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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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까치구멍집 후면
안동 까치구멍집 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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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
볏짚 · 갈대 · 왕골 · 띠 · 풀 등을 재료로 이엉을 만들거나 그 재료를 그대로 이어 지붕을 만든 건축물.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초가는 볏짚·갈대·왕골·띠·풀 등을 재료로 이엉을 만들거나 그 재료를 그대로 이어 지붕을 만든 건축물이다. 초가지붕의 기원은 주거 양식이 형성되면서부터이다. 초가라는 말은 기와집에 대한 상대적인 말이다. 우리나라 초가는 대부분 볏짚을 재료로 하고 있지만 새를 사용한 샛집도 있다. 샛집은 울릉도와 육지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지붕에 새를 이는 것은 1, 2년에 한 번씩 한다. 초가지붕의 형태가 똬리처럼 둥근 모양을 이루는 똬리집이 있다. 또 채광이나 환기를 위해 지붕에 까치가 드나들 만한 구멍을 낸 까치구멍집이 있다.

목차
정의
볏짚 · 갈대 · 왕골 · 띠 · 풀 등을 재료로 이엉을 만들거나 그 재료를 그대로 이어 지붕을 만든 건축물.
내용

초가라는 말은 원칙적으로 기와집에 대한 상대적인 말로서 우리 나라의 초가는 대부분 볏짚을 사용하고 있다.

초가지붕의 기원은 주거 양식이 형성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수혈주거나 움집 등의 구조에서는 중앙부가 높은 몽고 지방의 주택 양식과 흡사하였으리라 믿어지나, 차츰 우리 나라 고유 형태의 초가지붕으로 변화하였으리라 추측된다. 즉, 초기에는 벽이 없이 땅을 웅덩이 같이 파고 그 위에 단순하게 지붕을 씌운 것이었다.

그 뒤 중앙부에 기둥이 서면서 서까래가 만들어지고, 다시 집의 내부 바닥이 지면까지 올라오면서 기둥이 네 모서리에 세워지고 담과 지붕이 분리되는 발전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 때부터 처마가 그 형태를 갖추어 요즘과 같은 기능을 가지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초가의 역사는 기록이 미약하여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벼농사가 시작된 삼국시대에 이미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사기』『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가락국김수로왕이 세웠던 가궁(假宮)은 토계(土階) 위에 세우고 초가지붕을 이은 것이며 초가지붕의 끝을 가지런히 자르지 않은 소박한 형상이었다.

중국의 기록인 『구당서 舊唐書』 열전에는 고구려에 대하여 “고구려인들은 살림집을 반드시 산곡에 짓는데 대부분 이엉을 이어 지붕을 만든다. 다만 부처님을 모신 절이나 신묘 · 왕궁 · 관부(官府)의 집들은 기와를 얹었다. 가난한 백성들의 습속으로 겨울에는 모두들 장갱(長坑)을 설치하고 불을 지펴 따뜻하게 난방한다.”고 기록하였다.

또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서라벌에 부자들이 살아서 초가가 한 채도 없다고 기록한 것과, 고려의 도성에 초가를 모두 없앴다고 한 것은 초가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반증한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의 국력이 한창이던 헌강왕 때 왕이 월상루(月上樓)에 올라 내려다보면 초가를 한 채도 조망할 수 없었다 한다.

그래서 재상에게 그게 사실인지 알아보라고 했는데, 서라벌 안에 초가가 한 채도 없다고 보고하였다고 한다. 고려 · 조선조에는 도성내의 모든 집을 기와로 이도록 노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도성내에는 기와집이 많았으나, 조선 초기에는 도성내의 큰 화재 때문에 3분의 1 이상의 집이 불타는 등 경제적인 여건이 좋지 못하였다.

특히 임진왜란 ·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경제적인 사정이 극도로 나빠져 도성 내에 초가들이 상당히 들어섰다. 초가가 존재하게 된 이유 중 또 하나는 토호(土豪)나 사대부들이 계급구조적 마을을 이루고 사는 데 있다. 즉, 대부분의 마을은 큰 기와집을 중심으로 소규모 초가들이 자리잡고 있는 형태이다.

큰 기와집에는 사대부 · 토호들이 살며, 초가에는 그에 딸린 마름이나 노비들이 살았다. 경주시의 양동마을이나 안동의 하회마을 등에서 그와 같은 것들이 목격되고 있다. 그러나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선비들은 초라한 초가에 살기도 하였다.

초가지붕의 종류는 지붕의 재료 · 형태에 따라 분류하여 설명할 수 있다. 지붕의 재료에 따른 분류는 순수 초가와 샛집으로 구분되는데 순수 초가는 볏짚으로 이엉을 엮어 지붕을 한 것이고, 샛집은 새〔茅〕로 이어 지붕을 만든 것이다. 지붕에 새를 이는 것은 1, 2년에 한번씩이다.

제주도에서는 나래를 엮지 않고 새를 펴서 그 위에 새줄로 그물같이 얽어매어 바람에 날리지 않게 하고 있다. 샛집은 울릉도와 육지에도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형태에 따른 분류는 지역에 따라 이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으로, 제주도의 경우 이엉이 태풍에 날아가지 않도록 새끼줄이나 그물로 덮어 지붕 위는 새끼줄의 격자무늬가 생기게 된다.

전라남도장흥 · 강진 · 보성 등지의 초가지붕 위에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유지기’라는 것이 있다. 이들 지역에서는 초가지붕의 용마루에 굵은 통대나무나 통나무를 가로지르고 이 위에 용구새를 덮고, 나무와 나무의 이음새나 좌우 양측에 볏짚 한단 가량을 단단히 묶어맨다. 또 수냉이 쪽을 낫으로 잘라서 가지런히 한 다음, 이것을 거꾸로 용마루에 잡아매어서 마치 상투를 틀어올린 모양을 이룬다. 유지기는 한 지붕에 하나만 올리는데, 두 세 개를 올린 집도 있으며 보통 一자지붕에만 쓰인다.

또한 똬리집이란 형태가 있다. 이것은 지붕의 형태가 또아리처럼 둥근 모양을 이룬 데에서 온 것으로 황해도경기도 서북지역에 많이 분포한다. 집의 벽은 완전히 붙어 있으며 안마당에서 본 하늘은 둥글고 매우 좁다.

초가지붕집에는 까치구멍집이 있는데 지붕은 대체로 모임지붕의 형태를 이룬다. 그러나 겹집인 경우 까치구멍이라 하여 용마루를 짧게 하고 좌우 양끝의 짚을 안으로 구겨 넣어서 까치가 드나들만한 구멍을 내어두는 것이다. 이 구멍으로 집안에 햇볕이 들고 연기가 빠져나가기도 하는 것이다. 그 밖에 오막살이도 담을 자연석으로 쌓아 지은 집으로 초가이며, 토담집 역시 담을 흙으로 쌓아 만든 초가집이다.

초가의 지붕은 다양한 유형을 지녀왔다. 이것은 뒷날 기와지붕의 형태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지붕의 구성이 가구(架構)공포에 직접 관련되므로 초가지붕의 발달과 완성은 기와지붕을 낳게 한 모태였다. 초기의 초가지붕은 지붕과 벽체의 구분이 없었으며, 뒤의 어느 시기에 벽체와 지붕이 나누어져 구조되었다.

이 때 비로소 처마가 생긴 것인데, 지붕의 형태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지붕과 벽체가 함께 만들어지던 시기의 지붕의 형태는 원추형(圓錐形)이거나 산개형(傘蓋形) 또는 탄두형(彈頭形)이었으며, 평면형도 타원형이었으리라 추측된다.

초가지붕의 외형이나 윤곽은 그것을 구조하는 사람들의 심성에 따라 형상화된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자연 속에서 함양하여 온 그 나름의 인격에 따라 건축물을 축조하고 조형화해 나가는 것이다. 마을 뒷산 봉우리의 산세와 지붕의 곡선의 일치는 초가지붕만 가지는 독특한 멋이다.

그래서 자연친화의 심성에서 흘러나오는 구수한 맛을 느낄 수 있으며, 산의 형상을 지붕의 형상 속에다 실현하여낸 대담성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 ‘초가삼간’이라는 옛말이 있는데, 이것은 비교적 가난한 사람이 사는 집이라는 표현으로서 사람이 살 수 있는 주거의 최소 단위를 나타낸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초가는 부유한 기와집에 대하여, 삼간은 그 이상의 여러 칸 혹은 수십 칸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나타낸 말로 여겨진다. 우리 나라 농촌의 초가는 봄철에 처마 밑에 심은 호박과 박넝쿨이 새끼줄을 따라 지붕 위로 기어오르기 시작하여 여름에는 호박이 지붕 위에 열리고 가을에는 박넝쿨의 박꽃과 박이 지붕을 덮게 된다.

또한 고추를 수확하여 지붕 위에 널어 말리는 풍경은 우리 나라 농촌의 가을 하늘과 매우 잘 어울린다. 호박을 수확하여 여러 통의 노란 호박이 지붕 위에서 탐스럽게 익어가 는 모습 등에서 농촌의 본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우리 민족의 의식과 생활을 지배하여온 초가집이 최근 농촌근대화사업의 일환으로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1971년부터 농촌주택지붕개량사업이 시작되어 초가지붕이 시멘트 슬레이트지붕으로 바뀌고, 그 위에 도색(塗色)을 하게 되었다. 또한, 정부주도하에 프랑스식, 이탈리아식이라 불리는 개량농촌주택을 짓게 하여 주체성 내지 전통성이 결여되고, 한반도의 풍토적 여건이 무시된 주택이 들어서게 되었다.

특히, 고속도로나 철로변을 중심으로 원색적인 도색을 하여 전시행정적 사고방식에 의한 문화적 사대주의가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개량주택의 공간구성에 있어서도 전통적인 생활관습이나 가치관을 무시하고 도시형 주택평면을 그대로 옮겨놓았다.

울타리와 담집에 대한 고려도 부족하였을 뿐만 아니라 부속사(附屬舍)조차 고려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단점이 보완되고 초가삼간을 짓고 살아온 전통과 민족성이 결여되지 않은 방안이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한국의 민가연구』(장보웅, 보진재, 1981)
『한국의 살림집』(신영훈, 열화당, 1983)
『한국의 옛집』(김광언, 마당,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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