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두를 함으로써 천연두의 면역성을 갖게 하고 감염을 예방한다. 종두법은 1796년(정조 20) 5월 영국인 제너(Jenner, E.)가 발견하였는데, 우리나라에는 정약용(丁若鏞)의 『마과회통(麻科會通)』의 권말에 부기된 「종두기법(種痘奇法)」에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1835년(헌종 1) 정약용이 일종의 기방(奇方)을 장(藏)하였다고 정확히 기술한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이 법이 실용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방법은 젖소에서 발생되는 두종(痘腫)을 침으로 긁어내어 소아의 팔 위에 접종하고 그 자리에 우두가(牛痘痂: 소의 종기에서 생긴 딱지)로서 마찰하면 그 뒤에는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 하였다.
그리고 1854년(철종 5)에는 평안도·황해도에서도 소아의 팔 위에 침으로 조그마하게 구멍을 만들어 우두즙을 마찰하면 틀림없이 효과를 거둘 수 있으며, 강원도에서도 우두가로서 팔 위에 접종하는 우두종법이 실시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볼 때 정약용은 1835년경에 우두종법의 효력이 확실하다는 것을 알고, 당시 중국 북경에 비밀리 내왕하던 천주교 관계자들로부터 그 방법을 자세히 듣고 실시하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정약용은 이보다 앞서 이미 인두종법(人痘種法)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우두종법을 실시하는 데 기술적 곤란이 없이 쉽게 실행에 옮길 수 있었을 것이다.
1854년경 평안도·황해도에서 실시한 것은 정약용과는 별도로 만주지방으로부터 의주(義州)를 거쳐 남쪽으로 내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종두법은 국부적으로 시행되어 오다가 서학(西學)의 탄압과 함께 중단되었다. 그 뒤 1876년(고종 13) 일본과 수호조약이 체결되면서 다시 우리나라에 정식으로 전해오게 되었다.
당시 한의학사 지석영(池錫永)은 1879년 10월에 부산에 있는 일본해군에서 설치한 제생의원(濟生醫院)에 가서 2개월간 종두법을 실시하고 두묘(痘苗: 우두의 원료가 되는 약) 3병(柄: 1병에 5개의 毛管이 들어 있음)과 종두침 2개를 얻어가지고 12월 하순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처가인 충청도 충주군 덕산면에서 40여 명에게 종두를 실시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지석영이 최초로 실시한 종두이다.
그리고 그 이듬해 정월 중순에 서울로 돌아와 종두를 계속하였는데, 가지고 올라온 두묘로서는 양이 부족하여 1880년 제2차 일본수신사를 수행하여 일본 동경으로 가서 독우(犢牛: 송아지)의 채장법(採漿法) 및 사양법(飼養法) 등을 전습한 뒤에 두묘 50병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이 단행되면서 의사행정의 혁신으로 내무아문(內務衙門)에 위생국을 두고 전염병 예방 및 종두사무 등을 맡게 하였으며, 우두종계소(牛痘種繼所), 종두의양성소, 종두소, 한성부 종두사(種痘司), 광제원(廣濟院), 대한의원, 위생시험소 등으로 제도가 변천되었는데, 이러한 행정사무나 복잡한 제도변천은 종두나 두묘의 제조가 그 당시 의사행정의 중요한 임무였음을 말해준다.
그 뒤 1967년 세계보건기구(WHO)의 천연두 근절계획 실천으로 환자 수가 줄어들고, 1977년부터 2년간 새 환자가 약간 발생하여 1979년 천연두 근절선언을 하게 됨으로써, 그 뒤부터는 종두법을 권장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