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말기와 대한제국 시절에 일제의 압박에 의해 서양의학을 전문으로 하는 의학교가 설립되어 의사까지 배출되는 상황이었으나, 한의학은 제도권에서 점차 소외되고 있었다.
이에 시종겸전의(侍從兼典醫) 장용준(張容駿), 전의(典醫) 홍철보(洪哲普), 전의보(典醫補) 김병관(金炳觀) 등이 1904년 4월에 한의학교의 신설을 청원하여 고종의 승인 하에 동제의학교(東濟醫學校)가 설립되었다. 이 학교는 짧은 기간(1904~1907) 밖에 존속되지 못하였으나 최초의 근대식 한의학 교육기관으로, 훗날 한의학 부흥에 토대가 되었다.
갑오개혁이 실패로 끝나면서 일제의 무력에 의한 강요로, 우리의 의사행정(醫事行政) 및 의료교육제도가 서양의학적으로 변혁이 되었다. 1899년 3월에 칙령 제7호로 반포된 의학교관제에 의하여 관립의학교(官立醫學校)를 설립하고 수업연한을 3년으로 학부아문(學部衙門)에서 직할하게 되었다.
이는 한의학교 말살정책의 시작이며, 더욱이 같은 해 7월에 발표된 학부령 제9호인 의학교규칙에서 학과목 16개 과목을 모두 서양의학 과목만으로 배정하게 되어 한의학 말살정책이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한의학은 학문의 배출구가 봉쇄된 상황에서 한의학 교육을 위하여 장용준 등이 1904년 4월에 현금(現今)의 의학교는 서양의학을 전문으로 하는 학교이니 다시 한의법(漢醫法)에 의한 대한의학교(大韓醫學校)의 신설을 청원하였다.
서의학보다 한의학에 더 신념을 갖고 있었던 고종의 승인 아래 야주개(세종문화회관 뒤 당주동) 봉상시 남문골에 있는 내담시(內膽寺) 관사에 학교를 정하였다. 강사로 도교수(都敎授)에는 김영훈(金永勳)을, 부교수(副敎授)에는 전광옥(田光玉)을 정하였다. 이때 교수선발시험에 50여 명이 응시하여 1차 면강(面講, 醫書講讀), 2차 배강(背講, 醫書暗誦), 3차 이강(理講, 醫學文理論證)을 거쳐 선발하였다.
면강은 『황제내경(黃帝內經)』과 『난경(難經)』이었고, 배강은 『의학입문(醫學入門)』, 『동원십서(東垣十書)』, 『단계심법(丹溪心法)』이었다. 고시관은 전의 홍철보·장용준·이학호(李鶴浩)가 하였다.
1905년 4월부터 한의학 교육이 시작되었는데 그때의 학생 수는 40여 명에 이르렀다. 동제의학교는 1년간을 유지하여 오던 중 탁지부로부터 경비가 지출되지 않아 중단되게 되었을 때, 다시 고종에게 주청하여 고종의 사용재(私用財)인 명례궁(明禮宮)의 친용금(親用金)을 지불하게 되어 3년간이나 더 계속하게 되었다고 한다.
1906년에 일본인 고문관 의사인 좌좌목(佐佐木)이 한의사들을 광제원에서 축출하기 위해 예고도 없이 서양의학 시험을 보아 한의사들을 낙제시켜 축출하였다. 1907년 6월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됨에 따라 동제의학교도 개교한지 3년 만에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 그 후 대한의학강습소 또는 강습원으로 개편되어 한의교육이 실시되었다.
1910년 8월 2일에는 동제의학교의 뒤를 이어 쇠퇴해 가는 한의학의 재기와 전승을 위하여 동서의학강습소를 만들게 되었는데, 한의학강사는 박준승(朴準承), 서병효(徐丙孝)가, 서의학강사는 안상호(安商浩), 유병필(劉秉泌)이 맡았다. 그러나 1913년 12월까지 만 3년의 단명으로 끝났다.
1953년 서울한의과대학이 설립되기 전까지 약 반세기 동안 한의학 공식교육기관은 없었고, 2006년 부산대학교에 한의학전문대학원 설립 발표가 나기 전까지는 국립 한의학 교육 기관은 없었다.
동제의학교가 비록 3년이란 짧은 기간 존속하고 외세에 의해 폐쇄되고 말았지만, 수천 년 전통의 민족의학의 재기를 위해 노력한 점은 충분히 고려되어야 한다. 또한 최초의 근대식 한의학 교육기관이면서 동시에 현재의 국립 한의과대학에 해당하는 위치를 점했다는 점 또한 평가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