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ra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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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국에서 발신하는 전파를 잡아 이것을 음성으로 복원하는 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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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방송국에서 발신하는 전파를 잡아 이것을 음성으로 복원하는 기계.
내용

본래는 넓은 의미에서의 무선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이것이 변천되어 근래에는 전파에 의한 음성방송과 이를 수신하는 기계, 즉 수신기를 가리키게 되었다.

1895년 이탈리아의 마르코니(Marconi,M.G.)가 무선통신기를 발명함으로써 라디오가 세상에 등장하게 되었다. 그 뒤 1906년에 미국인 드 포리스트(de Forest,L.)가 삼극진공관을 발명하게 된 것을 계기로 무선통신기술은 급진적으로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방송과 더불어 수신기의 보급이 늘어났고, 이로 인하여 진공관을 포함한 통신공업의 성장이 촉진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세계에서 처음으로 방송전파가 발사된 것은 1920년 1월 미국 워싱턴의 아나고스티아 해군비행장으로부터의 군악대 연주방송이었다. 이와 같은 새로운 문화사업은 아시아에도 곧 파급되어, 1925년 3월 22일에 일본의 동경방송국이 개국되었고, 이어 우리 나라에서도 1925년 11월 총독부 체신부 구내에 설치한 무선방송실험실에서 출력 50W로 최초의 무선실험방송이 실시되었다.

1926년 11월 31일에는 사단법인 경성방송국이 설립되어 이듬해인 1927년 2월 16일 출력 1㎾, 주파수 870kHz로 첫 라디오방송을 개시하였다. 초창기의 라디오방송은 단일 채널을 통한 한국·일본 양국어의 혼합단일방송으로 그나마 한국어와 일어방송 시간비율은 1:3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 뒤 시간비율은 몇 차례의 변화를 겪었다.

방송내용은 주로 일본어방송인 경제시황보도와 한국어방송의 물가시세·일기예보·공지사항 등이었다. 이 당시의 수신기보급상황을 보면, 우선 개국한 1주일 후인 1927년 2월 22일 현재 등록된 라디오수는 총 1,440대이고, 이 중 일본인이 1,165대, 우리 나라 사람이 275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1) 광복 이전의 상황

방송초창기부터 무선기기 제작공업 부문의 기술적 지식이 전무하였던 당시의 우리 나라로서는 라디오수신기의 제작이란 꿈도 꾸기 어려웠다.

이 무렵에는 고작 광석검파수신기가 제작되었을 뿐이지만 이 신비한 광석검파수신기조차 그다지 흔하지 않았다. 방송이 개시된 얼마 뒤에야 시중에 몇 대 퍼져서 수신기를 귀에 대고 혼자서 즐기곤 하였다.

특히 나팔(확성기)이 사용되는 수신기는 고급수신기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극히 드물었다. 당시 수신기는 감도조절이나 음량조절을 위하여 공중선선륜과 동조선륜을 원접(遠接)하여 이동하면서 적당한 감도점을 찾아내어야 하였는데, 황철검파기를 사용한 수신기는 감도점을 찾기가 불편해 잘 이용되지 않고 전지식 광석수신기가 감도의 양호성 때문에 많이 이용되었다.

또한, 전지식 진공관수신기는 외국제품으로서 나팔을 울릴 수 있어서 여러 사람들이 한 자리에서 들을 수 있었다. 이것은 여행용가방 정도의 크기(길이 60㎝, 높이 25㎝, 너비 30∼35㎝)이며 무게가 육중하였다.

그런데 당시 수신기의 소리를 내게 하기 위해서는 공중선결합장치동조·고주파동조조절회로·검파회로동조 등과 음량조정까지 합하여 최소한 4개 소는 만져야 하였으며, 이 중 1개소만 조정이 변동되어도 수신감도는 저하되는 등 그 조정이 매우 불편하였다. 또한, 이 때의 라디오수신기 한 대의 가격은 수십 원에서 수백 원까지 하여 당시 쌀 1가마 가격이 4원인 것과 비교해볼 때 매우 큰 액수였으며, 이 수신기를 유지하는 데 드는 전지소모량 또한 막대하여 일반대중용으로 보급되기는 도저히 불가능한 형편이었다.

여기에 한국어와 일본어인 양국어혼용 단일방송으로 인하여 처음부터 청취자들의 불만이 누적되어 수신기 보급은 극히 부진하였다. 1929년 말에 간신히 1만 대를 넘어섰고, 1932년말에는 고작 2만562대에 머물렀다. 따라서 경성방송국(JODK)은 유일한 재원인 청취료수입이 미미하여 심한 경영난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자 경성방송국은 수신기 보급을 위한 근본적인 타개책을 강구하게 되었고, 그 결과 이중방송실시(한국어방송과 일본어방송)와 전국 방송망 확충계획이 추진되었다.

이중방송실시 이후 방송시간도 1일 16시간으로 늘어났으며 수신기보급도 급격히 증가하였다. 1933년 말에 3만2000여 대에서 1936년에는 7만3000여 대, 또한 1937년 말에는 11만2000여 대를 기록하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 기술발전이 이루어짐에 따라 라디오수신기의 전원은 대형전지에서 가정용교류전원으로 대체되고, 1938년에는 전지식 진공관수신기는 그 형태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으며, 수신기도 가정의 장식물과 같은 구실을 할 정도로 외형이 변해갔다.

또한, 제2차세계대전중에는 진공관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고성능화·소형화되었다. 그리하여 수신기도 소형화되어 전쟁이 끝나자 다시 전지를 사용하는 휴대용라디오가 등장하게 되었다.

광복 당시 방송협회에서 판매보급하는 수신기로는 교류전용인 보급형 1호 수신기(3구, UY56, UX12A, KX12F)와 보급형 2호 및 3호 수신기가 있었다. 보급형 2호는 제1호에 UZ·57관을 하나 더 쓴 4구라디오로서 중거리용으로 쓰이는 것이고, 보급형 3호는 여기에 UZ·58관을 더 부가해서 제작한 것으로서 원거리용으로 보급되었다. 이 밖에도 방송협회의 보급형도 지정품도 아닌 여러 가지 수신기가 시판되기는 하였으나 그리 많지 않았으며 광복 당시 재고도 거의 없었다.

일제강점 말기에 이르러서는 ≪동아일보≫·≪조선일보≫ 양민족지의 강제폐간으로 인해 세상소식을 오직 방송에만 의존하였던 때이므로 역설적으로 수신기의 보급은 큰 증가를 보였다. 1945년 8월 15일 현재 38선 이남에 있는 우리 나라 사람이 소유한 수신기는 15만1817대였고, 이북에 있는 우리 나라 사람이 소유한 수신기는 모두 7만6168대로 우리 나라 사람이 가진 수신기는 22만7985대였다. 한편 방송국도 확대되어 1945년에는 전국에 방송국이 17개 소, 그리고 방송소가 3개 소에 이르렀다.

(2) 광복 이후의 상황

광복 당시의 경성중앙방송국은 국민생활에 직결되는 프로그램 편성에 힘을 기울였으나 그것을 뒷받침할만한 과학적 자료가 없었다. 더욱이 중앙방송국이 미군정청의 감독을 받게 되면서, 우리의 방송은 미국의 상업방송적인 유형을 그대로 도입하게 되었다. 한편,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에는 북한으로부터 전기 공급이 중단되어 전기사정이 극도로 악화되어 방송청취가 어려워졌을 뿐만 아니라, 지방방송국은 방송을 중단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이 무렵 수신기의 보수용 진공관·저항 및 콘덴서 등이 크게 부족했기 때문에 진공관 하나만 못 쓰게 되어도 수신기를 사용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수신기 진공관의 보급이 원활하지 못하자, 방송협회는 월간 5000개의 진공관을 재생할 수 있었던 재생공장에 역점을 두고 일본 와타(和田)진공관제작소와 기술제휴를 하여 재생공정을 그대로 도입하는 등 생산설비체제를 갖추는 데 힘썼다.

이어 조선전기산업주식회사와 범아전자공업주식회사가 설립되어 미군용건전지를 개조하여 라디오수신기에 맞도록 재조립하였으며, 라디오수신기 부품을 도입하여 수신기수리와 진공관재생을 하기도 하였다.

당시 라디오 보급현황을 보면, 1947년 8월에 집계된 수신기는 18만5700여 대로서, 서울과 경기지역에 68%, 주요 도시에 27% 등으로 지역적 편중성이 매우 심하였다. 이 중 진공관이 없어 사장된 라디오수신기도 약 5만 대로 추산되는데, 방송협회는 군정의 연합사령부를 통하여 약 2만 대를 보수할 수 있는 물자를 미국과 일본에서 조달하기도 하였다.

제2차세계대전 이전에는 안정도와 감도가 나쁜 스트레이트식(straight式)이 주로 사용되었으나, 세계대전중의 군사통신기술발전에 힘입어 1950년대부터는 안정도와 감도가 뛰어난 슈퍼헤테로다인식(Super·heterodyne式)으로 모든 수신기가 바뀌었다. 한편 정부수립 당시부터 해외교포·선교사 및 미군전용 PX 등을 통해서 각종 라디오수신기가 많이 유입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미국제품이었으며, 그 종류로는 대체로 직류전용·교류전용 및 교류직류 양용 라디오 등 세 가지 유형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 가운데 교류직류 양용 라디오가 전압이 낮고 정전이 심했던 당시에는 매우 인기가 있었다. 이어 중파용뿐만 아니라 단파대까지 2밴드용 라디오수신기가 많이 나돌게 되었다.

6·25전쟁 직전인 1950년 초부터는 신형진공관인 소형진공관을 쓴 수신기가 들어왔으며, 또한 중파와 FM을 겸한 라디오수신기도 서울의 해외공관 등에 모습을 나타냈다. 전쟁이 끝난 뒤에 라디오방송은 시설확장 및 방송망구축 등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가면서 발전기반을 다져나갔다. 또한, 이 때부터는 민간방송 및 상업방송이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1954년 12월에 민간방송인 기독교방송(CBS)이 출력 5㎾, 주파수 700kHz로 개국하였고, 1961년 12월에는 문화방송(MBC)이 5㎾, 900kHz로, 또 동아방송(DBS)이 1963년 4월에 10㎾, 1,230kHz(나중에 792kHz로 변경)로 개국하였다. 1964년 5월 20㎾, 1,380kHz로 개국한 라디오서울이 같은 해 6월에 주파수를 640kHz로 바꾸고, 1966년 동양방송(TBC)으로 개칭하였다.

FM방송은 서울 FM방송국이 1965년 6월 1㎾, 89. 1MHz로 개국한 것이 시초이며, 그 뒤 문화FM·한국FM 등의 민간FM방송도 개국되었다. 그리하여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라디오방송의 황금기를 맞게 되었다.

한편, 이와 더불어 국내에서도 1957년에 삼양전기, 1958년에 금성사가 최초의 라디오생산업체로 등장하여 수신기부품을 수입하여 라디오생산을 시작하였다. 이처럼 방송의 활성화와 국산품제조에 따른 수신기의 가격하락에 힘입어 1960년대 이후 수신기보급율은 급격히 증대하였다. 1959년에 겨우 30만 대를 넘어섰던 보유대수는 1960년에는 42만여 대로 늘었고, 1961년 9월에는 89만3000대, 1961년 말에는 100만 여대를 돌파하게 되었다.

이 무렵 금성사는 진공관식 수신기의 제작에 이어 트랜지스터라디오수신기 생산에 착수하였으며, 1962년에는 처음으로 라디오를 홍콩에 수출하기도 하였다. 한편, 5·16군사정변 이후 정부는 특정외래품의 판매금지조처를 단행하고 ‘농촌라디오보내기운동’ 등을 전개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국산품의 판로가 더욱 증대되었다. 게다가 1963년 이후에는 전해콘덴서·MP콘덴서·가변콘덴서·스피커 등의 부품이 국산화됨에 따라 국내의 라디오생산은 점차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1966년을 전후하여 이 수신기의 생산이 급격히 증가하여 심한 경쟁을 유발하기도 하였다. 원자재의 국산화비율은 수출용과 내수용을 합하여 1967년에는 27.5%였으나, 1968년도부터는 크게 개선되어 57.5%로 증가되었고, 1970년에는 70%로, 다시 1971년에는 90%를 초과할 정도로 급성장하였다. 한편, 1966년 동양방송의 FM방송을 계기로 해서 1966년 금성사는 일본의 히타치(日立)와 기술도입계약을 체결하고 1967년부터 FM수신기 생산에 착수하였다.

또한 196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진공관식은 자취를 감추고, 트랜지스터라디오만을 생산하게 되었다. 1973년에는 AM과 FM의 2밴드 및 시계가 부착된 탁상용 라디오수신기를 생산하여 1974년부터는 대량으로 수출하기 시작하였다. 1978년 세계 라디오수신기 시장에 대한 미국의 EIA(Electronics Industries Association) 추정은 22억6000달러인데, 우리 나라의 생산실적은 2.7%에 불과하였다.

선진국에서 수신기생산을 기술집약화하는 추세에 따라 우리 나라에서도 1980년대 초반에 FM 수신기를 IC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1982년부터 미국에서는 중파를 이용한 원거리 AM스테레오방송이 시작되어 서비스를 다양화하는 추세이므로, 우리 나라도 새로운 방송방식의 연구가 미래에 대비한다는 측면에서 신중하게 진행되고 있다.

정보화 사회로의 진입에 따라 폭발적으로 증가될 많은 정보처리의 일익을 담당할 수 있는 새로운 방송체제로 개편하게 되였다. 예를 들면 방송개념은 전파를 이용하는 일방적인 기존의 방식(broad cast) 외에 계약된 가입자를 대상으로 하는 협대역방송(narrow cast)이 병용 또는 병존하는 새로운 방송시스템이 성립된다고 볼 수 있다.

AM스테레오는 인접국간 보호가 훨씬 더 보장된 미국에서 중파를 이용하여 원거리까지 스테레오방송 서비스를 하는데 선두를 달리고 있으며, FCC는 방식을 통일시켜 표준방식을 선정하지 않고, 1982년에 제안된 모토로라(Motorola)방식·해리스(Harris)방식·카한(Kahn)방식·마그네박스(Magnavox)방식·벨러(Belar)방식을 모두 허가하여 방송사업자가 유리하다고 판단되는 방식을 택할 수 있도록 하였다.

AM 스테레오방식의 설계에서도 모노 수신기와 양립성 유지, 국제협약과의 조화, 복사 제한과 입접 채널과의 혼신 보호비, 스테레오 분리도 등의 4개 사항으로 된 최소한의 기술 기준만을 제시하였다. 최근에는 Motorola방식이 가장 많이 이용되고 있다.

1883년에는 국내 최초의 말하는 시계 라디오가 생산되었고, 1985년도에 들어와서는 AM방송을 좌우 채널로 분리해 스테레오 효과를 내는 기술을 시작하였다. 1990년대에는 라디오와 카세트의 일체형이 주종을 이루는 추세이다.

참고문헌

『전자공업이십년사』(한국전자공업진흥회, 1981)
『문화방송사』(문화방송주식회사, 1982)
『금성사이십오년사』(금성사, 1985)
『한국방송원론』(최창섭, 도서출판 나남, 1985)
『한국방송육십년사』(한국방송공사,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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