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

한국방송공사(KBS)
한국방송공사(KBS)
언론·방송
개념
라디오나 텔레비전을 통하여 보도 · 음악 · 강연 · 연예 등을 보내어 널리 보고 듣게 하는 통신기술.
내용 요약

방송은 라디오나 텔레비전을 통하여 보도·음악·강연·연예 등을 보내어 널리 보고 듣게 하는 통신기술이다. IT기술의 발달과 함께 현재는 데이터방송, 멀티미디어 방송도 포함한다. 라디오방송은 1921년 미국에서 첫 방송이 있었고 우리나라에서는 1926년에 경성방송국이 출범했다. 텔레비전방송은 1925년 런던에서 먼저 시작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1956년에 첫 방송이 있었다. 방송의 기능은 일반적으로 보도, 계도, 오락 및 광고로 나뉜다. 사회적 책임을 띤 사회기구라는 성격이 강했던 방송은 지금은 공익성의 추구라는 측면이 강조되고 있다.

정의
라디오나 텔레비전을 통하여 보도 · 음악 · 강연 · 연예 등을 보내어 널리 보고 듣게 하는 통신기술.
개관

이러한 사전전인 정의와 함께 2004년에 개편된 「방송법」 제2조 1항의 정의에 따르면, “방송이라 함은 방송프로그램을 기획·편성 또는 제작하여 이를 공중(개별계약에 의한 수신자를 포함하며, 이하 ‘시청자’라 한다)에게 전기통신설비에 의하여 송신하는 것”을 의미하며, 방송의 범주에 텔레비전방송·라디오방송·데이터방송·이동멀티미디어방송이 포함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어원 및 개념규정

방송은 영어로 ‘broadcast’, 한자로 ‘放送’으로 표시되는 것으로, 이는 ‘point to mass’, 즉 일정 장소에서 불특정 다수에게 전달하는 행위를 말한다.

또한 ‘broad(넓다)’와 ‘cast(던진다)’의 합성어로서 방송은 넓은 곳에 무언가를 던진다는 의미로서, 메시지를 대중에게 전달한다는 말과 상통한다.

‘방송’이라는 용어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조선시대 1728년(영조 4)으로 당시의 의미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방면하다, 석방하다’라는 뜻이었다.

일제시대 방송은 전화와 더불어 무선전화로 간주되어, <조선총독부령 48호>에 의거, 라디오방송을 전화통화로 분류하였다. 그러다 1960년대 이후 방송을 ‘무선통신의 송신행위’라고 명확히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무선통신이 방송의 하나의 특성이기는 하지만, 단순히 기존 방송의 확산을 위한 유선방송도 내용이 같을 때에는 역시 방송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1995년 3월 1일부로 종합유선방송이 실시되고 1997년 7월 1일에 위성방송의 시험방송이 실시된 상황에서 지금까지의 무선통신만을 방송으로 정의한 부분은 새롭게 변화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방송환경의 변화로 정부는 1995년 7월 14일에 ‘선진방송 5개년 계획(안)’을 발표하여 현행 <방송법>과 <종합유선방송법>을 폐지하고, 유·무선이 결합된 뉴미디어·멀티미디어 시대에 대비하는 <통합방송법>을 추진하고 있다.

새롭게 개정될 방송법에서는 기존의 무선전파를 이용한 공중파 방송뿐만 아니라 전송선로시설을 이용하는 종합유선방송, 인공위성의 무선국을 이용하는 위성방송 등을 방송으로 정의함으로써 기존 방송 개념인 전파 자원의 유한성의 의미가 사라지고 있다.

새로운 방송환경은 희소자원인 전파를 공익적 차원에서 배분하는 것이 아니라 첨단방송기술로 어떠한 환경하에서도 방송이 가능한 가장 넓은 시장의 방송으로 고려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제 방송은 전통적 개념인 ‘사회적 책임을 띤 사회기구’로서 자리한다기보다는 ‘한 사회에 존재하는 산업이 수행해야 할 일반적인 공익성의 개념’으로 그 의미가 변하고 있다.

유형 및 특성

이러한 대중매체의 한 형태인 방송은 여타의 매체와 구별되는 고유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첫째, 시간적인 제약을 갖고 있기 때문에 순간적이며 기록성이 없다. 그러나 기술의 발달로 이 특성은 점점 미약해지고 있다.

둘째, 동시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뉴스를 신속하게 전달할 수 있으며 보다 생생한 현실감을 보여줄 수 있다.

셋째, 방송은 구어체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문자의 해독과 무관하여 교육정도가 낮은 사람들도 접촉할 수 있으며, 영상적인 매체를 사용함으로써 보다 친근감을 주게 된다.

넷째, 그 기술적인 특성이나 경제적인 측면 때문에 보도기능보다 연예와 오락기능에 주안점을 두고 있으며, 다른 대중전달매체보다도 치열한 경쟁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 방송은 보도와 논평적 기능과 교양과 교육적 기능, 그리고 오락적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여타의 대중전달매체보다도 강력한 광고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이러한 방송의 유형은 그 분류기준에 따라 다양하게 나누어지는데, 크게 방송국의 재원에 따라 상업방송과 비상업방송으로 나누어진다. 전자는 광고수입에 의하여 운영되는 데 반하여, 후자는 국가나 기타 공공단체의 보조를 받는 것을 말한다.

또 그 소유형태에 따라 국영방송·공영방송·민영방송으로 나누어지기도 하고, 방송범위에 따라 해외방송과 국내방송으로 크게 나눌 수 있으며, 국내방송은 다시 전국방송과 지방방송으로 분류된다.

그 밖에도 전파의 종류에 따라 중파·중단파·단파·초단파 방송으로 나눌 수 있으며, AM방송과 FM방송 등 여러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기능]

방송의 기능은 일반적으로 보도적 기능, 계도적 기능, 오락적 기능 및 광고기능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보도적 기능은 사건에 관한 뉴스나 정보를 신속하게 전달하는 일을 말한다.

둘째, 계도적 기능은 논설적 기능이라고도 하는데, 방송국의 의견을 제시하여 이용자를 계도하는 작용을 말한다. 이는 방송의 공익성과 영향성을 고려하고, 공평의 원칙에 의거하여 실시되어야 하는 부분이다. 방송사설의 경우 방송국 자체의 의견임이 명시되어야 한다.

셋째, 오락적 기능은 이용자들에게 심미적 쾌감, 즉 즐거움이라는 정서적 반응을 일으켜서 심리적 만족감을 주는 것을 말한다. 일부에서는 일시적인 위안을 주기보다는 오락적 기능과 교육적 기능이 동시에 작용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방송의 내용이 순수한 오락적 기능에 목적을 둘 수도 있지만, 오락적 기능을 빙자해서 일부 사람들에게 퇴폐적 관능을 충족시키거나 현실도피적인 위안감을 주는 내용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넷째, 광고기능은 상업방송의 재정적 뒷받침이 되는 중요한 기능이다. 이용자에게 상품 및 시장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여 경제생활에 도움을 주고, 나아가서 국가 및 사회 경제를 촉진시키는 작용을 한다.

이 밖에도 학교교육의 보완수단으로서 방송이 국민들의 생활교육·평생교육을 담당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교육의 기능을 강조하기도 하고, 방송 매체를 통한 정치활동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선전의 기능을 주장하기도 한다.

방송이 그 역기능을 배제하는 가운데 보도에서 오락에 이르기까지 건전하고 폭넓은 정보를 제공하며 국민의 의식향상에 이바지하는 순기능을 다하기 위해서는 신중한 방송행정과 방송관계자의 책임 있는 자율성이 요구되는 한편, 비판력을 갖춘 현명한 이용자가 절실히 필요하다.

라디오 방송

1921년 11월 7일 미국에서 피츠버그의 ‘KDKA방송국’이 세계 최초로 정규방송의 허가를 얻어 방송한 지 약 5년 남짓 뒤에 우리나라에서도 1926년 11월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 호출부호 JODK)’이 발족하여 이듬해 2월 16일 첫 방송을 하였다. 주요 방송국을 각 시대별로 분류하여 살펴보면 [그림 1]과 같다.

초기방송기

시험방송기

우리나라에서 무선전화 통신시험이 처음 실시된 것은 1915년경이다. 조선총독부 체신국의 일본인 기술자에 의하여 그 당시 경성우체국 건물과 조선총독부 체신국 건물 사이의 800m 거리에서 무선전화 송신기시험이 실시되었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방송전파의 공중발사인 것이다.

그 뒤 1924년 2월에 조선총독부 체신국은 방송에 대한 조사 및 기술적 연구를 본격화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그 해 11월 초 체신국에 무선실험실을 설치하여 송신시험방송을 시작하였다. 1925년에 접어들어 조선총독부 체신국이 정기적인 시험방송을 하면서 방송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이 높아갔다.

이때의 방송내용은 뉴스·일기예보·강연·가극은 물론 방송극까지도 시도하였으며, 화·목·금·일요일에 걸쳐 매주 4회씩 실시하였다.

한편, 시험방송이 본격화되자 조선일보사는 라디오방송에 관심을 기울이고 1925년 4월 무선전화를 도입하여 공개시험방송을 실시하였다. 이 시험방송은 민간인에 의하여 실시되었다는 점과 한국인에게도 공개되었다는 사실이 특징이다.

이렇게 라디오 시험방송이 실시되면서 일반의 관심도 높아져 조선총독부 체신국에 방송사업 허가신청서를 제출한 민간단체만도 10여 개에 이르렀다.

그러나 일제의 방송정책은 신문의 경우보다도 통제가 더욱 심하여 식민정책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었고, 조선총독부 당국의 행정적 조치가 확대 적용되었다. 그리하여 방송사업 허가신청을 낸 개인이나 단체를 통합하여 한 개의 법인체를 구성하도록 하였다.

경성방송국 시기(1927~1933)

1926년 방송국 설치를 출원한 여러 단체의 대표들이 조선호텔에서 발기인총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에서 경성방송국 준비위원회를 열 것을 결의하였으나, 조선총독부 당국이 일본방송협회의 승낙을 이유로 허가하지 않아 답보상태에 놓였다.

조선총독부는 무허가시설 방송국의 설치를 염려한 나머지 <무선법>에 의한 단속령을 발표하였지만, 결국 1926년 11월 30일 소위 “반도 민중의 문화를 개발하여 복리를 증진시킨다.”는 명분 아래 사단법인 경성방송국 설치를 허가함으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방송기관이 탄생하게 되었다.

방송무선전화시설허가를 받은 경성방송국은 경성지방법원에 등기를 완료하고 마르코니 큐형(Marconi Q型) 6㎾의 방송기기를 발주하여 본격적인 방송개시준비를 서둘렀다.

그러나 준비상태가 여의치 않아 이듬해 1월 말부터 시험방송을 해오다 1927년 2월 16일 정식으로 개국하여 일정한 내용을 가진 방송을 송출하게 되었다. 호출부호는 JODK, 출력 1㎾, 주파수는 690㎑였으며, 그 위치는 서울 정동 1번지였다. 민족자력에 의한 출발은 아니었지만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방송기원으로 통용되고 있다.

개국 당시의 상황을 보면 한일양국어를 같은 채널에서 방송하는 혼합체제였으며, 방송비율도 1 대 3으로 일본어 위주였다. 이러한 현상은 점차 시정되어 나갔지만, 그 기본노선은 한국인을 위한 방송이었다기보다는 식민지정책의 효율적인 수행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따라서 운영을 담당한 경성방송국의 이사회도 일본인 중에서 이사장 한 명을 추천하여 조선총독부 체신국장의 승인을 받도록 하였다.

또한 이때의 방송은 사전검열제도에 따라 미리 체신국 검열과의 검열을 거쳐서 방송되었다. 특히 뉴스방송의 경우 사전에 그 제목까지도 통고하여야만 하였다. 이때 주로 방영된 프로그램은 국악과 방송극, 그리고 어린이 프로그램이었다.

그러나 6여 년에 걸쳐 실시된 이 방송은 유일한 재원인 청취료 수입이 미비하여 심한 경영난에 빠지게 되었다. 따라서, 경성방송국은 수신자 보급을 위한 타개책을 찾게 되었고, 그에 따라 세워진 것이 이중방송 실시와 전국방송망 확충계획이었다.

이중방송기(1933~1941)

이중방송 실시에 따라 종래의 정동방송국사(貞洞放送局舍)를 개축하여 이중방송용 음성조정반을 신설하고, 연희송신소(延禧送信所)와는 유선으로 연결하였다. 그리하여 1933년 4월 26일부터 이중방송을 실시하였다.

제2방송과의 탄생은 비록 그것이 일본정부의 간교한 정책의도에서 비롯된 것이기는 하나, 단조로운 방송프로그램에 하나의 혁신을 가져왔다. 방송시간은 1일 16시간으로 늘어났고 수신기의 보급도 급격히 늘어나 1937년 말에는 11만 1,000여 대를 기록하였다.

한편 이중방송의 실시로 지방방송망의 확충이 이루어졌다. 이른바 전조선방송망구성계획에 따라 1935년 9월 경성방송국을 ‘경성중앙방송국’이라고 명칭을 바꾸고, 1939년까지 부산·평양·청진·함흥·이리의 순서로 5개 국을 개국함으로써 제1기 전국방송망계획이 완성되었다.

다음 1939년 말부터 임시방송을 해온 대구방송국에 이중방송장치를 시공하는 것을 필두로 1942년 3월까지 제2기 방송망구성계획도 마무리지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국방송망이 실현되는 동안 총독부는 검열을 강화하여 철저한 언론통제를 가하였다. 특히,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검열은 더욱 강화되어 우리말 뉴스방송에서도 일본어 혼용을 강요하였으며, 일본어강좌가 정규로 편성되었다. 심지어는 일본의 고유음악까지 방송되어 명실상부한 일본의 방송으로 바뀌어 일제의 선전매체로 전락하였다.

암흑기(1941~1945)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터짐에 따라 일제는 라디오방송에 대한 통제를 더욱 철저히 하면서 전쟁수행목적에 최대한으로 이용하였다.

일제는 보도방송에 중점을 두고 전황을 빠뜨리지 않고 중계 속보하며, 또한 군관(軍官)과의 긴밀한 연계하에 정세의 변화에 부응하는 프로그램을 편성하였다.

즉, 일본정신의 앙양, 내선일체(內鮮一體)의 구현, 시국인식의 철저 등에 중점을 두고, 정치·경제·문화 등 전반에 걸친 각종 특수방송을 계획하고 교양과 연예프로그램도 일본군국주의를 고취하는 군가, 일제의 총력동원태세를 역설하는 강연, 속성일본어강좌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리하여 결국 제2방송으로서의 특색을 살릴 수 있는 프로그램은 모두 사라진 채 암흑기를 지나게 되었다.

국영방송기

미군정 때의 방송기(1945~1948)

1945년 8·15광복을 맞이하고 미군이 진주하면서 미군당국은 38도선 이남에 있던 10개의 방송국을 접수하였다. 1946년 3월에는 방송협회 산하에 있던 각 방송국이 국영화되는 첫 조치가 취해졌다.

즉, 각 방송국의 기술과 업무를 제외한 방송현업은 모두 미군정청 공보부로 이관됨으로써, 각 방송국들은 민간단체가 아닌 정부의 한 기관으로 개편되어 장차 국영방송이 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또한 이 시기를 통하여 일제시대의 방송제도를 개혁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방송을 국민생활과 직결시켜 그에 따른 프로그램편성에 노력하였으며, 미국의 상업방송적인 체제를 도입함으로써 새로운 방송문화를 펼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방송프로그램은 대부분 미국의 상업방송방식을 도입하면서부터 직접적인 계몽을 피하고 간접적인 방법을 택하였다. 그러면서 계몽과 교양에 중점을 두었다.

정부수립 후의 방송기(1948~1953)

1948년 6월 1일 미군정청 당국은 군정청의 공보부를 폐지시킴과 동시에 방송사업을 사단법인 대한방송협회로 다시 이관시켜 운영하도록 하였으나,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다시 정부기관으로 편입하게 되었다.

정부는 방송사업을 국영화하는 동시에 공보부를 공보처로 개편하고, 그 밑에 방송국을 독립된 국으로 두고 이름을 다시 ‘중앙방송국’으로 하였다.

그리고 지방방송국도 공보처 산하에 두고 ‘공보처 ○○방송국’으로 불렀다. 정부가 방송을 국영화한 법적 근거는 8월 7일 제헌국회가 제정한 <정부조직법>이었을 뿐, 방송사업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독립된 법률은 그때까지만 해도 마련되지 않고 있었다.

1948년에는 국제무선통신연맹(International Telecommunication Union, ITU)으로부터 한국의 고유 부호인 ‘HL’을 배당받게 되었고, 정부는 모든 방송의 호출부호를 바꾸어 11월 1일을 기하여 중앙방송국을 비롯한 전국방송이 ‘HL’부호를 쓰게 되었다. 1950년 6·25전쟁으로 말미암아 부산방송국과 대구방송국을 제외한 남한의 8개 방송국은 모두 불타버리고 말았다.

1953년 7월 휴전이 이루어지고 서울로 각 기관이 환도한 뒤 8월 15일을 기하여 중앙방송국을 서울지방방송국으로 개편하고, 공보처 안에 각 지방방송국을 총괄하는 방송관리국을 신설하였다.

그 뒤 정부기구가 개편되어도 방송관리국은 계속하여 국영방송인 중앙방송국(KBS)의 관리기구로서 그 기능을 이어 왔으며, 민영방송이 탄생한 뒤에는 모든 방송의 전반적인 관리와 지도역할을 하게 되었다.

국영·민영 이원방송기

6·25전쟁 이후부터 본격적인 상업방송이 출발하기 전까지의 이 시기는 라디오방송의 성숙기라고 볼 수 있는 시기였다.

KBS는 전란 이후 파손된 시설을 복구하고 내용상의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방송실의 확장과 출력강화 등 방송시설이 확충되고 재정상태도 호전되었으며, 새로운 방송운영제도를 실시하는 등 점점 그 위치를 정립시켜 나갔다. 또한 AP 및 UPI 등과 같은 유명통신사와 계약을 맺어 보도프로그램을 더욱 향상시켰다.

한편, 1954년 12월 우리나라 최초의 민영방송인 ‘기독교방송(CBS)’이 탄생함으로써 한국방송이 국영과 민영이 공존하는 절충적인 방송제도를 취하게 하는 커다란 전환점을 가져왔다.

기독교방송은 주파수 700㎑, 호출부호 HLKY, 출력 5㎾로 시작하였으며, 기독교적 교양을 육성하고 아울러 복음을 널리 선교하며 도의심을 향상시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였다.

뒤이어 1956년 12월 23일에 같은 종교방송인 ‘극동방송’이 호출부호 HLKX, 주파수 1230㎑, 출력 20㎾로 정식 개국함으로써 유일한 방송이던 KBS에 자극을 주게 되었고, 한국방송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켰다.

물론 이 두 방송은 기본적으로 특수방송의 성격을 띤 비상업적인 사설 종교라디오방송망에 속하기는 하였어도, 당시 정부의 홍보기관에 불과하였던 KBS시대에 국민들에게 선택의 폭을 넓혀 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으며, 나아가 상업방송 출현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1959년 4월 15일에는 부산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상업방송인 ‘부산문화방송’이 호출부호 HLKV, 출력 1㎾, 주파수 1035㎑로 하루 7시간의 방송을 시작하였다. 이는 곧 이어질 상업방송기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하며, 또한 상업방송의 실험적 무대이기도 한 것으로 방송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을 더욱 높여주었다.

상업방송기

부산문화방송이 보여준 상업방송의 성공가능성은 그 뒤 많은 상업방송의 출현을 낳았다. 서울에서 최초로 설립된 상업방송국인 ‘한국문화방송(MBC)’은 1961년 1월 28일 서울민간방송주식회사라는 이름으로 설립인가를 받고, 3월 31일 ‘한국방송주식회사’로 개칭하였다가 6월 1일 ‘한국문화방송주식회사’로 이름을 확정짓고, 12월 2일 호출부호 HLKV, 출력 10㎾, 주파수 900㎑로 서울에서는 최초의 민영방송으로 출하였다.

한편, ‘동아방송(DBS)’은 호출부호 HLKJ, 출력 10㎾, 주파수 1230㎑(1966년 12월 4일 790kHz로 변경)로 1963년 4월 25일 서울에서는 두 번째의 상업방송으로 출발하여 ‘동아일보’를 배후세력으로 보도방송에 많은 힘을 쏟았다.

또 하나의 상업방송인 ‘라디오서울(RSC)’(후에 ‘동양방송’으로 바뀜)은 1962년 12월 30일 호출부호 HLKZ, 주파수 1380kHz, 출력 10㎾로 인가를 받아 1964년 5월 9일 출발하게 되었다.

‘라디오서울’은 1965년 8월에 이름을 ‘중앙라디오’로 바꾸었다가 1966년 1월 31일 ‘중앙텔레비전’과 합병하면서 ‘주식회사중앙방송’으로 개칭하였고, 같은 해 8월 15일을 기하여 ‘동양방송(TBC)’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로써 서울에서는 국영중앙방송국을 비롯하여 기독교방송·문화방송·동아방송·동양방송 등의 라디오 5파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한편 FM방송도 탄생하여 1965년 6월 26일 서울에서 ‘서울FM방송’이 호출부호 HLCD, 주파수 89.1㎒, 출력 1㎾로 첫 전파를 발사하여 음악애호인들의 인기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서울FM방송은 운영난을 겪게 되어 1966년 4월 4일 운영권이 동양방송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서울FM방송을 인수한 동양방송은 1966년 8월 15일 이름을 ‘동양FM’으로 개칭하였으며, 1969년 12월 9일에는 호출부호를 HLKC로 바꾸고 그 이듬해 2월 1일에는 스테레오방송도 개시하였다. 1970년 4월 15일 부산에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의 FM방송이 부산문화방송에 의하여 탄생되었다. ‘부산문화FM’은 주파수 88.9㎒, 출력 1㎾로 하루 8시간을 방송하였으며, 1972년 3월 1일을 기하여 완전입체음방송을 개시하였다.

1971년에는 대구에 독자적인 FM방송이 또 하나 탄생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인 ‘한국FM방송’은 1971년 4월 25일에 호출부호 HLCB, 주파수 89.7MHz, 출력 1㎾로 출발하였다.

1971년 9월 19일에는 서울에 두 번째 FM방송이 태어났다. ‘한국문화방송FM’은 주파수 91.9㎒, 출력 1㎾로 하루 11시간(두 달 뒤부터는 18시간) 방송하면서 TBC·FM과 함께 서울에서 경쟁을 벌였다. 또한 KBS도 1979년부터 FM방송을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1960년대에 탄생한 상업방송이 발전기를 거쳐 1970년대에 그 전성기를 누려 외형적으로 볼 때 이 시기는 우리나라 방송의 최절정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초기에는 국민대중들과 더욱 밀착되어 순기능을 수행하는 듯하였으나, 점점 영리추구만을 내세워 공익성보다는 극도의 상업성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방송국간의 과다경쟁이 발생되고 그에 따라 흥미와 오락 일변도의 저급문화를 양산하게 되었다.

또한 신문과 방송을 비롯한 여러 대중매체들이 흡수, 병합되는 언론의 독점현상이 나타나 국민대중의 매체선택권을 위협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으며, 방송조직 자체의 이익과 존립을 위하여 정치권력에의 밀착현상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이 시기는 상업방송의 부정적인 타락성을 여지 없이 보여주었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으나, 한편 여러 방송국들이 서로 경쟁을 함으로써 방송프로그램의 편성과 제작 및 기술 등 방송의 전반적인 사항이 발전하였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공영방송기

[공영방송기]

한국방송협회와 신문협회는 1980년 11월 14일 임시총회를 열고 한국언론사상 혁명적인 조처를 내용으로 하는 언론기관통폐합 개편원칙을 채택하였다. 이 조치에 따라 동아방송과 동양방송이 12월 1일을 기하여 한국방송공사로 흡수, 통합되어 국내 라디오방송은 민영 MBC로 국영 KBS와 크게 이원화되었다.

이를 세분하여 보면 동아방송은 KBS에 통합되어 ‘KBS라디오서울’이라는 명칭으로 수도권 생활뉴스와 오락방송을 전담하게 되었다. TBC라디오는 KBS제3방송으로 재편되면서 사회교육과 교양방송을 전담하게 되었다.

보도기능까지 수행해 온 기독교방송은 복음방송만을 하게 되었고, 보도국 요원은 KBS에 흡수되었다. TBC방송망이며 별도법인인 전일(全日) 및 서해방송(西海放送)과 대구FM도 KBS에 흡수되었다.

MBC는 경향신문과 분리하여 별도 법인으로 운영되고 있는 21개의 MBC지방방송국의 주식 51%를 소유주로부터 양수하여 라디오의 지방망을 계열화시켰다.

결국, 민영방송으로는 기독교방송과 극동방송 및 아세아방송만이 남아 있으나, 이 라디오방송들은 복음방송만 전담하고 있으며, MBC는 그대로 독자적인 운영체제는 유지하나 실질적인 편성권은 대주주인 KBS가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언론계 통폐합의 부수적인 작업의 일환으로 방송의 공영화를 위하여 방송위원회·방송심의위원회·한국방송광고공사·언론중재위원회 등이 설립되었다.

한마디로 1980년대의 우리나라의 라디오방송은 충격과 당혹의 혁신적인 시대로 표현될 수 있다. 민영방송이 부분적으로나마 종말을 고하고 공영방송체제로 전환하게 된 이 시기는 앞으로의 노력과 성과 유무에 따라 그 결과가 평가되어질 것이다.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의 민주언론에 대한 요구로 인해 6·29선언에 언론의 자유가 언급되면서부터, 이후 1987년 11월 언론기본법이 폐지되고 대체법으로 <정기간행물의 등록에 관한 법률>과 <방송법>이 제정됨으로써 새로운 신문과 방송사의 설립 추진은 보다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방송사 설립이 구체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한 것은 익히 알려진 대로 1987년말 제 13대 대통령 선거 유세시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가 평화방송과 불교방송의 설립을 선거공약으로 내세우고 대통령에 당선되면서부터이다.

한국천주교가 설립한 평화방송(PBC)은 1990년 4월 15일 부활절에 개국하였다. 평화방송은 호출부호 HLQP, 주파수 105.3㎒, FM 방송으로서 하루 21시간씩 ‘평화’의 참뜻을 실현하는 종합방송으로 출발하였다.

불교방송은 1989년 7월 3일 체신부로부터 무선국 설립 가허가서를 발급받아 주파수를 101.9㎒로 확정했다. 약칭은 BBS, 호출부호는 HLSG, 출력 5kW, 방송형태는 FM 스테레오로 허가받았다. 불교방송은 1990년 3월 2일에 시험전파를 발사, 석가탄신일 전날인 5월 1일에 개국하였다.

1989년 6월 11일에는 교통·기상 전문 안내방송국인 교통방송국이 개국하였고, 1991년 3월 20일 새로운 민영방송인 서울방송(SBS)이 개국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1995년 12월 20일에는 장애인을 위한 ‘사랑의 소리 방송’이 전파를 타기 시작하였다.

현재 세계의 라디오 보급상황은 미국의 경우 인구 1,000명당 2,100여 대가 보급되어 있으며, 우리나라는 1,000명당 1,006대로 세계 6위를 기록하고 있다.

최근에는 방송환경의 변화로 미디어 자체가 세분화, 전문화되고 방송기술이 발달하면서 라디오만의 장점을 살린 매체가 등장하고 있다. 디지털 음성방송이나 FM 다중방송, AM 스테레오, 유선 라디오, PC 라디오 등의 다양한 신기술이 라디오 발전을 꾀하고 있다.

텔레비전 방송

1925년 버드(Baird, J.)가 런던에서 텔레비전을 공개 실험한 뒤 독일에서는 1935년부터, 영국에서는 1936년부터, 미국에서는 1939년부터 텔레비전의 정기방송을 시작하였다. 이에 비하여 우리나라는 20여년 뒤인 1956년에 최초로 텔레비전방송을 시작하였으므로 그 역사가 짧다.

그러나 1980년 12월 컬러방송이 시작됨에 따라 우리나라의 텔레비전방송도 구미 선진국들에 비하여 결코 뒤떨어지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의 우리 나라 텔레비전 역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초기방송기

우리나라 최초의 텔레비전방송은 HLKZ·TV에 의하여 1956년 5월 12일 실시되었다. 호출부호 HLKZ·TV, 출력 0.1㎾, 채널 9, 영상주파수 186∼192㎒로 하루 2시간씩(격일제) 보도·교양·오락 등의 방송을 실시하였다. “활동사진이 붙은 라디오가 나왔다.”는 것이 HLKZ·TV 실험방송 개시를 접한 시민의 첫 반응이었다.

그 당시 전국의 텔레비전 수상기는 300대 미만이었다. HLKZ·TV는 상업방송이었기 때문에 그 수입을 광고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으나, 당시의 상황으로는 상업텔레비전을 정상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여건이 전혀 갖추어지지 못하였기 때문에 주 12시간을 방송하기 위하여 많은 결손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HLKZ·TV는 적자운영을 감당해 내지 못하고 1957년 5월에 ‘한국일보’를 발행하던 장기영에게 양도되었다. 텔레비전 방송시설과 함께 적자요인까지 인수한 장기영은 일본 요미우리신문사(讀賣新聞社)가 니혼텔레비전(NTV)을 창설하여 텔레비전으로서의 기반을 굳혀가고 있는 데 힘입어 대한방송주식회사(DBC)로 개편하였다.

대한방송주식회사의 편성방향은 미국 상업텔레비전의 패턴에 충실한 종합편성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는 1957년 9월부터 시작된 주한미군방송(AFKN·TV)에 영향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수상기 가격의 하락에 따른 보급률의 상승, 그 동안의 제작경험 등에 힘입어 1958년에 접어들면서 대한방송주식회사는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다.

그리고 각종 프로그램을 종래의 라디오적인 것에서 탈피하여 대폭 변형을 강행하는 동시에, 선진 외국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체제와 대등한 각종 프로그램을 방송하게 되었다. 그러나 1959년 2월 화재로 그 시설이 전소되었고, 이후 주한미군방송의 도움으로 방송을 재개하였으나 1961년에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경제적인 여건 때문에 결국 단명에 끝났지만 이 HLKZ·TV는 우리 나라를 세계에서 15번째, 아시아에서 4번째로 텔레비전방송을 시작한 나라로 만들었다.

그리고 적자경영을 하면서도 비교적 조화된 일정 수준의 프로그램을 유지하여 상업방송의 가능성을 제시하였고, 많은 텔레비전 제작자를 양성하여 결과적으로 국영텔레비전을 단시일 내에 개국할 수 있게 하였다.

대텔레비전방송기

국영라디오방송인 KBS는 1961년 5·16군사정변과 함께 방송계의 황금시대를 이루는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즉 국제방송국이 탄생하고 텔레비전방송국이 개국한 것이었다.

KBS텔레비전은 1961년 12월 31일, 호출부호 HLCK, 국명 서울텔레비전방송국(KBS·TV), 채널 9, 영상출력 2㎾, 음향출력 0.5㎾로 역사적인 전파를 발사하였다.

KBS·TV는 처음에는 서울을 중심으로 한 경기 일원에서만 시청이 가능하였다. KBS·TV 개국 당시의 수상기는 약 8,000대에 불과하였으나 2만 대를 긴급 수입, 보급에 박차를 가하여 약 3만 대의 수상기로 출발하였다.

개국 당시의 방송시간은 하루 4시간 정도였으나, 약 3개월간의 시험기를 거쳐 어느 정도 정상화된 다음에는 방송시간도 한 시간 늘리고 프로그램제작도 차차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1962년에 접어들면서 KBS는 민간방송의 개화(開花)와 함께 본격적인 텔레비전시대를 촉진하는 일련의 조처와 이에 대비한 라디오방송의 병행적 발전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같은 해 12월 3일 정부는 <국영텔레비전 방송사업운영에 관한 임시조치법>과 <특별회사법>을 제정하고 1963년 1월부터 KBS의 광고방송 실시와 시청료 징수를 단행하였다. 이로써 텔레비전방송이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고 방송시간도 하루 6시간 정도로 다양하여졌다.

이어 1966년에는 KBS·TV가 전국적인 방송망을 수립하였다. 한편 1964년 12월 7일과 8일에는 각각 ‘동양텔레비전방송주식회사(TBC·TV)’가 서울과 부산에서 최초의 민영텔레비전방송국을 개국시켰다. 서울은 호출부호 HLCE, 영상출력 2㎾로, 부산은 HLKE, 출력 500W로 출발하였다.

그 뒤 1969년 8월 8일에는 ‘한국문화방송주식회사(MBC·TV)’가 텔레비전방송국 3국 중 맨 마지막으로 텔레비전국을 설립하여 개국하였다. 호출부호 HLAC, 채널 11, 영상출력 2㎾, 음향출력 500W로 MBC·TV가 방송을 실시함으로써, 우리나라는 KBS·MBC·TBC의 3대텔레비전방송망의 시대로 돌입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모든 언론이 정부의 강력한 통제로 인하여 빈사상태에 빠지게 된 1970년대의 유신시대(維新時代)에도 텔레비전방송만은 고도의 경제발전이라는 배경에 힘입어 많은 광고수익을 올리면서 호황을 누려왔다.

한편 1970년 6월 금산위성통신지구국(錦山衛星通信地球局)의 준공으로 우리나라 텔레비전도 본격적인 우주중계시대로 돌입하였다. 텔레비전 채널 또한 셋으로 늘어, 시청자는 채널 선택권을 갖고 자신의 마음에 드는 프로그램을 시청하게 되었다.

1969년 11월부터는 아침방송을 시작하고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하는가 하면, 1970년 10월에 이르러서는 세 방송국 모두 하루 3편의 일일연속극을 방영하는 등 프로그램개편이 잦았고 방송국간의 경쟁이 치열해졌다.

이 시기는 우리나라의 텔레비전방송이 외형상으로 볼 때 그 절정에 달하였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비록 프로그램 내용이 저속하였고 지나친 경쟁으로 인하여 올바른 텔레비전문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텔레비전 3방송국이 자유스러운 경쟁을 하였다는 사실은 우리나라 텔레비전 사상 최초의 일이라 할 수 있다.

한편 1970년 1월에 비상국무회의에서 <한국방송공사법>을 확정함으로써 새로운 방송제도의 탄생을 보게 되었다. 이 공사법은 1972년 말에 공포되고, 1973년 3월에 방송공사가 정식으로 발족되었다.

따라서, 그간 국영체제를 지속해 오던 KBS는 공영방송으로 그 모습이 변모하게 되었다. 그 동안 상업주의 일변도였던 우리나라의 텔레비전방송은 1980년 11월 언론통폐합조치로 말미암아 공영방송체제로 접어들었다.

공영방송기

1980년대의 방송은 방송제도의 새로운 장을 연 공·민영 일원화의 채택과 함께 텔레비전 컬러화로 특징지어진다.

1980년 12월 1일부터 KBS·TV가 컬러시험방송을 시작한다는 정부발표가 있은 지 1주일도 안 되어 신문과 방송의 전면적 통폐합원칙이 발표되었다.

또한 <언론기본법>의 제정과 실시, 교육과 교양전담 텔레비전(UHF·TV)의 실시, 쇼·드라마의 대형화, 뉴스쇼 등 보도프로그램의 활성화에 따른 텔레비전·신문·잡지계의 정착화, 그리고 KBS·TV의 블록광고방송 실시 등 1980년 봄에서 1981년 봄에 이르는 1년 사이에 한국방송계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거의 600만 대라는 텔레비전 수상기 보급현황을 배경으로 1980년도에 접어든 한국텔레비전방송은 상반기에 있었던 자율화 물결과 함께 사회·정치·경제 분야에 걸친 방송매체의 활용이 좌담·대담·대화의 형태로 나타났으며, 그 대표적인 예가 텔레비전 개헌공청회(改憲公聽會)라 할 수 있다. 심지어는 반상회까지 텔레비전을 이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980년도 방송가에 있어서 가장 획기적인 사건은 역시 방송통폐합조치이다. 이 조치에 따라 모든 민영방송은 법규상 제도적인 면에서 공영체제로 변모되었고 혁신적인 변화를 겪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동양텔레비전이 1980년 12월 1일을 기하여 KBS에 흡수, 통합되어 KBS제2텔레비전으로 개편되어, 주로 성인 대상의 교육과 교양방송을 실시하였다.

기존의 KBS텔레비전은 KBS제1텔레비전이 되어 전국방송망 기간방송으로서 기능을 담당하였다. 또한, 신설된 KBS제3텔레비전은 평생교육을 위한 일반교육과 교양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텔레비전방송은 국영 KBS텔레비전과 민영 문화방송텔레비전으로 이원화되었다.

그러나 문화방송 전체 주식의 70%를 KBS가 인수함으로써 실질적인 편성권은 KBS가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텔레비전방송의 지나친 상업주의 경향을 견제하는 장치로서 방송광고공사가 설립되었으며, 공영방송인 KBS가 상업광고방송을 실시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변화는 1980년대 한국방송의 진로를 예시하여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공영방송체제 정착을 위하여 이 같은 변화들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조화, 운행하느냐 하는 것이 앞으로 우리나라 텔레비전방송의 과제라 하겠다.

1990년 방송법의 개편과정에서 상업방송을 허용함에 따라 1991년 12월 7일 서울방송(SBS)이 개국되었다. 1991년 있었던 방송구조의 개편은 민영방송의 등장으로 시작되었는데, 이전까지의 공영, 반공영, 반민영 형태의 모호한 방송구조에서 공민영 혼합제도와 신규 민영 텔레비전·라디오의 허용, 교육방송의 독립, 종합유선방송의 도입으로 골격을 갖추었다.

이때 SBS가 등장하였고 KBS·TV는 2개 채널, 라디오는 교육방송으로 독립하였다. 한편 교육방송이 당시의 문교부 관할로 들어가 EBS라는 명칭으로 1990년 12월 27일 개국하였다.

텔레비전은 1990년대 들어 민영방송과 함께, 케이블 TV, 위성방송으로 더욱 확대되었다. 1995년 3월 1일 27개의 채널로 케이블 TV가 시작되었고 1995년 5월 14일에는 광주방송(KBC), 대구방송(TBC), 대전방송(TJB), 부산방송(PSB)의 4개 지역 민영방송이 개국하였으며, 1997년 10월 11일에는 인천방송이 개국하였다. 위성방송은 1995년 8월과 1996년 1월의 무궁화 1, 2호기 발사로 1996년 7월에 KBS에서 첫 시험방송을 시작하였다.

우리나라의 텔레비전은 시작은 서구에 비해 늦었으나 발전속도는 매우 빠르며 앞으로 더욱 발전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세계의 텔레비전 기술은 디지털 기술을 이용한 디지털 텔레비전이나 상호작용 텔레비전과 같은 최첨단 텔레비전이 등장하고 있으며 디지털화를 가속화하고 있다.

방송기술

일반적으로 방송기술이라 함은 방송용 프로그램의 제작·운용·송신·수신 등에 관련된 광범위한 기술을 총체적으로 의미한다. 이러한 방송기술에 대한 개발은 지속적으로 계속되어 왔지만, 특히 정보사회의 도래와 함께 새로운 매체의 기술개발에 대한 요구가 더욱 증대되고 있는 실정이다.

역사

방송의 기술적인 발달은 전기학의 발달로 이루어졌다. 산업혁명을 촉진시킨 증기동력은 철도와 증기선을 낳아 운수의 속도를 현저하게 높였는데, 이 운수의 신속화가 통신의 신속화를 낳게 된 것이다.

방송과 관련된 기술적인 발명 중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일은 1888년 헤르츠(Hertz,H.)의 전파 발견, 1895년 마르코니(Marconi,G.)에 의한 무선전신의 발명, 1906년의 드 포리스트(de Forest,L.)의 3극진공관 발명 등이다. 이들은 오늘의 방송을 있게 한 가장 큰 업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중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진공관의 발명이었다. 무선전신의 발전과 함께 무선전화의 개발은 진공관에 의한 지속전파(持續電波)와 고조장치(高調裝置)의 발전에 따라 라디오방송의 출현을 촉진하게 한 것이다.

한편 텔레비전의 기술적 발달과정을 간단하게 살펴보면, 최초로 나타난 가능성은 1839년 은판사진술(銀板寫眞術)의 발명에서 비롯되었다. 그 뒤 정사진(靜寫眞)을 환등기에 비쳐 보임으로써 그림은 연속적 환상으로 나타나는 것을 알아냈다.

1873년 영국인 메이(May)가 세레늄금속에다 광선을 보냄으로써 전기를 발생시키는 원리를 발견하였는데, 이것은 텔레비전을 발명해 내는 데 기술적 기초를 이루었다.

이 원리를 토대로 1880년 프랑스인 르플랑(Le Plean)이 주사선(走査線)의 원리를 발명하였고, 1884년에는 러시아 출신 독일과학자 니프코브(Nipkow,P.)에 의하여 니프코브원판이 발명되었다.

여기에 이탈리아의 마르코니가 무선전신을, 독일의 브라운(Brown)이 브라운관을, 드 포리스트가 3극진공관을 발명함으로써 텔레비전의 발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36년 11월 2일 영국방송협회가 정식으로 텔레비전방송을 개시한 이래 약 반세기가 지났는데, 그 동안 전자기술을 바탕으로 한 방송매체의 발달은 눈부시다.

방송위성은 통신위성이 한 단계 발전하여 직접방송을 가능하게 하였는데, 대개 정지궤도상의 방송위성이 지구국으로부터 온 전파를 받아서 증폭시켜 불특정 다수의 수신자에게 보내는 중계시스템을 말한다.

그리고 케이블텔레비전(CATV)은 텔레비전방송을 무선으로 보내지 않고 유선으로 보내는 방식으로 처음에는 난시청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공동 안테나시스템으로 시작되었으나, 지금은 기존 텔레비전의 재전송에 그치지 않고 자체제작프로그램과 중계프로그램, 지역의 공지사항, 기타 필요한 정보 등을 여러 채널로 제공하면서 지역정보통신망 형태로 발전하고 있다.

또한 텔레비전 전파의 미사용 부분을 이용하여 일반 텔레비전방송과 동시에 문자나 도형으로 된 프로그램을 보내는 문자다중방송이 있다.

이 밖에도 텔레비전 수상기에 있어서 색상이나 화면의 선명도가 월등한 디지털텔레비전이나 고품위텔레비전과 평면텔레비전이 곧 실용화될 전망이다.

우리나라는 1927년 2월 16일에 사단법인 경성방송국에서 “여기는 경성방송국입니다. JODK.”로 첫 방송을 내보내며 출력 1㎾로 정규방송을 개시하였는데, 송신기는 영국제 말코니 큐형(Q型)에 주파수는 690㎑였다.

이렇게 출발한 라디오방송의 출력변화를 살펴보면 1927년에 1㎾로 시작하여 1933년에는 10㎾로 증강되었고, 1937년에 획기적으로 50㎾까지 증강되었다. 그 뒤 1955년에 100㎾의 출력증강에 이어 250㎾, 500㎾로 계속 증강되어 오다가 1978년을 고비로 1500㎾까지 상승하게 되었다.

송신기의 변조방식은 스크린변조, 도헤티증폭방식과 앰플리페이스변조방식으로 변하였고, 1970년도 이후에는 PDM변조방식을 채택한 에너지절약형 송신기가 등장하게 되었다. 1980년도 이후에는 고효율의 송신기인 폴리페이스피디엠변조방식이 개발되어 이미 국내에 도입되어 있다.

1965년 6월 25일 개국한 서울FM방송을 시초로 출발한 FM방송의 기술적인 변화를 살펴보면, 초기의 FM송신기는 진공관식 세라소이드변조방식에서 리엑턴스변조방식으로 바뀌었고, 최근에는 APC회로가 부가된 베리캡리엑턴스변조회로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FM스테레오는 처음에는 38㎑의 스위칭 방식에서 114㎑의 스위칭 방식으로 개발되었고, 최근에는 12비트의 스위칭시스템으로 개량되어서 현재 사용중에 있다.

텔레비전에 있어서는 1956년 5월 12일 최초의 텔레비전방송인 HLKZ·TV가 개국할 당시 전국의 텔레비전 수상기는 300대 미만이었고 그 방송기술도 낙후되어 있었다.

그 뒤 1961년 12월 31일에 중앙방송국(KBS)이 출력 2㎾의 RCA텔레비전송신기로 서울 남산에서 전파를 발사하게 되고, 이어서 동양방송과 문화방송 텔레비전방송국이 개국함에 따라 본격적인 텔레비전방송시대로 돌입하게 되었고, 그 방송기술도 점차 개선되어 나갔다.

또한, 1970년대 말에 컬러방송문제가 제기되었고, 그 방식에 논란이 있었으나 결국 흑백시청도 가능한 미국식의 NTSC(National Television Standard Committee)방식에 따른 컬러방영이 실시됨에 따라 새로운 시설·기재·제작기법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의 개발이 진행되었다.

현황과 전망

1980년대 공영방송체제로 개편된 이후 KBS와 MBC가 가장 중점을 두어온 것 중의 하나가 난시청지역 해소를 위한 방송망확장사업이다.

방송공영화 이전에는 정부가 민간방송의 시청취지역 확대를 오랫동안 동결시켜 왔기 때문에 MBC의 가청취권은 국토의 43%, 인구의 60%에 그치고 있었으며, 강원도와 충청북도지역은 전역이 MBC의 시청취불가능지역이었다.

기존 시청취가능지역도 출력이 약하여 컬러방송의 수신상태가 불량한 실정이었으나 이제는 점차 해소되어 가고 있다. KBS는 방송시설 가운데 중파 및 단파방송의 확장에 역점을 둔 제1차 난시청지역해소사업을 착실히 수행, 산간오지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중파방송 난시청지역을 거의 해소하였다.

기술개발면에서도 음성다중방송, 방송위성의 이용, 고품위텔레비전 개발, 케이블텔레비전 개발, 중파방송의 스테레오화 및 문자다중방송의 개발 등에 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또한 종래의 필름카메라에서 오는 불편을 없애고 취재와 프로그램제작에 간편하고 신속하게 활용할 수 있는 ENG(Electronic News Gathering)시스템 사용으로 뉴스의 기동성에 혁신을 가져왔는데, 카메라는 이제 뉴스뿐만 아니라 쇼프로그램·스포츠중계 등 다목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1980년도부터 가장 많이 변하고 있는 분야는 비디오효과 분야이다. 스퀴즈줌(squeezum)효과에서부터 데이터와 비디오회전이 가능한 영국 콴텔회사의 DPB5000과 네크회사의 E·Flex장비가 도입, 활용되고 있고, 최근에는 그래픽전용의 오로라페인트박스·ADO 등을 방송국뿐만 아니라 비디오제작회사까지 도입, 활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비디오파일(video file)은 이미 활용되고 있으며, 또 비디오효과장비의 걸작품인 미라지(Mirage)까지 도입되었고, 3차원그래픽장비의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이 밖에 스퀴즈줌·크로마키 등 디지털영상기의 확보로 다양한 텔레비전화면을 구성할 수 있게 되었으며, 방송위성을 통한 세계동시다원방송이 가능하게 되었다.

KBS는 태양전지용 간이텔레비전중계기 연구, 방송음질 개선을 위한 PCM(Pulse Code Modulation) 음성송수신장비 연구, 국산안테나 개발 등에 노력하고 있으며, MBC는 텔레비전방송 송출자동화로 컴퓨터를 이용한 소프트웨어를 개발중에 있으며, 텔레비전음성다중방식으로 기존 NTSC식에 이중반송파송출방식을 개발, 1983년 9월 9일부터 시험방송에 들어간 바 있다.

그리고 앞으로 분배기술에 있어서도 과거의 방송이 송신자가 선택한 프로그램을 일정한 시간에 송출하였으므로 시청자의 선택의 여지가 제한되었으나, 케이블텔레비전의 등장으로 이러한 선택의 폭이 넓어질 것이며, 이것은 쌍방적인 비디오텍스로 영상과 정보를 수용자의 선택으로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매체는 기존 커뮤니케이션시스템의 단점과 미비점을 보완하고, 고도로 분화된 사회조직간의 밀접한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전체 사회 및 문화구조의 근본을 변화시킬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매체가 이와 같이 쌍방적 커뮤니케이션의 활성화와 수용자 참여의 증가뿐만 아니라 대상의 전문화, 수용자의 능동적 정보선택을 가능하게 하고 시간과 거리의 단축 등과 같은 기능적인 면도 있으나, 개인 사생활의 파괴와 문화적 지체현상, 기대감 상승혁명 등으로 인한 사회해체의 역기능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현황

방송계 뉴미디어의 눈부신 발달과 방송과 통신의 융합현상의 가속화, 수백 개의 채널을 가진 디지털 방송위성의 발사로 전개될 위성방송 경쟁의 가열, 21세기의 세계정보질서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정보하부구조 구축을 둘러싼 정보기술 선진국 사이의 치열한 경쟁, 방송 프로그램 시장의 개방 압력 등 방송환경은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1996년 현재 우리나라의 무선통신의 송신을 이용하는 방송매체 현황은 아래의 표와 같다. 무선통신의 송신 외에 전송선로시설을 이용하는 케이블 TV는 국립영상제작소(KTV)를 비롯해 29개의 채널에서 방송을 실시하고 있고, 인공위성의 무선국을 이용하는 위성 TV는 새로운 방송법 개정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아 KBS에서 2개 채널, EBS에서 2개 채널만을 이용하고 있다.

1980년대 공영방송 체제에서 공민영체제로 변화한 공중파 방송은 앞으로 더욱 내실화를 모색해야 하는 시기로, 그에 대한 몇 가지 대응자세를 찾아본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진정한 공익성을 띤 대중매체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를 보는 일정한 안목과 철학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 외래문화의 수용이나 전통문화의 계승에서 우리의 동일성 문화를 주체성 있게 절충하는 지혜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방송대책이 수립되어야 한다.

셋째, 방송인의 창조성·융통성·전문성·생동력을 고양시킬 제도 내지 여건 조성이 절실히 요구된다.

넷째, 방송의 오락성과 교육성이 서로 이율배반적이거나 마찰적인 양극개념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차원에서 재정립되어야 한다.

다섯째, 제작비 및 인재양성과 관련해 재투자의 질적인 제도화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여섯째, 자율성에 입각한 편성과 제작을 구현할 수 있도록 각 부서간의 자율적 독립권과 부문별 전문성의 상호인정을 위한 제도적 보완책이 강구되어야 한다.

일곱째, 방송의 과학화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특히 방송관계 조사연구 작업의 제도적인 뒷받침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몇 가지 질적·제도적인 기본 토대가 마련된 뒤 양적·기술적 노력이 경주될 때, 비로소 미래의 정보사회를 주도해 나갈 수 있는 진정한 방송의 역할과 책임을 다하게 될 것이다.

2000년에 들어선 현재, 방송기술의 발전으로 이제까지 고수되어 왔던 방송영역과 통신영역의 구분은 모호해져 가고 있다. 즉, 방송과 통신은 앞으로 더 이상 별개의 영역으로 구분될 수 없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방송영역은 사회의 공적 성격에 의하여 규제와 통제의 대상이 되어 왔던 반면, 통신영역은 수용자 주도의 자유로운 의사소통 수단으로 존재하여 왔다. 그러나 새로이 등장하는 뉴미디어들은 방송과 통신영역 중간에 다양하게 위치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미래의 방송은 통신산업이 갖고 있었던 경제적 측면과 방송의 사회적 측면 두 가지 성격을 동시에 지니게 될 것이다. 따라서 주로 사회·문화적 측면에서 이루어져 왔던 기존의 방송정책은 방송의 산업적 측면을 고려하는 방향으로 변화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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