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평안남도 진남포시 용정리(龍井里)에 설립된 진남포 천주교회(본당)는 1897년 진남포의 개항과 함께 빌렘(Wilhelm, 洪錫九) 신부가 설치한 공소(公所)에서 발전하였는데, 초대 주임신부 프랑스 선교사 포리(Faurie, 方) 신부가 본당 설립과 동시에 초등교육 기관으로 돈의학교를 부설했다. 천주교 사제이면서 저명한 식물학자였던 방 신부는 신자 수 30명 안팎의 작은 본당이었던 진남포 본당을 신자들의 열성에 힘입어 성당을 신축하는 한편, 기존에 사용해오던 공소 건물을 개조하여 돈의학교를 설립했다. 초대 교장 이평택(李平澤, 파트리치오)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교육이념으로 하여 지역사회에 천주교를 알리고 교세를 확장하기 위하여 돈의학교를 착실하게 운영한 결과 설립 몇 년 만에 진남포에서도 손꼽는 명문 사립학교로 성장시켰다. 그러나 1906년 제2대 주임 신부로 부임한 르레드(Julius Lereide, 申) 신부가 부임할 즈음 재정난이 닥쳤고, 본당 신부가 30세 미만의 젊은 나이로 교육활동에 별다른 열성이 없어서 학교는 거의 해체 직전의 상황에 직면했다.
1905년을 전후하여 안중근(安重根, 토마스)은 중국 상해(上海)에서 르각(Le Gac, 곽) 신부로부터 인재 양성의 중요성을 듣고, 교육을 통한 구국계몽(救國啓蒙) 활동에 투신할 뜻으로 서우학회(西友學會)에 가입하고 비밀결사였던 신민회(新民會)와도 일정한 연관을 맺고 있었다. 1906년 3월 안중근은 그의 형제들과 함께 황해도 신천의 청계동(淸溪洞)에서 진남포로 집단 이주하면서, 곧바로 가산(家産)을 기울여 진남포 지역의 교육 사업에 뛰어들었다. 안중근은 돈의학교와 야학교였던 삼흥학교(三興學校)의 주요한 교무(敎務)를 전담하면서 경비를 부담해 두 학교는 다시 활로를 찾았고, 돈의학교는 사실상 재설립되었다.
안중근 교장은 교사를 증축하고 교원을 증원하는 한편 생도를 널리 뽑아 특히 목총과 나팔과 북 등을 사용하면서 군대식 훈련을 실시한 교련(敎鍊) 과목을 중점적으로 이수하게 했다. 그 결과 1908년 9월 15일 개최된 황해도와 평안남·북도 등 3개 도(道)의 80여 개 학교에서 온 3,000여 명의 학생들이 참여한 운동회에서 3등을 차지하는 우수한 성과를 올렸다. 돈의학교의 학생 수는 1907년 1월 45명이었고, 교사로는 임안당의 부자와 외사경찰인 순검 정씨가 있었는데, 정 순검은 비번일 때 자진하여 학생들에게 체조를 가르쳤다. 1907년 7월 안중근은 교장직을 사임하면서 학생들과 교직원에게 행한 고별사에서 “도끼(형벌)가 내 앞에 있어도 인(仁)을 임하면 반드시 실천하고, 솥(형벌)이 내 뒤에 있어도 의(義)를 본다면 반드시 나아가리라(斧鉞在前 臨仁必踐 鼎鑊在後 見義必往).”는 말로 애국투혼의 의지를 드러냈다.
안중근 형제가 돈의학교의 재정을 담당하면서 실질적인 중흥(中興)의 기틀을 마련해준데 힘입어, 르레드 신부도 성당을 신축하면서 돈의학교를 증축하여 보다 많은 학생들을 수용하여 재학생만 약 300명에 이르게 되었다. 또한 1909년에는 지정여학교(智貞女學校)를 신설하여 진남포 지역 여성교육의 물꼬를 텄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프랑스 선교사들이 전쟁터로 소집되어 가면서 르레드 신부도 본당을 떠났다. 이에 본당 운영은 평신도 회장 김윤성(가브리엘)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심각한 재정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1916년에는 본당에서 부설했던 교회학교 2곳(돈의학교, 지정여학교)이 모두 폐쇄되었다. 돈의학교 출신으로는 안중근 의사에게 배워 그의 애국활동을 흠모했던 제자로 해방 후에 『義彈의 凱歌- 安重根血鬪記』를 저술했던 이전(李全)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