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광무 1) 12월 조선대목구(朝鮮代牧區) 원산 본당의 브레(Bret, 白類斯, 알로이시오) 신부는 두만강 이남의 회령(會寧)과 그 이북의 호천개[湖泉浦] 등지에 있는 조선인 가톨릭 신자들의 신앙공동체(교우촌)를 순방하여 성사를 집행하였다. 당시 간도 지역은 형식상으로는 파리 외방전교회가 사목하는 만주교구(교구장 Guillon 주교)에 속하였지만, 사실상 조선대목구가 사목하는 공소(公所)가 설립되어 있었다. 이후 화룡현(和龍縣), 연길현(延吉縣), 왕청현(汪淸縣), 혼춘현(琿春縣) 등지에 교우촌과 공소 및 교회 부설 사립학교들이 설립되어, 1909년 간도협약이 체결될 때까지 간도 지역에는 2개 본당[영암촌(三元峰), 용정(龍井)]에 대략 2,700여 명의 신자들이 있었다. 1920년 8월, 간도 지역의 사목은 신설된 원산대목구로 이관되었고, 기존의 용정, 영암촌 본당 외에도 팔도구(八道溝) 본당 등 3개 본당에 각각 베네딕도회의 독일인 사제들이 파견되어 약 7,500명의 신자들을 사목하였다.
1921년 3월 19일 교황청의 결정에 따라 간도 지역 조선인 천주교회의 사목관할권(司牧管轄權)이 정식으로 만주의 길림교구에서 조선의 원산교구로 이관되었다. 이때 교황청은 간도뿐만 아니라 위도 39도에서 48도를 넘어 송화강(松花江)과 흑룡강(黑龍江)의 지류 우수리강(烏蘇里江)어귀까지 즉 흑룡강성 의란(依蘭) 지역까지도 조선의 원산교구에 사목권을 위임하였다. 1928년 원산교구장 사우어(Bonifatius Sauer)주교는 정치적으로 중국에 속해있던 간도의 입지를 고려한 후 교황청에 건의하여 간도를 연길지목구(延吉知牧區)로, 의란을 독립된 포교지로 분리했다. 이로써 만주와 간도 지역의 사목재치권은 한국 천주교회로부터 분리되었다. 1928년까지 간도지역에는 기존의 3개 본당 외에 연길하시(延吉下市), 육도포(六道泡), 훈춘, 다조구(茶條溝), 돈화(敦化) 본당 등 5개 본당이 더 증설되어 모두 8개 본당, 12명의 선교사, 11,764명의 신자들이 있었다.
간도 지역에 최초로 가톨릭교회의 복음을 전한 평신도 김영열은 흔히 ‘간도 복음의 사도’로 불리는데, 1892년경 동학(東學)을 연구하고 있던 그 스승 김이기(金以器)로부터 천주교에 대해 전해 듣고, 1896년 봄 고향인 호천개를 떠났다.그는 천주교를 학습하기 위해 직접 서울로 오던 중에 원산본당의 베르모렐(Vermorel, 張若瑟) 신부를 만나 교리를 배워 1896년 5월 세례와 견진성사를 동시에 받고 천주교 서적과 성물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 결과 최규여(崔規汝, 그레고리오), 유패룡(劉覇龍, 라우렌시오) 등 10여 명이 즉시 입교하여 원산 근처에서 합숙하면서 교리를 배웠다. 이에 1897년 5월 원산 본당의 브레 신부가 간도 지역의 신자들 12명에게 세례와 견진성사를 동시에 주면서 이들을 ‘북관(北關)의 12종도’라고 불렀다. 이때 박연삼(朴連三, 루가)이 회령과 간도 지역의 회장으로 임명되어, 브레 신부의 복사이자 원산의 회장이던 조 요셉과 함께 간도에서 선교에 힘썼다. 간도에서 첫 번째로 설정된 공소는 1898년 말 브레 신부의 방문으로 공소가 된 부처골[佛洞]에 위치한 대교동(大敎洞) 공소였다. 신자들의 노력으로 각지에 공소와 교우촌이 세워지면서 가톨릭 교리와 함께 한글을 가르치는 소규모 학교가 세워져 1899년까지 싸리밭골, 호천개, 부처골 등에 일종의 교리학교가 설립되었으며, 1906년 용정에는 삼애학교(三愛學校)라는 정식 소학교가 세워졌다. 이어 1908년 삼원봉 공소에는 화룡서숙(和龍書塾)이 설립되어 이후 덕흥학교(德興學校), 대립자(大拉子) 해성학교(海星學校) 등으로 발전하였다. 간도 지역은 한때 무정부, 치안부재 상태에 놓여 마적(馬賊) 등이 교우촌을 약탈하고 신자들을 납치하였는데, 1910년 조양하(朝陽河)에 파견된 최문식(崔文植, 베드로) 신부도 1919년 마적들에게 납치되기도 했다.
1890년대 후반부터 1920년대 후반까지 약 30년간 한국 천주교회는 간도 지역에 선교사를 직접 파견하여 사목관할권[裁治權]을 행사함으로써 간도가 한민족의 활동무대이자 고유한 영토였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했다. 또한 간도 지역에 조직된 간도교회는 1919년의 3·1만세 운동을 비롯하여 북간도 지역에서 이루어진 각종 독립운동에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참여함으로써, 일제강점기 한국 천주교회의 독립운동을 주도하고 애국심을 고양시켰다고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