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임 ()

침구경험방
침구경험방
의약학
인물
조선후기 침의, 치종교수, 내침의 등을 역임한 의관.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본관
하양(河陽)
출생지
강원도 양양
주요 관직
침의(鍼醫)|치종교수(治腫敎授)|내침의(內鍼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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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허임은 조선후기 침의, 치종교수, 내침의 등을 역임한 의관이다. 출생일과 사망일은 미상이다. 성장과정은 알려진 사실이 거의 없고, 『침구경험방』 서문에서 어렸을 때 어버이의 병을 고치기 위해 의술을 배웠다고 밝힌 바 있다. 임진왜란 전부터 침의로 활동했으며 왜란 당시 광해군의 침의로서 종6품의 치종교수까지 지냈고 전쟁 후에는 선조의 편두통을 치료해 당상관에 올랐다. 광해군 대에 위성공신에 책봉되고 지방 수령을 지내다가 인조반정으로 관직에서 쫓겨나고 공신호도 삭훈되었다. 노년에는 공주에 머물면서 『침구경험방』을 저술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정의
조선후기 침의, 치종교수, 내침의 등을 역임한 의관.
개설

본관은 하양(河陽). 아버지는 양양(襄陽) 관노(官奴) 출신의 악공(樂工)으로 전악(典樂)까지 지낸 허억봉(許億逢)[許億鳳, 許億奉, 또는 許億福]이고 어머니도 사비(私婢)였다.

임진왜란 때 침의로 활동해 광해군으로부터 인정을 받았고, 전쟁 이후에는 선조의 편두통을 치료해 당상관까지 올랐다. 이후 광해군 대에 위성공신(衛聖功臣)에 책봉되고 지방 수령을 지내다가 인조반정으로 관직에서 쫓겨나고 공신호도 삭훈되었다.

노년에는 공주에 머물면서 『침구경험방(鍼灸經驗方)』을 저술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생애 및 활동사항

허임은 양양도호부(襄陽都護府)의 관노 허억봉(許億逢)[許億鳳, 許億奉, 또는 許億福]과 재상 김귀영의 사비 사이에서 태어났다. 출생 시기와 출생지는 알 수 없다. 아버지 허억봉은 악공 출신의 악사(樂師)로서 장악원 전악까지 승진했으며, 당대 최고의 피리 연주자였다. 또 거문고 연주도 잘하고 학춤도 잘 추었다.

부모로부터 미천한 신분과 뛰어난 재능을 함께 물려받은 허임은 임진왜란이라는 변수로 인해 침의(鍼醫)로서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으며, 침술을 통해 신분의 한계까지 극복할 수 있었다.

허임의 성장 과정에 대해서는 알려진 사실이 거의 없다. 의술을 배운 계기는 『침구경험방』 서문에서 어렸을 때 어버이 병을 고치기 위해서였다고 스스로 밝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이전부터 침의로 활동했으며, 임진왜란기에는 당시 왕세자로 전란 극복을 진두지휘하던 광해군을 모시고 다니면서 광해군의 인후증, 편두통 등을 치료하기 위해 수시로 침(鍼)을 놓았다.

여러 해에 걸친 왜란으로 인해 약재가 부족하고 전란의 부상자가 속출해 외과적 진료가 절실히 요구된 시기에 침의인 허임의 활약상은 두드러졌을 것으로 추측되며, 임진왜란 소강기인 1596년에는 종6품의 치종교수(治腫敎授)까지 올랐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내침의(內鍼醫)가 되어 국왕 선조에게도 침을 놓았다. 특히 1604년(선조 37) 9월 23일에는 한밤중에 선조가 평소 앓던 편두통이 갑자기 발작해 침을 맞는 자리에서 어의(御醫) 허준(許浚)의 추천으로 침을 놓았고, 그 공로로 품계가 당상관까지 올랐다. 이후에도 허임은 십여 차례 선조에게 침을 놓았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허임은 영평 현령, 부평 도호부사, 남양 도호부사 등 외직에 나가있으면서도 수시로 궐에 들어와 침을 놓았다. 1613년(광해군 5)에는 위성공신 3등에 녹훈되어 ‘갈충진성 위성공신 가선대부 하흥군(竭忠盡誠衛聖功臣嘉善大夫河興君)’이 되었다.

광해군의 총애가 높아지자 양반 관료들에게 질시의 대상이 되어 끊임없이 탄핵을 받았으며, 실록에는 그의 미천한 출신을 폄하하는 사관의 사론(史論)도 여러 차례 실렸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쫓겨나자 허임도 남양 도호부사에서 파직되고 위성공신호도 10년 만에 삭훈되었다. 하지만 그의 침술은 당대 최고의 수준이었으므로 그를 쫓아낸 인조마저 수시로 허임을 불러 침을 맞았고 효과를 보자 상을 내렸다. 그리고 정사원종공신으로 녹훈까지 하였다.

노년에는 임진왜란 때 석 달 가까이 머문 충청도 공주에 정착해 살았다. 이곳에서 평생의 임상경험을 집약한 『침구경험방』을 펴냈으며 후진 양성에 힘쓰다가 세상을 떴다. 조선시대 공주의 부전동(浮田洞) 마을인 충남 공주시 우성면 내산리에는 허임의 후손들이 살고 있으며, 허임의 제자로서 공주에서 올라와 내의원 침의로 활동했던 최우량(崔宇量, 1599~1671)의 후손들도 함께 살고 있다.

저술활동 및 추모

허임이 노년에 저술한 『침구경험방』은 1644년(인조 22)에 전라도 감영에서 목판본으로 처음 간행되었다. 당시 내의원 제조 이경석은 이 책의 발문에서 “태의(太醫) 허임은 평소 신의 의술로 일컬어졌고 평생 치료한 사람은 손으로 꼽을 수가 없다. 그중에는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낸 경우도 많아 일세에 명성을 떨쳤으며 침의들에게는 으뜸으로 추앙되었다. 지금 이 경험방은 귀로 듣고 마음에 담아두었다가 손으로 시험해 본 것이다. 분명치 않은 것은 분명하게 하고, 번거로운 것은 요약했으며, 틀린 것은 바로잡았다. 질병의 원인과 치료의 중요한 묘방이 한번 책을 열면 곧바로 눈앞에 선명하니 간략하면서도 쉽게 요약되어 상세하다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후 『침구경험방』은 여러 차례 간행되었고 언해본까지 나왔다. 일본에도 전해져 17세기 초에 이미 일본 판본으로 간행되었고, 중국에서도 청나라 말기부터 이 책의 내용이 포함된 『침구집성』이 여러 차례 간행되었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침구경험방』(허임 저, 강상숙·원치만·이은화 역, 사단법인 허임기념사업회, 2006)
「조선중기 침의 허임의 생애와 활동」(임선빈, 『역사와 실학』54, 2014)
「『금합자보』에 나타난 적보와 그 음악」(홍종진, 『국악과교육』34, 2012)
「침구의 허임의 공주 정착과 공주문화」(임선빈, 『충청학과 충청문화』5-1, 2006)
「허임 『침구경험방』의 역사적 이해: 치종의 전통을 고려한 하나의 제언」(김호, 『충청학과 충청문화』5-1, 2006)
「허임의 생애와 활동」(손중양, 『충청학과 충청문화』5-1, 2006)
「허임《침구경험방》연구」(이상창, 상해 중의약대학 박사학위논문, 2004)
「허임 침구 경험방 연구」(박문헌, 경희대학교 한의학과 박사학위논문, 2002)
「조선후기 동계조직과 촌락사회의 변화: 공주 부전대동계를 중심으로」(임선빈, 『동방학지』80, 1992)
관련 미디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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