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사천(泗川). 참판 목진공(睦進恭)의 후손이며, 남인(南人)의 서얼(庶孽)이다.
일찍이 종실인 청릉군(靑陵君)의 가동(家僮)으로 있으면서 풍수술(風水術)을 배워 지사(地師)가 되었다.
처음은 노론인 김용택(金龍澤)·이천기(李天紀)·이기지(李器之) 등과 왕세제(王世弟: 영조)를 보호하는 편이었으나, 1721년(경종 1) 김일경(金一鏡) 등의 소(疏)로 김창집(金昌集) 등 노론 4대신이 실각하여 유배되고 소론정권이 들어서자, 다음 해인 1722년 소론편에 가담하여 경종을 시해하려는 모의가 있었다는 이른바 삼급수설(三急手說)을 고변(告變)하였다.
이 고변으로 인하여 역모(逆謀)로 지목된 60여 명이 처벌되는 옥사가 일어나고, 건저(建儲) 4대신(四大臣)인 이이명(李頤命)·김창집(金昌集)·이건명(李健命)·조태채(趙泰采) 등이 사형되는 신임사화가 있었다. 목호룡은 고변의 공으로 부사공신(扶社功臣) 3등으로 동성군(東城君)에 봉해지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랐다.
그 뒤 1724년 영조가 즉위하면서 노론의 상소로 신임사화는 무고로 일어난 것임이 밝혀지자, 김일경과 함께 붙잡혀 옥중에서 급사하였다. 죽은 뒤 당고개(唐古介)에서 효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