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곡동 옥천종택

  • 생활
  • 유적
  • 시도문화유산
17세기 말에,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의 주실마을에 건립된 옥천 조덕린의 옛 가옥.
이칭
  • 이칭영양 옥천 조덕린 종가
유적/건물
  • 건립 시기17세기 중엽(추정)
  • 건물 층수단층
  • 건축 양식ㅁ자집, 뜰집
  • 규모정침, 초당, 사당
  • 소재지경상북도 영양군
시도문화유산
집필 및 수정
  • 집필 2022년
  • 이우종 (영남대학교 교수)
  • 최종수정 2025년 04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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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주곡동 옥천종택은 17세기 말에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의 주실마을에 건립된 옥천 조덕린의 옛 가옥이다. 경상북도 주거 건축의 역사적 유산이며, 조덕린과 그 후손들이 주실마을 내에서 분가하고 조덕린이 향불천위로 옹립되면서 성립된 소종가로 씨족마을 건축 연구의 중요한 자료이다. 소박한 안사랑과 별도로 큰사랑 역할을 하는 초당이 건립되었고 정침의 안방이 오른쪽에 배치되고 안방 뒤에 별도의 마루방이 설치된 것 등은 다른 경북 ㅁ자집에서 흔치 않은 점이다.

정의

17세기 말에,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의 주실마을에 건립된 옥천 조덕린의 옛 가옥.

건립 경위

주곡동 옥천종택(注谷洞 玉川宗宅)은 한양조씨(漢陽趙氏) 집안의 세거지(世居地)인 영양군 주실마을에 있으며 1983년에 경상북도 민속문화재(현, 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鄰, 1658~1737)의 옛 집이다. 조덕린은 주실마을 입향조 호은(壺隱) 조전(趙佺, 1570~1613)의 증손자이고, 부친 조군(趙頵, 1629~1669)의 둘째 아들이다.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1627~1704)에게 학문을 배웠다. 1691년(숙종 17)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가 1694년(숙종 20) 낙향하였는데 이때 옥천종택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1708년(숙종 34) 이후 관직이 몇 차례 제수되었으나 1725년(영조 1)에 당쟁에 관하여 상소했다가 노론(老論)의 탄핵으로 종성(鍾城)에 유배되었다. 1727년(영조 3)에 유배가 풀린 후 봉화 옥천 옆 창주정사(滄洲精舍)와 사미정(四未亭)에서 제자를 가르쳤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영남호소사(嶺南號召使)에 임명되었고, 이때의 공으로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다. 병으로 사직한 후 학문과 제자 양성에 힘썼다. 1736년(영조 12) 서원 남설을 상소하다 1725년의 상소 문제로 다시 노론에게 탄핵받았다. 1737년(영조 13) 이현일의 제자들이 스승의 무고함을 상소한 것이 문제가 되어 제주로 유배 가던 도중, 강진(康津)에서 죽었다.

변천

옥천종택은 1694년 조덕린이 낙향한 후 짓기 시작하였고 초당(草堂)은 1695년(숙종 21) 완성하였다. 사당은 1790년(정조 14)에 건립되었다.

형태와 특징

주실마을 가운데의 대종가인 호은종택(壺隱宗宅), 즉 조지훈 생가에 비하여 마을 북쪽 가장자리 야산의 경사지에 자리잡은 집이다. 규모는 호은종택보다 작다. 남서향의 호은종택과 달리 남동쪽을 향하며 마을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다. 마을 북쪽의 비탈길을 올라가 1993년에 복원된 3칸 맞배지붕 대문채를 지나면 석조 기단 위에 좌우로 초당과 정침(正寢)이 있고 정침 오른편으로 돌아 들어간 곳에 1칸 규모의 일각문(一脚門)과 담장을 갖춘 사당이 있다.

ㅁ자형 정침은 정면 5칸 중앙의 문간을 기준으로 왼쪽에 안사랑, 오른쪽에는 마구간을 개조한 온돌방과 고방이 차례로 달려 있다. 사랑은 평면, 입면상 돌출하지 않고 정침의 ㅁ자형의 일부를 이룬다. 문간을 들어서면 안마당 건너 높은 기단 위에 정침의 몸채가 있고 안마당 양쪽에 각 3칸 규모의 좌익사(左翼舍), 우익사(右翼舍)가 있다. 몸채에는 6칸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상방과 도장방, 오른쪽엔 우익사와 몸채에 한 칸씩 걸친 안방과 그 뒤의 마루방 한 칸이 있다. 우익사에는 안방과 정면의 고방 사이를 잇는 2칸의 큰 부엌이 안마당으로 열려 있고, 이 부엌 벽에 정침 우측 밖으로 나가는 판문이 있다. 좌익사에는 상방의 아궁이를 설치하고 정침 왼쪽 밖으로 나가는 판문을 단 개방된 한 칸, 그 다음에 고방, 그리고 안사랑 뒷면에 이어지는 작은 마루방인 샛마루가 있다. 정침 지붕은 맞배지붕을 조합하여 구성했는데 낮은 쪽의 안사랑과 고방 지붕 위에 좌우익사(左右翼舍) 끝의 박공(牔栱)이 걸리고, 좌우익사 지붕 위에 몸채의 큰 맞배지붕이 올라 앉았다.

초당은 1695년(숙종 21)에 지었고 노인이 머무는 큰사랑과 아이들을 가르치는 서당 역할을 한다. 정면 3칸 측면 1칸이고 중앙의 대청과 좌우의 온돌로 구성된 단순한 형태이다. 민도리 홑처마에 초가지붕을 덮었다. 정면에 설치한 마루에 평난간을 깔아 일반 초가보다 격식 있는 외관을 갖췄다.

사당은 맞배지붕집이다. 정면 3칸에 전퇴(前退)를 달아 측면 1.5칸이며 초익공(初翼工)으로 꾸몄다. 유림이 옹립한 향불천위(鄕不遷位)인 조덕린의 제사를 지내는 부조묘(不祧廟)이다. 내부엔 조덕린과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신주를 모신 주독(主櫝)과 후처 진주강씨(晉州姜氏) 신주를 모신 주독이 감실(龕室) 1개에 모셔져 있다.

의의 및 평가

17세기 말 조덕린이 분가하며 지었고 조덕린이 사후에 향불천위로 옹립되면서 성립된 영양 주실마을 내의 소종가로, 경상북도의 주거와 씨족마을 연구의 중요한 자료이다. 소박한 안사랑과 글 읽는 별당이자 큰사랑 역할을 하는 초당을 별도로 건립한 것은 특징적이다. 또한 정침의 안방이 오른쪽에 배치되고 사랑방이 왼쪽에 배치된 것은 경상북도 ㅁ자집의 일반적 구성과는 좌우가 달라진 것이다.

참고문헌

  • 단행본

  • - 김우원 편, 『경상북도 문화재도록』 2(동해문화사, 1995)

  • - 전국건축문화자산 자료조사 행사위원회, 『전국건축문화자산 8권: 대구경북편』(’99 건축문화의해 조직위원회, 1999)

  • - 한국국학진흥원, 『한양조씨 옥천종택』(2012)

  • - 백순철, 『영양 옥천 조덕린 종가』(예문서원, 2015)

  • 인터넷 자료

  •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https://www.heritage.go.kr/)

  • 기타 자료

  • - 경상북도, 『경상북도 문화재 대장: 주곡동 옥천 종택』

주석

  • 주1

    : 서울특별시를 본관으로 하는 우리나라 성의 하나. 우리말샘

  • 주2

    : 대대로 살고 있는 고장. 우리말샘

  • 주3

    : 추천의 절차를 밟지 않고 임금이 직접 벼슬을 내리던 일. 우리말샘

  • 주4

    : 함경북도 종성군에 있는 국경 도시. 중국 간도 지방과 접하여 있으며 두만강 오른쪽 기슭에 있는데, 군청 소재지이다. 우리말샘

  • 주5

    : 전라남도 강진군에 있는 읍. 강진군의 중서부에 위치해 있다. 서쪽과 북쪽은 200~500미터의 산지로 둘러싸여 있고, 동쪽과 남쪽은 탐진강의 하류 지역으로 기름진 넓은 들이 있다. 남해안의 곡창 지대이며, 주로 쌀ㆍ보리를 생산한다. 군내의 교통 중심지이자, 농산물 집산지이며, 행정ㆍ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하고 있다. 4일과 9일에 장이 선다. 문화재로 강진 향교, 강진 남강사 주자 갈필 목판 일괄, 강진 옥련사 목조 여래 좌상, 강진 영랑 생가, 강진 금강사, 고성사, 남강 서원, 주자 갈필각, 화수각 등이 있다. 강진군의 도청 소재지이다. 면적은 50.91㎢. 우리말샘

  • 주6

    : 제사를 지내는 몸채의 방. 우리말샘

  • 주7

    : 억새나 짚 따위로 지붕을 인 조그마한 집채. 흔히 집의 몸채에서 따로 떨어진 곳에 지었다. 우리말샘

  • 주8

    : 대문간이 따로 없이 양쪽에 기둥을 하나씩 세워서 문짝을 단 대문. 우리말샘

  • 주9

    : 촛가지 하나로 꾸민 공포. 우리말샘

  • 주10

    : 집채의 앞쪽에 다른 기둥을 세워 만든 조그마한 칸살. 우리말샘

  • 주11

    : 경상북도 안동을 본관으로 하는 우리나라 성(姓)의 하나. 우리말샘

  • 주12

    : 경상남도 진주를 본관으로 하는 우리나라 성(姓)의 하나.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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