권을 이관했으나 한의사들의 법적지위를 복구하지 못하였다.
6 · 25 동란으로 수도를 부산으로 옮기고 국정을 집행하고 있을 때인 1951년 9월 25일 「국민의료법」이 새로이 제정될 때 한의사제도가 탄생되었다. 새로 제정된 「국민의료법」 제53조에 의해 부산지역 한의사들이 주축이 되어 부산한의사회를 결성하고 각 도에서는 도한의사회를 결성하였으며, 연합회 성격의 서울특별시 한의사회 회장이 중앙회장을 맡아 운영하였다.
1959년부터 한의사회의 분위기가 활성화되면서 사단법인 대한한의사협회로 개칭하고 11개 지부를 둔 중앙의료단체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국민의료법」은 1944년 조선총독부에서 마련한 「조선의료령」에 약간의 개정을 본 것으로 1종이 의사 · 치과의사이고, 2종이 한의사, 3종이 보건원 · 조산원 · 간호원 등으로 되어 있고, 의과 · 치과 · 한의학을 전공하는 대학 졸업 또는 검정시험합격자로서 국가시험 합격자라는 자격과 면허를 규정하고 진단서 · 검안서 · 사망진단서 등은 발급을 못하게 되어 있었다. 총독부에서 발부한 의생면허는 한의사로 격상하였으나 과목의 표방은 한방의과로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때에도 의사제도는 이원화가 되지 못하였다. 즉 한의사의 자격은 인정받았으나 한의사를 양성하는 대학의 규정이 없고 의과대학에서 한의학을 전공하는 제도이나 의과대학에 한의학과가 설치되지 못한 상태였다.
이러한 「국민의료법」이 1962년 3월 20일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법률 제1035호로 공포된 「개정의료법」도 역시 의사 일원화 제도였으나 1963년 12월 13일 개정, 공포된 「의료법」부터 현재의 한의사의 법적 지위가 확립되고 의료제도도 이원화가 되었다.
1945년 11월 3일 조선의사회를 창립한 한의사들은 한의사 육성을 서둘렀다. 1947년 12월 행림재단에서 동양대학관을 설립하고 정부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한편 동양의학회를 결성하고 『동양의학』도 발간하였다. 그러나 한의사 육성의 노력은 당시의 의료제도가 일원화로 되어 있는 「국민의료법」에 의하여 좌절되고 말았다.
그 후 1962년 3월 20일 공포된 「개정의료법」도 “국공립대학교 의과대학 재학중 최종 2년간 한방의학과에서 한의학을 전공하고 한의사 국가시험에 합격한 자”에 한하여 한의사 면허를 부여한다는 조항으로 여전히 의료제도 일원화로 되어 있었다.
이 의료법이 공포될 당시 한의학을 전공할 수 있는 대학으로는 동양의약대학(구 서울한의과대학)이 있었을 뿐이었으나, 대학설치기준령 미달이라 하여 문교부에서 폐교조치를 하였다.
이 조치로 한의사협회와 재학생들이 언론기관과 보건사회부, 문교부 등에 건의서와 탄원서를 제출하는 한편 한의대부활추진위원회를 조직하고 강력히 의과대학이나 한의과대학이 자유로이 해당의학을 전공할 수 있도록 의료법의 개정을 건의하였다.
이 결과 1963년 12월 13일 종전의 의료법에서 ‘최종 2년’과 ‘국공립대학교’라는 문구를 삭제하고, “의과대학 · 한의과대학에서 한방의학을 전공한 자로서 한의학사의 학위를 받고 한의사 국가시험에 합격한 자”로 개정되었다.
이 「개정의료법」이 공포되자 동양의약대학은 동양의과대학으로 개칭되고 6년제 의과대학으로 승격되었다. 1965년 12월 17일 동서의학의 조화로 ‘제3의학’을 지향하기 위해 경희대학교는 동양의과대학을 합병하여 경희대학교 한의학부로 출범하여 한의과대학으로 승격하게 되었다.
1968년에는 세계 최초로 한의학 석사과정이 설치되었고, 1971년에는 경희의료원 부속 한방병원이 개원되었으며, 1974년에는 한의학 박사과정이 신설되어 동서의학의 교류와 한의학 연구 발전을 도모하게 되었다.
2008년에는 한의학 및 의학의 공동교육 · 연구와 다학제간 연구를 수행하고 한의학의 과학화 · 표준화를 선도하고자 부산대학교 한의학전문대학원이 설립되어 석박사과정을 운영중이다.
1948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면서 11월 사회부에 한방과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8개월 후인 1947년 7월에 폐지되고 한방관련 행정사무는 의정국의 의무과, 의정과, 의료제도담당관 또는 의료제도과에서 맡아 오다가 27년만인 1975년 8월 제23차 보건사회부 직제개편 때에 의정국에 한방의약을 담당하는 의정3과가 대통령령 제7746호로 공포되면서 신설되었다.
의정3과는 의료제도과에서 관장하던 사무를 인수하고 동양의약학 분야의 제도 및 법령정비, 동양의약학의 연구개발 및 계몽사업, 한의약 요원의 수급계획 및 훈련, 한방의료단체 및 한의사와 침구사의 지도 감독, 한방치료제제의 개발, 한방의료기기의 조사연구 등의 업무를 관장하게 되었다.
이 외에 의정3과는 신설과로서 동양의약관련 각종 의료제도 조사, 한방의료계의 현안문제와 행정지원 사업, 보수교육 실시 등 정책적인 사업도 지원하게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대로부터 의료인을 의사라 하고 근세에 와서 동의학 · 동의라는 용어도 사용하였으나 한(漢)의사나 한(韓)방의사라는 명칭은 사용되지 않고 있었다. 개항 이후 일본인이 한국에 도래하면서 일본에서 사용되는 한방의 · 한방과 등 한의학이라는 낱말이 서양의학과 구별하여 자연스럽게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1980년 변정환은 저서 『한의(韓醫)의 맥박』에서 일제의 잔유물인 ‘漢’자를 자주적명칭인 ‘韓’자로 바꾸어야 온당하다고 제창하였다. 이보다 앞서 전주한의사회에서도 거론한 일이 있고, 관에서도 ‘韓’자를 사용한 일이 있었으나, 1985년 대한한의사협회에서 ‘한의학(韓醫學)’의 개칭문제를 사업으로 공식 결정하고 문헌조사와 사회여론조사에 나서 절대다수의 개칭 찬성을 얻어냈다.
1985년 8월 대한한(漢)의사협회는 「의료법」 · 「약사법」 등 보건관계법 중 자구표기에 관한 청원서를 보건사회부와 국회에 제출하여 1986년 4월 국회에서 심의 결의되어 1986년 5월 법률 제3825호로 한의사(漢醫師)를 한의사(韓醫師)로, 한약사(漢藥師)를 한약사(韓藥師)로, 한의원(漢醫院)을 한의원(韓醫院)으로 한의학에 관계되는 모든 ‘漢’자를 ‘韓’자로 표기하는 자구변갱법이 공포되었다.
1904년 저술된 후지가와(富士川游)의 『일본의학사』에 ‘나라조 이전의 의학’장 첫머리에 ‘한의방(韓醫方)의 수입’이라는 제목으로 한(韓)의학이 일본에 수입되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광무9년에 개정된 칙령 제18호 광제원 관제에도 ‘한(韓)약소’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특히 『조선의학사』를 저술한 미키(三木榮)는 한(漢)의학과 한(韓)의학을 분명히 구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의정3과가 신설되고 1988년 4월 국민의료정책심의위원회가 발족되면서 국가한방정책전담기구의 설치가 재론되어 동양의학개발육성사업이 정책적으로 시작되었다.
국민의료정책심의위원회의 4개 분과위원회 중 한방의료분과위원회에서는 중요심의안으로 한방의학 발전에 관한 사항과 한방의료보험에 관한 사항, 기타 한방의료제도 개선에 관한 사항 등을 토의한 결과 몇 가지 사항이 합의되었다.
국립한의학연구소 설립, 국공립병원에 한방진료부 설치, 한방전문의제도 신설, 의료법상 한방보건지도의 범위규정, 한방진료과목 추가표시, 한의사 국가시험과목 추가, 한방보건지도를 위한 관계법규 개정, 침구사법 부활, 한의사의 진단서 발급문제 등이었다.
국립한의학연구소 설립안은 대한의학협회 대표의 강력한 반대가 있었으나 채택되었고, 국공립병원에 한방진료부 설치건은 우선 1차적으로 국립의료원에 설치하기로 하고 성과에 따라 국공립병원에 확대 설치하기로 합의되었다.
한의사 국가시험과목 추가안은 국가시험과목을 확대하여 한방물리요법 · 본초학 · 한방생리학을 추가하기로 하고, 진단방사선과와 임상병리과는 의사측의 주장으로 부결되었다. 또 침구사법 부활문제 심의에서 침구학은 한의학의 한 분야로서 현재 한의과대학의 교육과정을 통해 침구전문교육을 하고 있으므로 한의학과 분리할 수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상의 육성방안은 6개월 간의 심의 결과 의결되어 한의학 현대화의 획기적인 전기가 되었다.
한의계는 1960년대부터 한방병원제도를 정부에 건의하였으나 「의료법」에 묶여 설치하지 못하고 있다가 1970년대에 이르러 의료기관의 시설규모가 대형화되고 한의과대학의 부속 한방병원 설립이 대두되면서 한방병원의 법제화가 시급하게 되어 보건사회부는 1973년 2월 법률 제2533호로 「의료법」을 개정, 발표하면서 한방병원이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이 개정된 「의료법」에는 종합병원의 시설기준을 80병상, 한방병원은 20병상 이상으로 규정하면서 진료과목은 한방내과 · 한방소아과 · 한방부인과 · 한방신경정신과 · 한방안이비인후과 · 침구과 등 6개로 하고, 부대시설로 숙직의사, 응급실 겸 처치실, 약품관리검사실, 한방요법실, 조제실 등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그 후 한방병원 수가 계속 증가하여 한방병원장들이 모여 1985년 11월에 한방병원의 육성, 발전과 제도 개선 및 의료요원의 수련교육을 통해 국민보건 향상에 기여한다는 설립목적 하에 한방병원협회가 창립되었다. 1988년 6월에는 보건사회부의 사단법인 인가를 받아 대한한방병원협회로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우리 나라의 의료계가 이원화 되어 한의학계는 이론적으로나 과학적으로 서양의학을 접목한 제3의학을 지향하여 연구 개발한다는 목적 하에 각 한의과대학에 연구소를 설치하고 국립병원에 한방과를 설치하는 등 한국의 특수성을 보여주고 있다.
보건복지부가 지원하는 즉 국립 한국한의학연구원이 있고, 각 사립 한의과대학 부설 한의학연구소 및 사설 한의학연구소가 12개소 있다.
그리고 1997년 현재 한방병원 수와 병상 수는 학교법인이 23개소에 6,459병상, 의료법인이 41개소에 2,144병상, 개인 한방병원이 50개소에 2,103병상이 있고 국립의료원에 한방진료부에 32병상을 가지고 있어 총 한방병원 수는 115개소, 병상수는 6,459이다.
이외에 한 · 양방 협진한방병원이 83개소가 있다. 한의과대학은 11개교로 매년 600명의 한의사를 양성하고 있어 한의사의 총수는 9,289명(1997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