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화(李景華)는 김포이씨의 11세손으로 출신지는 전해지지 않으나 평안도 성천(成川)으로 추측된다. 자는 원량(元亮)이다. 당대의 학자이자 관료였던 이병모(李秉模, 1742~1806)에게서 “경사백가(經史百家)를 연구하지 않는 바가 없다.”라는 칭송을 받기도 하였다.
영조 때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여 자신을 진사(進士)라고 표현하였다. 평범한 의가라기보다 유의(儒醫)로 불리는 것이 타당하다. 『광제비급(廣濟秘笈)』을 저술하였는데, 이는 1790년(정조 14) 이병모에 의해 간행되었다.
『광제비급』 발(跋)에서 이경화는 스스로 어려서 입신에 뜻을 두었지만 출생의 한계에 좌절하여 과거를 포기하고 의학 공부로 전향하여 50년간 의업을 행해오면서 매일 10여 명의 환자를 보았다고 밝히고 있다.
또 『광제비급』 서(序)에서 이병모가 그를 평하기를 “스스로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의사로 불리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라고 하여 실질적으로 의업(醫業)을 행하여 온 의원(醫員)임을 알 수 있다.
특히 『광제비급』 4권의 「향약단방치험」은 민간에서 구하기 쉬운 약재 50종을 취해 한글로 향약명(鄕藥名)을 기재하고 주치(主治)와 복용법을 낱낱이 서술하여 병에 따라 쓰임을 판별하고 급한 병을 치료하는데 도움을 줄 목적으로 편찬되었다.
「향약단방치험」은 외형상 『본초강목(本草綱目)』 중 「발명(發明)」·「부방(附方)」뿐만 아니라 인용 서적 표기까지 그대로 가져와 『본초강목』에 대한 의존도가 상당히 높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본초의 선택, 병증의 정리, 문자의 구성, 본초 치험 내용의 변경, 자신의 임상 경험추가 등을 통해 『본초강목』을 자신의 임상 경험에 맞게 새롭게 변화시키고 있다.
『광제비급』은 중앙정부가 아닌 지방에서 간행된 임상 의서이면서 조선 의서로는 드물게 향약 활용과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