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양동 향단은 조선 전기에 건립된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양동마을에 있는 이언적 관련 주택이다. 고택은 현재 안채와 사랑채로 구성된 정침, 행랑채, 사당, 바깥사랑채, 대문채, 부속채, 화장실, 협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외에 방앗간, 마구간, 별묘 등이 있다. 행단은 一자형 행랑채와 일(日)자형 정침이 일반 상류 주택과 다른 독특한 평면 구성을 하고 있고, 작은 두 안마당을 중심으로 실을 배치한 정침의 공간 구성, 구조 및 세부 기법, 공간 구성에 따른 지붕 모양은 일반 상류 주택과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경주 양주 향단(慶州 良洞 香壇)은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의 언덕에 위치한 주택으로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이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부임할 때 중종(中宗)이 그 모친을 돌볼 수 있도록 1543년(중종 38)경에 지어 준 살림집이라고 전한다. 양동마을은 북측의 설창산에서 시작한 산릉선과 골로 형성된 지형에 터를 잡았으며, 마을의 안산(案山)은 동측의 성주봉(聖主峯)인데, 풍수(風水)에서 길하게 여기는 문필봉(文筆峯)의 형상을 하고 있다. 양동과 마을의 월성손씨(月城孫氏)는 처가인 양동마을로 이사 온 양민공(襄敏公) 손소(孫昭, 14331484)와 그의 아들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 14631529)을 지나면서 성장을 하였다. 양동마을의 여강이씨(驪江李氏)는 이언적의 조부 이수회(李壽會)가 이주하면서 시작되었으며, 부친인 찬성공(贊成公) 이번(李蕃, 1463~1500)이 손소의 사위가 되었고, 이언적이 양동 서백당(良洞書百堂)에서 태어나면서 이 마을에서 대대로 살게 되었다.
향단은 건립 이후 이언적이 1545년(인종 1) 중앙으로 자리를 옮기자 이언괄(李彦适, 14941553)이 받아 노모를 모시고 살았다. 향단은 이언괄의 손자 이의주(李宜澍)의 호(號)이다. 고택(古宅)의 안채와 사랑채로 구성된 정침(正寢)은 1964년 11월 14일 문화재 관리 위원회(현, 문화유산위원회)에서 보물로 지정되었고, 1975년부터 1976년 사이에 낡은 부분을 대대적으로 보수하였으며, 이때, 사주문(四柱門), 일각문(一脚門), 변소 3동이 신축되었다. 19791980년에는 향단 대문채 밖 ㄱ자형 관리사(管理舍) 1동을 신축하였고, 1995년도 바깥사랑채(새사랑)와 대문채가 건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향단은 2011년 발굴 조사를 하여 유구가 확인된 사당, 곳간 등을 복원하기로 하여 2014년 3월에 부속채(곳간)를 중건하였고, 2015년 11월에 사당을 중건하였다. 이후 향단은 2021년과 2022년에 경미한 보수 및 주변 정비가 있었다. 고택은 현존하는 건물 이외에 정침 서측의 방앗간, 바깥마당 축대 아래의 마구간, 사당 동측 언덕 위에 별묘(別廟)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방앗간채는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소실되었다.
향단은 남북으로 난 마을 중심길에서 서측 분통골로 이어지는, 경사진 마을 안길을 따라 접근하며, 야산을 배경으로 낮은 구릉 위에 터를 잡고 동향과 남향을 하고 있다. 향단은 현재 안채와 사랑채로 구성된 정침, 행랑채, 사당, 바깥사랑채, 대문채, 부속채, 화장실, 협문(夾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향단은 一자형 행랑채와 일(日)자형 정침이 인접하였는데, 행랑채, 안채 및 사랑채가 작은 두 안마당[中庭]을 중심으로 방들이 집약적으로 배열되어 있어 일반적인 반가(班家)와 다른, 독특한 평면 구성을 하고 있다. 정침은 동측 안마당을 중심으로 서측에 안채가 있고 동측에 사랑채가 있다. 안채는 서측과 동측 안마당 사이에 안방과 안대청이 있고, 서측 안마당(행랑마당)을 중심으로 부엌과 고방(庫房), 광, 건넌방, 헛간 등이 있는데, 서측 안마당은 노천 부엌과 같은 기능을 하였다. 부엌과 헛간은 중층 구조로 아래층이 흙바닥의 헛간이고, 그 위층은 마루 구조인데, 헛간의 마당쪽에 살대를 박아 외부와 통하도록 하였다. 건넌방은 안방과 같이 안대청으로 열려 있다. 사랑채는 남북으로 큰사랑, 사랑 대청, 작은사랑 순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안채와 달리 동향을 하고 있다. 행랑채는 정면 9칸, 측면 1칸으로 정침보다 낮게 터를 잡고 있는데, 동측에서 서측으로 온돌방, 중문(中門), 마루, 온돌방, 곳간, 마구간 등이 배치되어 있다. 바깥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규모로 사랑 마당 북측에 자리하여 남측을 내려다보고 있다. 사당은 안채 북측 언덕 위 정면에 사주문을 세우고 사면에 토석 담장을 두르고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마루를 깐 통간 구조다. 부속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로 바깥사랑채 북측 언덕에 동남향을 하고 있다. 화장실은 2간 규모로 행랑채 서측에 있다. 대문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동향을 하고 있다.
향단의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는 모두 자연석 허튼층쌓기 기단 위에 자연석 주추[柱礎]를 놓고 원주(圓柱, 원기둥)를 세워 하중을 받도록 하였다. 안채와 행랑채의 원기둥 상부는 민도리 방식으로 짜여 있다. 사랑채 대청 중앙의 원기둥 상부는 초익공(初翼工) 방식으로 짜여 있으며, 익공재(翼工材)는 외부 끝을 간결하게 초각(草刻)하였고, 내부 끝을 연봉(蓮峯) 모양으로 초각하였다. 사랑 대청에 면한 윗방과 아랫방의 원기둥 상부는 창방 뺄목의 마구리를 사절과 초각을 하고 윗면에 소로(小櫨)를 놓아 상부의 도리를 받도록 하였다. 세로열의 안채와 사랑채의 가구(架構)는 오량가구(五樑架構)인데, 사랑채는 포동자(包童子) 위에 종량(宗樑)을 놓은 후 파련대공(波蓮臺工)을 세워 용마루를 받도록 하였다. 향단의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의 지붕은 홑처마 맞배지붕인데 세로열과 가로열의 용마루 높이가 달라 정면과 배면으로 합각(合閣)과 박공(牔栱)면이 생기는데, 특히 사랑채는 동측으로 맞배지붕의 박공면을 구성하여 독특한 입면을 구성하고 있다.
경주 양동 향단은 일반적인 반가처럼 안채, 사랑채, 행랑채, 사당 등으로 구성되었지만 다른 상류 주택과 다르게 채와 실을 집약하여 평면을 구성한 점과 형식, 규모 등이 독특한 고택으로서 주거 문화(住居文化)를 살필 수 있어 학술적으로 가치가 있다. 또한 향단은 원기둥을 사용하고 초각한 포부재(包部材)를 사용하여 건물의 격을 높였고, 단순한 맞배지붕을 이용하여 차별화된 입면을 구성하는 건축적 특성이 있으며, 더 나아가 임진왜란 이전에 지은 살림집으로 건축사적 가치를 지닌 중요한 건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