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양동마을 ( 마을)

주생활
유적
문화재
조선시대부터, 월성손씨와 여강이씨가 세거한 경주 강동면의 씨족 마을.
유적
건립 시기
조선시대
관련 국가
조선
관련 단체
월성손씨(月城孫氏)|여강이씨(驪江李氏)
관련 인물
손소|손중돈|이번|이언적|이상도|류복하
면적
474필지/969,115㎡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국가유산청 국가민속문화유산(1984년 12월 24일 지정)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내용 요약

경주 양동마을은 조선시대부터 월성손씨와 여강이씨가 세거한 경주 강동면의 씨족 마을이다. 손씨 가문과 이씨 가문이 혼인을 계기로 처가 쪽으로 이주하면서 차례로 입향했고 이곳에서 초기부터 뛰어난 인물을 배출하면서 번창하여 마을 내에 우수한 건축물을 다수 조성하였다. 마을은 물(勿)자형의 형국으로 네 갈래의 능선과 안산인 성주봉 기슭, 이들 사이의 골짜기에 형성된 작은 동네들로 공간이 나뉘며 능선에는 대종가, 파종가 등의 주요 건물들, 그 아래의 골짜기와 주변 지역에 그 밖의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정의
조선시대부터, 월성손씨와 여강이씨가 세거한 경주 강동면의 씨족 마을.
건립 경위

경주 양동마을(慶州 良洞마을)은 월성손씨(月城孫氏)와 여강이씨(驪江李氏)가 조선 초에 입향(入鄕)하여 대를 이어 세거(世居)한 마을이다. 이곳은 손씨와 이씨 가문이 정착하기 이전에도 오랜 기간 거주와 농경이 이루어진 지역이다. 양동마을 주변의 고분군 분포와 마을 내 장터골에서 발견되는 신라 토기 편과 기와 편으로 보아, 이미 4~5세기 경부터 이 일대에 상당한 정치력을 가진 집단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양동마을의 두 가문은 각각의 입향조(入鄕祖)가 양동마을에 기존에 있던 집안에 장가든 것을 계기로 정착하게 되었다. 조선 초까지는 남자가 혼인을 계기로 처가 쪽 마을로 이주하는 풍습이 성행했기 때문이다. 우선 고려 말, 양동에 살던 여강이씨 이상도의 사위가 된 풍덕류씨(豊德柳氏) 류복하(柳復河)가 양동에 정착하였다. 이후 류복하의 딸에게 장가든 손소(孫昭, 1433~1484)가 1457년(세조 3) 장인의 상속자로 양동에 들어와 월성손씨의 입향조가 되었다. 그리고 현재 세거하는 여강 이씨의 입향조인 이번(李蕃, 1463~1500)이 손소의 사위가 되면서 양동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 이 때문에 현재 마을 주민들은 양동은 ‘외손의 마을’이라고 전한다.

입향 후 뛰어난 인물이 연이어 나오면서 두 가문은 크게 번창하였고, 양동은 양반 씨족 마을로 입지를 굳히게 되었다. 월성손씨에서는 우선 입향조 손소 자신이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진압하는 데에 참여하여 공신이 되었으며 안동부사(安東府使)를 비롯한 여러 벼슬을 지내고 계천군(鷄川君)이 되었다. 특히 손소의 둘째 아들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 1463~1529)대사헌(大司憲), 대사간(大司諫) 등을 역임하였고 학자로도 큰 명성이 있었다. 여강이씨에서는 이번의 맏아들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이 손중돈에게 학문을 배워 문과에 급제한 후 이조판서(吏曹判書), 예조판서(禮曹判書), 형조판서(刑曹判書), 좌찬성(左贊成)을 역임하였다. 이언적은 또한 성리학(性理學)의 주리론(主理論)적 입장을 확립하여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에게 전하였고, 동국18현(東國十八賢)의 한 사람으로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었다.

손소, 손중돈, 이언적 등은 마을 내에 현존하는 주요 건물을 창건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우선 손씨의 대종가인 양동 서백당(書百堂)은 손소가 입향하면서 1460년(세조 6)경 마을 깊은 곳의 내곡(內谷)에 건립한 것이고, 경주 양동 관가정(觀稼亭)은 손중돈이 분가하면서 마을 어귀에 1514년(중종 9)경 지은 것이다. 이언적이 서백당에서 보이지 않는, 능선 너머의 물봉에 1510년(중종 5)경 지은 경주 양동 무첨당(無忝堂)은 현재 여강이씨의 대종가이고, 경주 양동 향단(香壇)은 1542년(중종 37) 또는 1555년(명종 10)경, 이언적이 홀어머니를 모시는 동생 이언괄(李彦适)을 위하여 지었는데 관가정을 마주보는 언덕에 위치한다.

변천

양동의 두 가문은 안강평, 기계평의 비옥한 토지와 안락천 등의 충분한 관개, 형산강을 통한 해산물 공급 등에 힘입어 경제적 기반을 다졌다. 또한 두 가문은 17세기 이후로 경주 일대에서, 대소과(大小科)의 합격자를 가장 많이 배출하였고, 조상의 명성에도 힘입어 경주 및 영남 지역 유림 중의 주요 세력이 되었다.

두 가문이 번창하면서 양동마을의 손씨는 6개 파, 이씨는 9개 파로 나뉘었는데, 이들의 성립은 마을 내 주거의 건립에도 밀접하게 관련된다. 1979년 보고서에 따르면 대체로 대종가가 높은 곳에 위치하고 직계, 방계로 분가한 집들이 그 아래에 자리 잡는다고 하였다.

두 가문은 동약(洞約)을 만들고 동안(洞案)을 작성하는 등 마을 일에 서로 협력하고 상호 통혼(通婚)하는 등 관계를 맺어 왔다. 두 가문은 또한 주택, 정자, 학당 등 주요 건물의 건립과 집터의 선정에서 상대 가문의 유사한 건축 활동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른 가문간 협력과 경쟁의 결과로 마을 곳곳의 좋은 터에 우수한 건축물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형태와 특징

양동마을은 설창산을 풍수지리(風水地理)상의 주산(主山)으로 삼고 성주봉을 안산(案山)으로 삼아 입지하였다. 설창산의 본 줄기에서 작은 줄기들이 갈라져 나와 있는데, 이 모양 때문에 유사한 형태의 한자에 비겨 양동마을의 형국을 물(勿)자형이라 한다. ‘물’ 자에 깨끗하다는 뜻이 있기 때문에 양동에서는 산줄기 능선들의 가장 높은 곳에는 집을 짓는 것을 피하여 마을을 깨끗하게 유지했다고 한다. 입향 초기에 건립된 주요 건물인 서백당, 관가정, 무첨당, 향단은 ‘물’ 자를 이루는 네 개의 주요 능선을 하나씩 차지했고, 이후의 건물들은 그 사이의 골짜기나 주변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마을 북동쪽에 예전에 안계 마을이 있던 곳인 안계 저수지로부터 양동천이 이어져 양동마을 남쪽을 지나 마을 서쪽의 안락천으로 이어지고 안락천 너머에는 넓은 농토가 있다. 안락천은 남쪽으로 흘러 형산강으로 이어지는데, 풍수적으로는 형산강을 서남방 역수(逆水)로 안은 형국 때문에 마을이 부유해졌다고 전한다. 양동천 너머 남쪽의 안산인 성주봉은 완만한 삼각형에 나무가 무성하고 부드러운 형태인데, 풍수적으로는 이 덕분에 마을 사람들의 심성이 부드럽고 학문에 힘쓴 것이라고 한다.

‘물’자 형국의 양동마을에서는 남북 방향 산줄기들 사이로 난 골짜기들에 마을 내부의 작은 동네들이 형성되어 있다. 이들 동네 중 내곡(안골), 거림은 윗마을로, 물봉과 하촌(아랫말)은 아랫마을로 통칭하는데, 대략 내곡과 물봉 사이의 능선을 기준으로 나눈 것이다.

윗마을 중 내곡은 설창산 종주봉 아래 가장 안쪽 골짜기이다. 내곡의 중심 언덕에 월성손씨 대종가인 서백당이 들어섰다. 손씨의 경주 양동마을 낙선당고택(樂善堂古宅, 1540년경), 이씨의 창은정사(蒼隱精舍, 1860년)와 내곡정(內谷亭)은 서백당보다 안쪽에 있으며, 물봉과의 경계에 경산서당(景山書堂), 거림과의 경계에 경주 양동마을 사호당고택(沙湖堂古宅, 1840년경)이 있다. 거림은 안골의 동쪽에 있고 성주봉 북쪽의 평지인 두곡(두동골), 안계댐 쪽 길가의 돌곡(돌고개)과 그 안쪽의 장터골까지 포함한다. 거림의 대표적 건물은 이씨가문의 파 종가인 경주 양동마을 수졸당고택(守拙堂古宅, 1616년 창건, 1880년 사랑채 중건)인데 이는 사호당고택 맞은 편 언덕에 있고, 그 동쪽에 양졸정(養拙亭)이 있다. 경주 양동마을 상춘헌고택(賞春軒古宅, 1730년경)경주 양동마을 근암고택(謹庵古宅, 1880년대)은 수졸당 건너편 언덕에 있다. 두곡에는 경주 양동마을 두곡고택(杜谷古宅, 1730년경)이 있고 그 뒤로 수졸당 이의잠(李宜潛, 1576~1635)의 영당(影堂)과 재실(齋室)이 있다.

아랫마을의 물봉에선 여강이씨 대종가 무첨당(無忝堂)과 양동 대성헌(對聖軒, 1890년경), 육위정(六韡亭)이 중심부에 있고, 무첨당 건너편의 물봉 동산 너머에 서쪽의 안강 평야를 조망하는 영귀정(詠歸亭), 설천정사(雪川精舍) 등이 있다. 물봉골의 뒷고개 너머에 있는 갈곡(갈구덕)에는 손씨 가문의 경주 양동마을 수운정(水雲亭, 1582년경 창건)과 초가집 몇 채가 있다.

하촌은 성주봉의 서쪽 기슭과 물봉 골짜기 입구보다 아래에 있는 동네를 일컫고 마을 입구를 포함한다. 마을로 들어오는 옛길의 좌우 언덕 위로 관가정과 향단이 있으며, 그 사이의 골짜기를 분곡(분통골)이라고 한다. 관가정 아래 길의 왼쪽으로 병자호란 중 전사한 낙선당(樂善堂) 손종로(孫宗老, 1598~1636)를 기린 정충각(旌忠閣)이 있다. 성주봉 아래 두곡과의 경계 가까이에 경주 양동마을 심수정(心水亭)경주 양동마을 강학당(講學堂), 그 아래에 경주 양동마을 이향정고택(二香亭古宅)이 있다. 성주봉의 남쪽에서 양동마을로 가는 길과 인동리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곳인 멀고개의 언덕 위에는 경주 양동마을 안락정(安樂亭)이 있다.

양동마을 내에는 초가집도 다수 남아 있다. 한국전쟁 전까지는 마을 내 초가의 다수가 양반가에 딸린 하인들의 가랍집이었다. 가랍집에 속하는 초가들은 많이 멸실되었다고 하며, 남은 초가에선 거주자가 바뀌었다. 1978년 이후 1993년까지 초가는 50채 전후로 큰 변화가 없었다고 하는데, 2010년대에는 100여 채로 늘어났다. 이는 문화재(현, 국가유산) 보존 정책의 영향으로 새마을운동 때 슬레이트 또는 시멘트 기와로 덮었던 지붕이 초가지붕으로 돌아왔기 때문으로 보인다.

의의 및 평가

경주 양동마을은 마을의 두 가문이 조성한 옛 주거와 마을 경관, 관련 기록 등이 잘 보존되어 있어 국가민속문화재(현, 국가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어 있다. 아울러 안동 하회마을과 더불어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참고문헌

단행본

삼성건축설계사무소 편, 『양동마을 조사보고서』(경상북도, 1979)
김우원 편, 『경상북도 문화재도록』 1(동해문화사, 1995)
전국건축문화자산 자료조사 행사위원회, 『전국건축문화자산 8권 대구 경북편』(’99건축문화의해 조직위원회, 1999)
한필원, 『한국의 전통마을을 가다』 2(북로드, 2004)
강동진·이상해·이수환·전봉희, 『세계문화유산 경주양동마을』(경주시, 2010)
집필자
이우종(영남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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