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한양조씨 가정보(嘉靖譜)’ 또는 ‘한양조씨 갑신보(甲申譜)’라 불린다. 현재 원본은 전하지 않고 서발문이 후대에 간행된 한양조씨족보류에 구서(舊序) · 구발(舊跋) 형태로 실려 있다.
조원기의 서문과 조세정의 발문에 따르면, 1책 분량으로 민세정의 임지인 함창(咸昌)에서 목판으로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원래 한양조씨는 15세기 후반경에 조원기의 아버지 조충손(趙衷孫)에 의해 작은 보첩이 작성되어 있었다.
조충손은 누구보다 가계 기록의 중요성을 느끼면서 보첩을 작성하였고, 수시로 이를 수정 · 보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미처 간행하지 못하고 사망하자 조원기가 보첩의 원고를 소장하게 되었으나 그 역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화를 당하는 와중에서 원고를 일실하게 되었다.
그 후 조원기는 선지를 계승하는 취지에서 소시적 아버지로부터 보고 들은 견문을 바탕으로 여러 자료를 참고하여 1책 분량의 초본을 작성하게 된 것이다. 이를 함창군수로 부임하는 족질 조세정에게 주어 수정 · 보완하게 하여 함창에서 간행한 것이 바로 이 족보이다.
현재 원본이 전하지 않아 체제와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대강(大綱)을 만들고 요항(要項)을 기입하였다”는 언급에서 체제가 비교적 완비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양렬공(襄烈公) 이하는 자세하고, 용성군(龍城君) 이상은 간략하게 했다”는 기록에서 시조 조지수(趙之壽)에서 용성군 조돈(趙暾) 형제까지는 소략한 반면 조인벽(趙仁璧) 이하로는 비교적 자세하게 다루어졌음을 알 수 있는데, 전자의 경우는 자료의 부족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현존하는 문화유씨 가정보와 마찬가지로 본종을 물론 외파까지 포괄되고, 자녀는 출생순에 따라 수록하는 등 이 시기 족보 간행의 일반적 경향이 반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결과적으로 이 족보는 한양조씨족보의 초간본으로서 1651년(효종 2) 조경(趙絅) 등이 간행한 신묘보(辛卯譜), 1726(영조 2) 조선유(趙善裕) 등이 간행한 병오보(丙午譜), 1798년(정조 22) 조수관(趙守寬) 등이 간행한 무오보(戊午譜), 1849년(헌종 15) 조형복(趙亨復) 등이 간행한 기유보(己酉譜), 1884년(고종 21) 조제화(趙濟華) 등이 간행한 갑신보(甲申譜), 1934년 조일원 등이 간행한 갑술보(甲戌譜) 등 한양조씨족보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