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중기에, 예조판서, 병조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이어 부수찬 · 정언 · 수찬 등을 거쳐 1555년 김홍도(金弘度) · 유순선(柳順善) 등과 사가독서하였다. 그 해 을묘왜변이 일어나자 이조좌랑으로 도순찰사 이준경(李浚慶)의 종사관이 되어 광주(光州)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와 이조정랑이 되었다.
1556년 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을 거쳐 사헌부집의로 재임 중, 명나라에서 사신이 오자 예관(禮官)으로 활약하였다. 1558년 홍문관전한(弘文館典翰)에 올랐다가 곧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옮겼으며, 이 때 경연에서 경기내의 농민 생활 안정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이어 우부승지를 역임하고 이듬해 이조참의로 전직되었으나, 사간원의 탄핵으로 다시 우부승지로 체직되었다. 그 뒤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 춘천부사를 지냈고, 대사간 · 대사헌 · 부제학 등을 번갈아 역임하면서 군주의 공명정대한 처신과 윤원형(尹元衡) 첩자(妾子)의 허통(許通) 문제 등에 관해 활발한 언론을 하였다.
선조 즉위 후 도승지 · 예조판서를 역임하고, 병조판서로서 지춘추관사를 겸하였다. 1581년 우의정에 올랐고, 2년 뒤 좌의정이 되었다가 곧 물러나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다. 정여립의 모반사건 처리에 공이 있어 1589년에 평난공신(平難功臣) 2등에 책록되고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진 뒤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나, 조헌(趙憲)의 탄핵으로 사직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천도 논의가 있자, 이에 반대하면서 서울을 지켜 명나라의 원조를 기다리자고 주장하였다. 결국 천도가 결정되자 윤탁연(尹卓然)과 함께 임해군(臨海君)을 모시고 함경도로 피난했다가, 회령에서 국경인(鞠景仁)의 반란으로 임해군 · 순화군(順和君)과 함께 왜장 가토[加藤淸正]의 포로가 되었다.
이에 임해군을 보호하지 못한 책임으로 관직을 삭탈당했다. 이어 다시 가토의 강요에 의해 강화를 요구하는 글을 받기 위해 풀려나 행재소(行在所)에 갔다가, 사헌부 · 사간원의 탄핵으로 추국(推鞫)당해 회천으로 유배가던 중 중도에서 죽었다. 숙종 때 허적(許積)의 건의로 신원되었다.
참고문헌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국조방목(國朝榜目)』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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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진사 급제 : 『가정19년경자식2월23일생원진사방목(嘉靖十九年庚子式二月二十三日生員進士榜目)』(국립중앙도서관[古貴6024-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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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
: 문과 급제 : 『국조문과방목』 卷之七(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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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3
: 조헌의 탄핵 상소 : 『선조수정실록』 23권, 1589년(선조 22) 4월 1일. "백성을 구제할 것과 김귀영 등 조정 대신을 탄핵한 전 교수 조헌의 상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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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4
: 유배지에서 죽다 : 『선조수정실록』 27권, 1593년(선조 26) 5월 1일. "고 상신 김귀영이 적소에서 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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