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계창(季昌), 호는 만암(晩菴). 유속(柳洬)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형조정랑 유성오(柳誠吾)이다. 아버지는 영의정 유상운(柳尙運)이며, 어머니는 이행원(李行遠)의 딸이다.
1684년(숙종 10) 진사가 되고, 1697년(숙종 23)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글이 격식에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유상운의 아들이어서 급제했다며 급제가 취소되었다. 1699년(숙종 25) 식년시에 을과로 급제, 수찬 · 부제학 · 동지의금부사를 거쳤다. 1721년(경종 1) 사직으로 있을 때 노론 4대신(김창집 · 이이명 · 이건명 · 조태채)이 중심이 되어, 왕의 아우인 연잉군 이금(延仍君 李昑: 뒤의 영조)을 왕세제로 책봉하고자 할 때 강력히 반대하다가 실패하였다. 이어 삼사와 노론이 유봉휘를 문초하자고 주장했으나 영의정 조태구(趙泰耉)가 왕에게 진언해 무마되었다.
그 뒤 왕세제의 대리청정이 실현되자, 소론의 영수로서 왕이 병을 앓지 않은데도 대리청정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극간해 철회시키고 노론을 실각시켰다. 1722년 우부빈객(右副賓客)이 되고, 다음 해 이조판서로 승진하였다.
1725년 영조가 즉위한 뒤 탕평책으로 노론 · 소론의 연립 정권이 수립될 때 우의정이 되고, 이어 소론 4대신의 한 사람으로 좌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신임옥사를 일으킨 주동자라는 노론의 집요한 공격을 받고 이듬해 면직되었다. 이 해 다시 이봉익(李鳳翼) · 민진원(閔鎭遠) 등의 논척으로 경흥에 안치되었다.
1727년 4월 20일 유배지에서 죽었다. 이 해 7월 3일 영조의 특지로 관작이 추복되었다. 그러나 1755년(영조 31) 3월 2일 반역죄로 몰려 다시 관작이 추탈되었다. 1908년(순종 2) 4월 거듭 복권되었다.
일찍이 1710년(숙종 36) 당시 양민에게 큰 부담이던 군포(軍布)의 폐단의 시정을 건의한 바 있다. 이광좌(李光佐)와 다르게 소론에서도 과격파에 속하여 노론의 탄압에 적극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