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득기 ()

고전시가
인물
조선 후기에, 세자와 대군이 볼모로 심양에 가게 되었을 때 호종하였으며, 「봉산곡」을 저술하여 효종의 총애를 받은 학자.
이칭
영이(詠而)
우담(雩潭), 학정(鶴汀)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04년(선조 37)
사망 연도
1645년(인조 23)
본관
인천(仁川)
출생지
충청북도 충주
주요 관직
집의
관련 사건
병자호란
정의
조선 후기에, 세자와 대군이 볼모로 심양에 가게 되었을 때 호종하였으며, 「봉산곡」을 저술하여 효종의 총애를 받은 학자.
개설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영이(詠而), 호는 우담(雩潭) · 학정(鶴汀). 충청북도 충주 출생.

생애 및 활동사항

학문이 속성하여 경사백가(經史百家)에 통달하였으며, 역학 · 천문 · 지리 · 복서 · 음률 · 병서에도 조예가 깊었다. 32세 되던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남한산성이 함락되자, 분감척의(憤感斥議)하여 화산(華山) 선유동(仙遊洞)에 들어가 종로(終老)의 계(計)를 삼고자 하였다. 다시 상산(商山 : 지금의 상주)의 무지산(無知山)에 들어 두문불출하고 독서에 전심하였다.

그 뒤 봉림대군(鳳林大君 : 뒤의 효종)을 비롯한 세자 · 대군이 심양에 볼모로 가게 되어 인조가 그를 왕호(往護)로 불렀으나, 병을 핑계로 불응하여 3년 동안 보은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다시 인조의 권유에 의하여 나가 심양에서 대군들을 잘 받들었다. 이 때 세자 왕호에 오르는 감격의 정회를 읊은 가사 「봉산곡(鳳山曲)」을 지었으며, 특히 효종의 총애를 받았다. 환국시 임금의 소명이 있었으나 사양하고 낙동강상 옥주봉(玉柱峯) 아래에 복거하였다. 1798년(정조 22) 집의에 추증되었으며, 상주상의사(尙義祠)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우담 채득기와 봉산곡 연구」(홍재휴, 『어문학』제5호, 1959)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