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는 전파를 이용해 소리를 전달하는 통신장치이며, 더 나아가 정보와 문화를 전달하는 대중매체이다. 1895년 마르코니가 발명하여 해상 통신에 활용되기 시작하였다. 상업방송은 1920년대부터 시작하였다. 한반도에서는 1927년 경성방송이 개국하며 라디오방송이 시작되었지만, 일제의 식민지 통치 아래에서 제한적으로 운영되었다. 해방 후에 미군정의 영향을 받아 상업방송 중심으로 발전하였고, 1960년대 이후 민간방송이 활성화되면서 라디오 방송의 황금기를 맞이하였다. 2000년대에는 아날로그 방송에서 디지털 방송으로 전환이 이뤄졌다.
최초의 라디오는 1895년(고종 32) 굴리엘모 마르코니(Guglielmo 주1가 발명하였다. 이 시기에는 라디오는 단순한 신호 전송 장치였으며, 주로 해양에서의 안전성을 높이기 위해 사용되었다. 레지널드 페슨든(Reginald Fessenden)은 1906년(고종 43)에 첫 번째 음성 라디오방송을 성공적으로 하였고, 라디오의 음성 전송 기능이 가능하게 된 시점이었다. 이후 리 드 포레스트(Lee De Forest)는 1907년에 오디언(Audion) 트리오델레이트를 개발하여 라디오의 신호 강화 기능을 향상시켰다. 1910년대에는 라디오방송의 인기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1920년 11월 2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서 세계 최초의 상업 라디오방송국인 KDKA가 개국하였는데, 첫 방송은 1920년 미국 대통령 선거 개표 방송이었다. 유럽에서의 라디오방송은 영국 BBC의 1922년 뉴스 프로그램이 최초였다.
한반도에서 라디오의 역사는 식민지기였던 1927년에 주2 JODK의 경성방송에서 시작되었다. 그 전에 전화 방송이 시도된 바 있었다. 1924년 12월 17일, 조선일보사의 주최로 우리말로는 처음으로 ‘무선 전화 방송 공개 시연’이 있었다. 1926년 11월 31일에는 경성방송국이 사단법인으로 설립되었다. 청취료는 월 2원을 받았고, 허가받은 청취자에게 ‘청취 허가증’을 발급하는 방식이었다. 방송 내용은 주로 일본어 방송인 경제 시황 보도와 한국어 방송인 물가 시세· 일기예보·공지 사항 등이었다.
해방 이전 라디오 수신기 한 대의 가격은 10~20원까지 하여 당시 쌀 한 가마 가격이 4원인 것과 비교할 때 매우 큰 액수였다. 이 수신기를 유지하는 데 드는 전지 소모량 또한 막대하여 일반대중용으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한국어와 일본어인 양국어 혼용 단일 방송은 개국 초부터 청취자들의 불만을 누적시켰다. 당연히 수신기 보급이 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1929년 말에 간신히 1만 대를 넘어섰고, 1932년 말에는 고작 2만 562대에 머물렀다. 경성방송국[JODK]은 유일한 재원인 청취료 수익이 나빠지면서 경영난에 빠졌다. 해결책은 이중방송 실시[한국어 방송과 일본어 방송]와 전국 방송망 확충이었다.
이중방송 시행 이후 하루 방송 시간은 16시간으로 확대되었고, 수신기 보급도 급격히 증가하였다. 1933년 말에는 3만 2000여 대였던 것이 1936년에는 7만 3000여 대, 1937년 말에는 11만 2000여 대에 도달하였다. 이 시기에는 기술 발전으로 인해 라디오 수신기의 전원이 대형 전지에서 가정용 교류전원으로 교체되었고, 1938년에는 전지식 진공관 수신기는 거의 사라졌다. 라디오 수신기는 가정의 장식물처럼 외형도 변화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이듬해인 1938년에는 일제와 식민지 조선에 국가 동원령이 발표된다. ‘한 집에 한 대 라디오 비치’라는 국방 표어가 만들어졌고 국방 수신기가 널리 보급되었다. 이 시기의 아마추어 무선가들은 적극적으로 전쟁을 돕기도 하였다. 1934년에 결성된 애국무선대는 추계 육군대 연습에 참여하였고, 1942년에는 면허가 있는 관동, 동북 지역 아마추어 무선가들이 국방무선대를 조직하였다. 하지만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는 상황에서는 라디오방송을 통제해야 하였다. 패색이 짙어가는 전쟁 상황이 알려지는 것을 막아야 하였기 때문이다.
광복 당시 경성중앙방송국은 미군정청의 감독을 받으며 미국의 상업방송 유형을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에는 북한으로부터 전기 공급이 중단되면서 전기 상황이 극도로 악화되어 방송 청취가 어려워졌고, 지방 방송국은 방송을 중단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 수신기의 보수용 진공관·저항 및 콘덴서 등이 크게 부족하였기 때문에 진공관 하나만 못 쓰게 되어도 수신기를 사용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수신기 진공관의 보급이 원활하지 못하자, 방송협회는 월간 5,000개의 진공관을 재생할 수 있었던 재생 공장에 역점을 두고 일본 와타진공관제작소와 기술제휴를 하여 재생 공정을 그대로 도입하는 등 생산설비 체제를 갖추는 데 힘썼다. 이어 조선전기산업주식회사와 범아전자공업주식회사가 설립되어 미군용 건전지를 개조하여 라디오 수신기에 맞도록 재조립하였으며, 라디오 수신기 부품을 도입하여 수신기 수리와 진공관 재생을 하기도 하였다.
1947년 8월 집계된 수신기는 약 18만 5700여 대로, 서울과 경기 지역에 68%, 주요 도시에 27%가 집중되어 있었다. 이 중 약 5만 대의 수신기는 진공관 부족으로 사용되지 못하였는데, 방송협회는 군정 연합사령부를 통해 약 2만 대의 수신기를 보수할 수 있는 물자를 미국과 일본에서 조달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안정도와 감도가 떨어지는 스트레이트식 수신기가 주로 사용되었으나, 전쟁 중 군사 통신 기술의 발전으로 1950년대부터는 안정도와 감도가 뛰어난 슈퍼헤테로다인식으로 수신기가 교체되었다. 정부수립 이후에는 해외 교포, 선교사, 미군 전용 PX 등을 통해 다양한 라디오 수신기가 유입되었으며, 이들 대부분은 미국 제품으로 직류 전용, 교류 전용, 교류 직류 양용 라디오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교류 직류 양용 라디오는 전압이 낮고 정전이 잦았던 당시 매우 인기가 있었던 라디오였다. 이후 중파용뿐만 아니라 단파대까지 지원하는 2밴드용 라디오 수신기도 많이 유통되었다.
6·25전쟁 직전인 1950년 초부터는 신형 진공관인 소형 진공관을 쓴 수신기가 들어왔으며, 또한 주3와 주4을 겸한 라디오 수신기도 서울의 해외 공관 등에 모습을 나타냈다. 전쟁이 끝난 뒤에 라디오방송은 시설 확장 및 방송망 구축 등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 가면서 발전 기반을 다져나갔다. 또한, 이때부터는 민간방송 및 상업방송이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1954년 12월에 민간방송인 기독교방송[CBS]이 출력 5㎾, 주파수 700㎑로 개국하였다. 1961년 12월에 문화방송[MBC]이 5㎾, 900㎑로, 1963년 4월에 동아방송[DBS]이 10㎾, 1,230㎑[나중에 792㎑로 변경]로 개국하였다. 1964년 5월 20㎾, 1,380㎑로 개국한 라디오서울이 같은 해 6월에 주파수를 640㎑로 바꾸었고, 1966년에 동양방송[TBC]으로 개칭하였다.
FM방송은 서울에프엠방송이 1965년 6월 1㎾, 89.1㎒로 개국한 것이 시초이며, 그 뒤 문화FM·한국FM 등의 민간 FM방송도 개국하였다. 그리하여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라디오방송의 황금기를 맞게 되었다.
한편, 이와 더불어 국내에서도 1957년에 삼양전기, 1958년에 금성사가 최초의 라디오 생산업체로 등장하여 수신기 부품을 수입하여 라디오 생산을 시작하였다. 이처럼 방송의 활성화와 국산품 제조에 따른 수신기의 가격 하락에 힘입어 1960년대 이후 수신기 보급률이 급격히 증대하였다. 1959년에 겨우 30만 대를 넘어섰던 보유 대수는 1960년에는 42만여 대로 늘었고, 1961년 9월에는 89만 3000대, 1961년 말에는 100만여 대를 돌파하게 되었다.
이 무렵 금성사는 진공관식 수신기의 제작에 이어 트랜지스터라디오 수신기 생산에 착수하였으며, 1962년에는 처음으로 라디오를 홍콩에 수출하기도 하였다. 한편, 5·16군사정변 이후 정부는 특정 외래품의 판매 금지 조처를 단행하고 ‘농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 등을 전개하였으며, 이에 따라 국산품의 판로가 더욱 증대되었다. 게다가 1963년 이후에는 주5·MP콘덴서·가변콘덴서[^6]·스피커 등의 부품이 국산화됨에 따라 국내의 라디오 생산은 점차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1966년을 전후하여 이 수신기의 생산이 급격히 증가하여 심한 경쟁을 유발하기도 하였다. 원자재의 국산화 비율은 수출용과 내수용을 합하여 1967년에는 27.5%였으나, 1968년도부터 크게 개선되어 57.5%로 증가하였고, 1970년에는 70%로, 다시 1971년에는 90%를 초과할 정도로 급성장하였다. 한편, 1966년 동양방송의 에프엠방송을 계기로 해서 1966년 금성사는 일본의 히타치[日立]와 기술도입 계약을 체결하고 1967년부터 에프엠수신기 생산에 착수하였다.
1980년의 라디오방송은 언론 통폐합 사건으로 인해 방송사들이 대폭 축소되면서 라디오 문화의 다양성도 감소하였다. 하지만 민주화운동이 확산하는 1980년대 중후반에는 라디오가 민주화운동의 중요한 매체로 활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3년이 되어서야 단파 라디오 소유가 합법화되었다는 사실 역시 민주화의 수혜라 할 수 있다.
1990년대 이후 텔레비전이 대중매체의 중심으로 자리 잡으면서 라디오 청취율은 감소하였다. 라디오는 텔레비전과 차별화하기 위해 다양한 포맷의 프로그램을 선보였는데, 특히 음악 전문 디제이(DJ)들의 활약으로 음악방송이 인기를 얻었고, 청취자 참여형 프로그램도 활성화되었다.
2000년대에는 아날로그 방송에서 디지털 방송으로의 전환이 이뤄졌다. 특히 2010년대의 팟캐스트는 라디오의 재발견이라 할만한 인기였다. 팟캐스트는 인터넷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오디오 콘텐츠다. 기존 라디오의 한계를 넘어 다양한 주제와 형식의 콘텐츠를 제공하며 청취자들의 선택지를 넓혔다. 수용 방식에서도 에스엔에스(SNS)와 연동하여 청취자와 소통하고, 실시간으로 의견을 나누는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는 라디오가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매체로서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