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는 문헌의 기록이 있으나 근래에는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기원이 분명하지 않다. 다만, 이두향명으로는 ‘가사초(加士草)’·‘남칠(藍漆)’이라고 표기하였는데, 『동의보감』의 탕액편(湯液篇)에는 ‘가ᄉᆞ새’로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1600년대 이후의 문헌에서는 기록을 찾아볼 수가 없다.
단지 이명으로 ‘남칠’이라고 부르는 것은 『본초강목』 만초류(蔓草類)에서와 진장기(陳藏器)의 『본초습유(本草拾遺)』에서 인용한 것이다. 『본초습유』는 중국의 당나라 때인 739년에 저술된 책으로, 그 내용 중에 생신라국(生新羅國)이라고 한 것을 보면 그 당시에 이미 중국과의 약재교류가 빈번하였음을 추측하여 알 수 있다.
그 형태는 뿌리가 수염뿌리로 세신(細辛)과 같다고 하였으며, 약성(藥性)은 온(溫)하고 독이 없으며, 맛은 맵다고 하였다. 효능은 주로 인체 내에 응결된 냉기가 쌓여서 발병한 해수(咳嗽)에 즙으로 만들어 복용하면 치료된다고 하였다. 또, 『동의보감』에는 분말로 만들어 꿀로 환약을 빚어 복용하면 해수에 유효하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마도 민간속방(民間俗方)으로 통용되던 것이 채록되어 전해지다가, 조선 중기 이후 사용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약재의 품귀와 효능의 미비로 점차 응용이 되지 않은 것으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