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업 (𢢜)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형조판서, 대사헌, 참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사긍(士兢)
기오헌(寄傲軒)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69년(현종 10)
사망 연도
1738년(영조 14)
본관
안동(安東)
출생지
한산(韓山)
주요 관직
형조판서|대사헌|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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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형조판서, 대사헌, 참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긍(士兢), 호는 기오헌(寄傲軒). 충청남도 한산 출신. 권인(權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권전(權佺), 아버지는 사간 권양(權讓), 어머니는 홍사도(洪思道)의 주1 권변(權忭)의 동생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91년(숙종 17) 증광문과에 병과로 주2해 승문원정자가 되었으며, 1694년 정언을 역임했다. 1699년 지평이 되어 두메 산골 읍민들이 세포(歲布) 대신 돈이나 쌀로 바치기를 원하며, 또 그 양도 줄여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상소를 주3

1701년 보덕, 1707년 헌납 · 장령을 역임하고 그해 사은 겸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11년 집의가 된 뒤 동부승지 · 의주부윤을 역임했으며, 1717년 경상도관찰사에 이어 1719년 충청도관찰사가 되어 우도균전사(右道均田使)를 겸했다. 1720년(경종 즉위년) 평안도관찰사, 이듬해 대사간이 되었으며, 이어서 형조참판 · 강화유수 · 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1725년(영조 1) 한성부우윤이 되었으며, 그해 사은 겸 주청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 공조판서 · 좌참찬을 역임했다. 이듬해 형조판서가 된 뒤 호조판서 · 한성부판윤을 지냈으며,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호서안무사가 되었다. 그러나 일찍이 이곳의 관찰사를 지낸 권업이 도내 사정을 잘 안다고 해 다시 충청도관찰사에 제수되었다.

1730년 다시 한성판윤이 되고, 이어 예조판서 · 지돈녕을 거쳐 1734년 다시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고향으로 무단 퇴거해 부임하지 않아 상주에 부처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다시 기용되어 동지정사로 청나라에 다녀와 대사헌이 되었으며, 이어서 좌참찬 · 우참찬을 역임했다.

참고문헌

『숙종실록(肅宗實錄)』
『경종실록(景宗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회헌집(悔軒集)』
주석
주1

본관 및 가계 : 『국조문과방목』 卷之十三(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주2

문과 급제 : 『국조문과방목』 卷之十三(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주3

세포 관련 상소 : 『숙종실록』 33권, 1699년(숙종 25) 11월 13일. "세포의 징수·전세의 양감·과장의 일에 대한 지평 권업의 상소"

집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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