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성중(成仲)·의중(義仲). 호는 비지(賁趾). 안동 출신. 아버지는 남신신(南藎臣)이며, 어머니는 초계변씨(草溪卞氏)로 진사 변백원(卞百源)의 딸이다.
어려서 김언기(金彦璣)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1563년(명종 18) 고종형 금난수(琴蘭秀)를 통해 이황의 문인이 되었다. 1564년에는 이황을 따라 청량산(淸凉山) 유람에 동행하였고, 도산서당에서 「태극도설(太極圖說)」을 강론하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자주 도산서당을 왕래하며 이황과 학문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황으로부터는 식견과 학자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았고, 동료들로부터는 이황 문하의 안자(顔子)로 평가되었다. 1570년(선조 3) 이황이 사망하자 28세의 나이로 상례(相禮)로 추대되었으며, 이듬 해인 1571년에는 동문들과 함께 예안의 역동서원(易東書院)에서 회동하여 이황의 유문을 수습하였다.
1575년에는 사림들의 요청으로 여강서원에서 『이학통록(理學通錄)』을 교정하였으며, 1576년에는 34세의 나이로 여강서원원규(廬江書院院規)를 제정하였다. 1578년에는 이황의 『계몽전의(啓蒙傳疑)』를 교정하였고, 학행을 인정받아 정구(鄭逑)·김장생(金長生)·이덕홍(李德弘)과 함께 유일로 천거되었다.
그는 구봉령(具鳳齡)·금난수·이덕홍·권호문(權好文)·유운룡(柳雲龍)·배삼익(裵三益)·권우(權宇) 등과 두루 교유하였는데, 특히 유운룡·권우와 친분이 깊었다. 1653년(효종 4) 노림서원(魯林書院)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저서로는 『비지문집(賁趾文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