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원기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대사헌, 이조참판, 좌참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이지(理之)
돈후재(敦厚齋)
시호
문절(文節)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457년(세조 3)
사망 연도
1533년(중종 28)
본관
한양(漢陽)
주요 관직
대사헌|이조참판|좌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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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전기에, 대사헌, 이조참판, 좌참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이지(理之), 호는 돈후재(敦厚齋). 개국공신 조온(趙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참판 조육(趙育)이고, 아버지는 정랑 조충손(趙衷孫)이며, 어머니는 남상명(南尙明)의 딸이다. 조광조(趙光祖)의 숙부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9세 때에 장기를 두고 놀이에만 치중하자 어머니가 한탄하는 말을 듣고 반성한 뒤 학문에 정진하여 1483년(성종 14) 사마시를 거쳐, 1496년(연산군 2)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전적·정언·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사관(史官)으로 재직 중 임금이 생존시에는 아무도 열람할 수 없게 되어 있는 사초(史草)를 연산군이 보고자 제출을 명하였으나 이에 불응하여 파직되었고, 곧 복직되어 봉상시첨정(奉常寺僉正)이 되었다.

1504년 갑자사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연산군은 조원기가 대간 시절에 간언했던 내용을 문제 삼아 장을 치고 외방에 유배시켰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와 사성이 되었다. 조원기는 목민(牧民)하는 데 자상하고 무관의 일도 잘 아는 까닭에 경원부사로 나갔는데, 그 곳에서 민심을 안정시키고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그 공으로 대사간에 승진되었고, 이어 좌부승지로 재직 중 청백리에 녹선되고 이어 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1515년(중종 10)에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그 이듬해 대사헌·이조참판을 역임하고, 형조판서를 거쳐 좌참찬을 지냈다. 1523년 명나라 황태후가 상을 당하매 진위사(陳慰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1526년 사직하려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조원기의 조카 조광조의 명성이 지나치게 높아 심히 근심하며 편지를 보내어 경계하였다. 저서로는 『조문절공유고(趙文節公遺稿)』가 있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참고문헌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중종실록(中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묵재집(默齋集)』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청선고(淸選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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