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군징(主制群徵)』은 ‘세상을 주관(主管)하고 제도(制度, 統治)하는 하느님[天主]에 관한 무수한 증거들[群徵]’이란 제목의 풀이와 같이, 만물의 창조자(創造者)요 주재자(主宰者)인 천주가 실제로 존재함[實存]에 대해서 입증한 책이다. 이 책의 저자 샬 폰 벨은 1591년 독일 쾰른에서 출생, 1611년 예수회에 입회하여 1616년 사제서품을 받고 1622년 마카오를 통해 중국에 들어갔다. 샬은 역법(曆法)에 정통하여 명(明) 숭정제(崇禎帝)에게 『숭정역서(崇禎曆書)』를, 청(淸) 순치제(順治帝)에게는 『시헌력(時憲曆)』을 각각 지어 바쳤다.
『주제군징』은 저자가 서안(西安)에서 활동하던 때(1627~1630년) 저술되어 1629년 북경(北京)에서 상, 하 2권으로 간행되었다. 상권 30장, 하권 28장, 목차 1장, 총 59장(118쪽)으로 구성되었으며, 2쪽이 1장을 이루는데, 1쪽 당 9행, 1행 당 20자씩 한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상권에서는 자연현상을 통해서 천주가 실재(實在)함을 증명하였고, 하권에서는 피조물인 인간의 위대함과 한계성을 논하면서 이를 창조한 천주의 존재와 주재(主宰)함을 역설하였다. 샬은 이 책을 통하여 성리학에서 언급된 태극(太極), 이기(理氣), 음양(陰陽), 오행(五行) 등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오행 대신에 서양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四行說, 물[水], 불[火], 공기[氣], 흙[土]]로 우주의 구성을 설명했다.
이 책은 1644년 저자인 샬이 조선의 소현세자(昭顯世子)에게 지구의(地球儀), 예수상[耶穌像] 등과 함께 선물한 여러 종의 한문서학서 내에 포함되어 조선에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세자의 급서(急逝)와 함께 조선 사대부들에게 읽혀지지는 못했던 것 같다. 1732년 북경에 간 이의현(李宜顯)이 천주당에서 비성(費姓)의 서양 선교사로부터 『삼산논학기(三山論學記)』와 함께 선물 받아 조선에 전해졌는데, 1791년 진산사건(珍山事件, 廢祭焚主事件)으로 규장각에 소장된 이 책이 다른 서학서들과 함께 소각되기도 했다(『외규장각형지안(外奎章閣形止案)』). 간략한 문답식으로 엮어진 이 책은 천주의 존재와 그 섭리를 증명하기 위해 천문학, 의학 등 자연과학을 응용하여 서술되었다. 천문학과 관련해서 남인 실학자 이익은 “종동천(宗動天)이 하느님이 우주를 주재하는 섭리를 방불케 하는데, 영정(永靜)과 종동(宗動)은 추리가 가능하지만 실측으로는 불가능하다. 양마락(陽瑪諾)의 『천문략(天文略)』과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했다. 북학파 홍대용(洪大容)은 이 책을 발췌하여 “태양(太陽)이 성월(星月)의 종주(宗主)이다.”라고 서술했다(『담헌서(湛軒書)』 권4). 의학과 관련해서는 이 책에 서양 중세의 전통 의학서인 갈레노스(Galenos)의 「인체생리설」이 간략하게 소개되었는데, 이익은 「서국의(西國醫)」라는 제목으로 이 학설의 원리, 혈액 · 호흡, 뇌척수신경에 관한 이론 등을 소개하였고(『성호사설유선』 권5), 19세기 소론 계통의 실학자 이규경도 「인체내외총상변증설(人體內外總象辨證說)」에서 이 책의 이론을 인용하여 소개했다(『오주연문장전산고』 권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