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의현 ()

기사경회첩 중 이의현 초상
기사경회첩 중 이의현 초상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형조판서,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덕재(德哉)
도곡(陶谷)
시호
문간(文簡)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69년(현종 10)
사망 연도
1745년(영조 21)
본관
용인(龍仁)
주요 관직
겸열|금성현령|이조정랑|이조참의|대사간|형조판서|우의정|영의정
관련 사건
신임옥사|정미환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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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이의현은 조선후기 형조판서,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669년(현종 10)에 태어나 1745년(영조 21)에 사망했다. 1694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목호룡의 고변으로 신임옥사가 일어나 노론 관료가 처벌될 때 평안도에 유배되었다가 영조가 즉위한 후에 해배되어 형조판서에 서용되었다. 이후 노론의 영수로서 노론 4대신의 신원을 위해 진력하여 1740년의 경신처분과 1741년의 신유대훈을 이끌어 냈다. 김창협(金昌協)의 문인으로 문학(文學)에 뛰어나 명문장가로 천거되었다. 문집으로 『도곡집』 32권을 남겼다.

정의
조선 후기에, 형조판서,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덕재(德哉), 호는 도곡(陶谷). 이후천(李後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정악(李挺岳)이다. 아버지는 좌의정 이세백(李世白)이며, 어머니는 정창징(鄭昌徵)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김창협(金昌協)의 문인으로 문학(文學)에 뛰어나, 숙종 때 대제학(大提學) 송상기(宋相琦)에 의해 당대 명문장가로 천거되었다. 1694년(숙종 20)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검열(檢閱) · 설서(說書) · 정언(正言) · 금성현령(金城縣令) · 부교리(副校理)를 거쳐 1707년 이조정랑, 이어 동부승지 · 이조참의 ·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1712년 다시 이조참의가 되었으나 판서 윤덕준(尹德駿)과의 불화로 부제학으로 옮겨 그 뒤 대사성을 지냈으며, 황해도관찰사로 2년여 재임한 뒤 도승지 · 경기도관찰사 · 예조참판을 역임하였다.

경종이 즉위하자, 동지정사(冬至正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형조판서에 올랐다. 이조판서를 거쳐 예조판서에 재임하던 중 왕세제(王世弟: 뒤의 영조)의 대리청정문제로 소론 김일경(金一鏡) 등의 공격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났다. 뒤이어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신임옥사가 일어나 많은 노론 관료가 죄를 입자, 그 역시 정언 정수기(鄭壽期)의 논척(論斥)으로 평안도 운산에 유배되었다. 영조가 즉위해 노론이 득세하자, 풀려 나와 1725년(영조 1) 형조판서로 서용되었다.

그러다가 이조판서로 임명되어 수어사(守禦使)를 겸하면서 명류(名流)를 조정에 끌어들이는 데 힘썼다. 같은 해 왕세자 죽책제진(竹冊製進: 세자의 책봉을 대나무에 새긴 글을 만들어 올림)의 공로로 승문원제조(承文院提調)와 비변사유사당상(備邊司有司堂上)을 겸했다. 공정한 성품을 인정받아 특히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임명되어, 유봉휘(柳鳳輝) 등 소론의 죄를 다스리는 임무를 맡았다.

이듬해 예조판서로 옮기고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이 되어 세자빈객을 겸하다가 1727년 우의정에 발탁되었다. 이 때 좌의정 홍치중(洪致中)과 함께 김일경 소하(疏下)의 이진유(李眞儒) 등 5인의 죄를 성토하고 처형을 주장하다가, 노론의 지나친 강경책에 염증을 느낀 왕에 의해 정권이 소론에게로 넘어가는 정미환국 때 파직되어 양주로 물러났다. 이듬해 무신란(戊申亂)이 발생하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기용되어 반란 관련자들의 치죄를 담당하였다. 이어 『경종실록』 편찬에 참여했으며, 1732년 사은정사(謝恩正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35년 특별히 영의정에 임명되어 김창집(金昌集) · 이이명(李頤命)의 신원(伸寃)을 요구하는 노론의 주장을 누그러뜨리도록 부탁받았으나, 신원할 수 없다는 반야하교(半夜下敎: 밤중에 내리는 교서)에 사직을 청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삭직되었다. 그러나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의 구원으로 곧 판중추부사로 서용되어 양주에 머물면서 국가의 자문에 응하였다. 1739년 영중추부사로 승진, 1742년 치사(致仕)하여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신임옥사 때나 정미환국 등의 비상시 때마다 청의(淸議)를 지켜 의론을 굽히지 않았다. 또한 영조 초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사사로운 보복에 급급했던 민진원(閔鎭遠) · 조관빈(趙觀彬) 등의 전횡을 견제하고 청론(淸論)을 심으려 노력해 사림의 신망을 크게 얻었다. 민진원이 죽은 뒤 노론의 영수로 추대되었으며, 노론 4대신(김창집 · 이이명 · 이건명 · 조태채)의 신원과 신임옥사가 무옥(誣獄)임을 밝히는 데 진력하였다. 그 결과 1740년의 경신처분(庚申處分)과 1741년의 신유대훈(辛酉大訓)으로 신임옥사 때의 충역시비(忠逆是非)를 노론측 주장대로 판정나게 하였다.

청검(淸儉: 청렴하고 검소함)을 스스로 실천, 청백리로 이름났다. 「금양위박미비(金陽尉朴瀰碑)」 · 「충정공홍익한갈(忠正公洪翼漢碣)」 등의 글씨가 있으며, 저서로는 『도곡집(陶谷集)』 32권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참고문헌

『숙종실록(肅宗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당의통략(黨議通略)』
『도곡집(陶谷集)』
관련 미디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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