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여유(汝唯), 호는 송암(松巖). 의령 출신. 부호군 이문창(李文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첨정 이한(李翰)이다. 아버지는 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 이효범(李孝範)이며, 어머니는 판관 문은(文垠)의 딸이다.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64년(명종 19) 진사시에 합격하고, 을사사화 때 피화(被禍)된 관원들을 신원하여줄 것과 간신들을 토죄할 것을 소청하였다. 봉선전참봉(奉先殿參奉)을 거쳐 1590년(선조 23)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직장이 되었으며, 그간에 최영경(崔永慶)의 신원을 소청하기도 하였다.
1591년에는 상소하여 왜사(倭事)를 논하였으며,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종도(趙宗道)와 함께 창의(倡義)할 것을 약속하고, 귀향하여 삼가·단성으로 나가 동생 이지(李旨)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인근 여러 고을에 창의통문을 내어 민중의 의분심을 환기시키는 한편, 경상우도초유사(慶尙右道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종사관(從事官)·소모관(召募官)·사저관(私儲官)으로도 활약하였다. 1593년에는 명나라 제독 이여송(李如松)에게 서계(書啓)를 보내어 화의의 잘못을 지적하였다.
그 사이에 형조좌랑 겸 기주관·비안현감·정언 등의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낙산서원(洛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사성강목(四姓綱目)』·『용사일기(龍蛇日記)』·『문수지(文殊志)』·『송암문집』 등이 있다. 1871년(고종 8) 정의(貞義)라는 시호가 추시(追諡)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