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봉휘 ()

유봉휘 글씨
유봉휘 글씨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우부빈객,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계창(季昌)
만암(晩菴)
시호
충정(忠靖)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59년(효종 10)
사망 연도
1727년(영조 3)
본관
문화(文化, 지금의 황해도 신천)
주요 관직
우부빈객(右副賓客)|이조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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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우부빈객,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계창(季昌), 호는 만암(晩菴). 유속(柳洬)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형조정랑 유성오(柳誠吾)이다. 아버지는 영의정 유상운(柳尙運)이며, 어머니는 이행원(李行遠)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84년(숙종 10) 진사가 되고, 1697년(숙종 23)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글이 격식에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유상운의 아들이어서 급제했다며 급제가 취소되었다. 1699년(숙종 25) 식년시에 을과로 급제, 수찬 · 부제학 · 동지의금부사를 거쳤다. 1721년(경종 1) 사직으로 있을 때 노론 4대신(김창집 · 이이명 · 이건명 · 조태채)이 중심이 되어, 왕의 아우인 연잉군 이금(延仍君 李昑: 뒤의 영조)을 왕세제로 책봉하고자 할 때 강력히 반대하다가 실패하였다. 이어 삼사와 노론이 유봉휘를 문초하자고 주장했으나 영의정 조태구(趙泰耉)가 왕에게 진언해 무마되었다.

그 뒤 왕세제의 대리청정이 실현되자, 소론의 영수로서 왕이 병을 앓지 않은데도 대리청정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극간해 철회시키고 노론을 실각시켰다. 1722년 우부빈객(右副賓客)이 되고, 다음 해 이조판서로 승진하였다.

1725년 영조가 즉위한 뒤 탕평책으로 노론 · 소론의 연립 정권이 수립될 때 우의정이 되고, 이어 소론 4대신의 한 사람으로 좌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신임옥사를 일으킨 주동자라는 노론의 집요한 공격을 받고 이듬해 면직되었다. 이 해 다시 이봉익(李鳳翼) · 민진원(閔鎭遠) 등의 논척으로 경흥에 안치되었다.

1727년 4월 20일 유배지에서 죽었다. 이 해 7월 3일 영조의 특지로 관작이 추복되었다. 그러나 1755년(영조 31) 3월 2일 반역죄로 몰려 다시 관작이 추탈되었다. 1908년(순종 2) 4월 거듭 복권되었다.

일찍이 1710년(숙종 36) 당시 양민에게 큰 부담이던 군포(軍布)의 폐단의 시정을 건의한 바 있다. 이광좌(李光佐)와 다르게 소론에서도 과격파에 속하여 노론의 탄압에 적극적이었다.

참고문헌

『숙종실록(肅宗實錄)』
『경종실록(景宗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국조방목(國朝榜目)』
『약파만록(藥坡漫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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