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나무나 철사로 뼈대를 만들고 그 위에 종이를 붙여 만든다.
대개의 경우 북극과 남극을 쇠막대로 꿰어서 축(軸)으로 하였는데 지구의 자전, 해와 달 및 별의 일주운동(日周運動), 4계절의 변화, 밤낮의 길이의 변화, 수륙의 분포, 지형의 관찰, 항해와 항공로의 실제상황 등을 아는 데 긴요하게 이용된다.
중국의 경우 1267년에 자말 알딘(Jamal, al Din, 札馬魯丁)이 아라비아에서 가져온 모형에 관한 기록이 있으나 후세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은 것 같다. 우리나라에는 서양선교사의 영향을 받아 지구의가 도입된 것으로 보인다.
중국 천주교계의 대학자 황비묵(黃斐默)이 지은 『정교봉포(正敎奉褒)』에 이 사실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순치(順治) 원년 조선국왕 이종(李倧)의 세자가 북경에 볼모로 왔을 때, 탕약망(湯若望)의 이름을 듣고…… 세자 귀국에 임하여 약망은 번역된 천문서·산학(算學)·성교정도(聖敎正道) 등 여러 책과 함께 여지구(輿地球) 1대와 천주상(天主像) 1폭을 보내주었다.”
이 글에서 이종은 인조의 이름이고, 세자는 인조의 맏아들 소현(昭顯)을 말하며, 여지구는 지구의를 뜻하고 있는데, 1645년(인조 23) 봄에 소현세자가 서울에 가져온 것이다. 이것이 지구의에 관한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