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평문씨족보』는 1736년 문우징 등이 중심이 되어 간행한 남평문씨의 족보이다. 3권 3책이며, 강양의 해인사에서 목판으로 간행되었다. ‘남평문씨 병진보’로 통칭된다. 문동도·문우징 부자의 주도로 편찬·간행되었는데 전주·영암·거창·합천·진주 등 영호남에 거주하는 후손들이 대거 간행에 참가했다. 거리가 먼 함경·평안도를 제외한 경상·전라·충청·황해·경기·강원도 등 6개 도에 산거하는 여러 파와 계를 광범하게 수렴했다고 하지만 문유필 후손 중심의 족보이다. 체제가 완비되어 있고, 각 인물들의 주기 또한 이 시기 다른 족보에 비해 비교적 자세하여 자료적 가치가 높다.
분량은 3권 3책이며, 강양(江陽, 오늘날의 합천군)의 해인사(海印寺)에서 목판으로 간행되었다. 표제와 판심제 모두 “남평문씨족보”이며, 흔히 ‘남평문씨 병진보(丙辰譜)’로 통칭된다. 크기는 반곽이 세로 23.5㎝×가로 18.5㎝이며, 서발문, 범례, 부록은 항자수부정(行字數不定)이고, 유계(有界), 주쌍행(註雙行), 선장(線裝), 저지(楮紙)이다.
체제는 표지, 서발문, 사실(事實), 목록(目錄), 본문에 해당하는 보도(譜圖)로 구성되어 있다. 서발문은 4종인데, 모두 1736년에 지은 것이다. 이 중 이개(李蓋)의 서문, 문우징의 발문, 생원 문덕관(文德觀)의 발문은 표지 다음 장부터 연속적으로 수록되어 있고, 문세익(文世益)의 발문은 이상하게도 목록 뒤에 실려 있다.
이들 기록에 따르면, 남평문씨족보는 일찍이 문간(文簡: 引儀)의 외손 해풍군(海豊君) 이기(李耆)에 의해 간행되었으나 배포하기도 전에 임진왜란을 당해 전소되었으며, 그 후 문은(文垠)의 외손 송암(松巖) 이로(李魯, 1544∼1598)가 초보를 작성하였으나 미간행 상태로 남아 있었다. 이 외에도 문씨에게는 지역과 파계(派系)에 따라 사장(私藏)되어 온 보첩(譜牒)들이 여러 종 있었다고 한다.
이에 문동도(文東道)가 이들 보첩들을 두루 수렴하여 간행작업에 착수하였지만 완수하지 못하고 사망하자 아들 우징이 선지를 계승하여 간행을 완료한 것이다. 결국 이 족보는 강양에 세거한 문동도 · 문우징 부자의 주도로 편찬 · 간행되었고, 간행처도 강양의 해인사였지만 전주(全州), 영암(靈巖), 거창(居昌), 합천(陜川), 진주(晉州) 등 영호남 열읍에 거주하는 후손들이 대거 간행에 참가한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에 대해서는 3책의 말미에 수록된 ‘족보간행시임원(族譜刊行時任員)’ 항목에 상술되어 있다.
사실은 시조 문다성(文多省), 충숙공(忠肅公) 문극겸(文克謙), 강성군(江城君) 문익점(文益漸) 등 현조들의 전기류(傳記類)와 이들과 관련된 후인들의 시문(詩文)을 수록한 것이다.
목록은 다른 족보의 범례와 같은 것으로 모두 13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목록 말미에는 1권∼3권까지의 천자문 자표(字標)가 부기되어 있는데, 1권은 천(天)∼세(歲)까지 38자, 2권은 율(律)∼황(黃)까지 52자, 3권은 시(始)∼오(五)까지 71자이다. 그 옆에는 ‘각도(各道)’라 하여 경상 · 전라 · 충청 · 황해 · 경기 · 강원도 등 족보 간행시 보단(譜單)을 수렴한 도의 명칭을 열서하고, 맨 마지막에 함경 · 평안도는 거리가 멀어 수렴하지 못했다고 적고 있다. 남평문씨족보 병진보는 함경 · 평안도를 제외한 6도의 남평문씨들이 광범위하게 수록되어 있지만 문유필 후손 중심의 족보라고 할 수 있다.
보도는 6층 횡간으로 구성되어 있고, 매 장에는 천자문의 순서에 따라 자표(字標)가 매겨져 있다. 총 수록 대수는 시조 문다성으로부터 20∼21세까지이며, 보도 중간 중간에 각 계열별 거주지를 표기하여 후손들의 지역적 분포와 거주 현황을 파악하기가 매우 용이하다. 거주지는 거파주(居坡州), 거전주용진(居全州龍進), 거합천천곡(居陜川泉谷), 거영암영보(居靈巖永保) 등 군현 명칭만 표기한 경우도 있고, 군현과 거주하는 동리의 이름까지 표기한 경우도 있다. 이 거주지를 대별해 보면, 파주(坡州), 합천, 야로(冶爐), 전주, 영암, 평산(平山), 강릉(江陵), 거창(居昌), 고현(古縣), 신지(神旨), 산음(山陰), 진주 등인데, 이 중에서도 합천과 거창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맨 첫 장에는 시조 문다성 이하 6대를 수록하였고, 그 다음부터는 6대에서 11대, 11대에서 16대, 16대에서 20대까지 수록하였다. 여기서 한가지 특징적인 것은 시조를 원조라 표기하였고, 보도의 맨 상단에 위치하는 인물은 본손일지라도 성을 표기한 점이다. 다른 족보에서는 사위만 성을 표기하고 본손은 이름만 표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족보는 남평문씨 중에서도 중시조 문익(文翼)의 2자 문공유(文公裕)→문극겸 계열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문공유의 형 문공미(文公美)와 아우 문공윤(文公允), 4명의 여형제 계열은 누락되어 있고, 심지어 공유의 차자 문극순(文克純)과 두 사위 계열도 수록되어 있지 않다. 외파(外派)와 서자녀는 2대에 한하여 수록하고 있으며, 서자녀는 서자(庶子) 또는 서녀(庶女), 계후한 경우에는 계자(繼子)라 표기하여 적서와 출계관계를 명확히 하였다. 자녀는 선남후녀의 방식에 따라 수록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편찬자는 범례에서 “자녀는 마땅히 순서에 따라 기록해야 하나 선남후녀의 방식이 이미 고전(古典)이 되었으므로 여기에 따른다”고 하여 당시 보편화된 선남후녀 방식을 취했음을 밝혔다.
각 인물의 주기는 전반적으로 비교적 상세한 편이다.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을 지낸 현달한 인물은 관직, 증직, 시호, 묘향, 묘소위치, 배위의 성관, 처부의 이름 등이 상술되어 있고, 그 외 무관자일지라도 자, 묘소위치, 배위의 성관, 처부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으며, 사승관계가 기재된 경우도 있다. 배위의 표기에 있어 당상관 이상이면 부인(夫人)이라 했고, 그 이하는 배(配)라 하여 차별을 두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사위는 대부분 본관을 생략하였고, 비록 서자라도 주기는 적자와 차이점이 없다.
남평문씨족보 병진보는 사실상 남평문씨족보 초간본이라 할 수 있는 신해보(辛亥譜, 1731), 을묘보(乙卯譜, 1735)에 후속하는데, 전해져 왔던 자료들에 근거해서 6개 도에 산거하는 제 파계(派系)를 광범위하게 수렴했다. 그리고 족보의 체제가 완비되어 있고, 각 인물들의 주기 또한 이 시기 다른 족보에 비해 비교적 자세하여 자료적 가치가 높은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