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양동 향단 ( )

주생활
유적
문화재
조선 전기에 건립된,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양동마을에 있는 이언적 관련 주택.
유적/건물
건립 시기
조선 전기 1543년(중종 38)경
건물 층수
단층
규모
1동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보물(1964년 11월 14일 지정)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내용 요약

경주 양동 향단은 조선 전기에 건립된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양동마을에 있는 이언적 관련 주택이다. 고택은 현재 안채와 사랑채로 구성된 정침, 행랑채, 사당, 바깥사랑채, 대문채, 부속채, 화장실, 협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외에 방앗간, 마구간, 별묘 등이 있다. 행단은 一자형 행랑채와 일(日)자형 정침이 일반 상류 주택과 다른 독특한 평면 구성을 하고 있고, 작은 두 안마당을 중심으로 실을 배치한 정침의 공간 구성, 구조 및 세부 기법, 공간 구성에 따른 지붕 모양은 일반 상류 주택과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정의
조선 전기에 건립된,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양동마을에 있는 이언적 관련 주택.
건립 경위

경주 양주 향단(慶州 良洞 香壇)은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의 언덕에 위치한 주택으로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이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부임할 때 중종(中宗)이 그 모친을 돌볼 수 있도록 1543년(중종 38)경에 지어 준 살림집이라고 전한다. 양동마을은 북측의 설창산에서 시작한 산릉선과 골로 형성된 지형에 터를 잡았으며, 마을의 안산(案山)은 동측의 성주봉(聖主峯)인데, 풍수(風水)에서 길하게 여기는 문필봉(文筆峯)의 형상을 하고 있다. 양동과 마을의 월성손씨(月城孫氏)는 처가인 양동마을로 이사 온 양민공(襄敏公) 손소(孫昭, 1433~1484)와 그의 아들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 1463~1529)을 지나면서 성장을 하였다. 양동마을의 여강이씨(驪江李氏)는 이언적의 조부 이수회(李壽會)가 이주하면서 시작되었으며, 부친인 찬성공(贊成公) 이번(李蕃, 1463~1500)이 손소의 사위가 되었고, 이언적이 양동 주14에서 태어나면서 이 마을에서 대대로 살게 되었다.

변천

향단은 건립 이후 이언적이 1545년(인종 1) 중앙으로 자리를 옮기자 이언괄(李彦适, 1494~1553)이 받아 노모를 모시고 살았다. 향단은 이언괄의 손자 이의주(李宜澍)의 호(號)이다. 주15주25주26로 구성된 주16은 1964년 11월 14일 문화재 관리 위원회에서 보물로 지정되었고, 1975년부터 1976년 사이에 낡은 부분을 대대적으로 보수하였으며, 이때, 주1, 주2, 변소 3동이 신축되었다. 1979~1980년에는 향단 대문채 밖 ㄱ자형 관리사(管理舍) 1동을 신축하였고, 1995년도 바깥사랑채(새사랑)와 주17가 건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향단은 2011년 발굴 조사를 하여 주18가 확인된 주19, 곳간 등을 복원하기로 하여 2014년 3월에 부속채(곳간)를 중건하였고, 2015년 11월에 사당을 중건하였다. 이후 향단은 2021년과 2022년에 경미한 보수 및 주변 정비가 있었다. 고택은 현존하는 건물 이외에 정침 서측의 방앗간, 주21 주22 아래의 마구간, 사당 동측 언덕 위에 주23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방앗간채는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소실되었다.

형태와 특징

향단은 남북으로 난 마을 중심길에서 서측 분통골로 이어지는, 경사진 마을 안길을 따라 접근하며, 야산을 배경으로 낮은 주24 위에 터를 잡고 동향과 남향을 하고 있다. 향단은 현재 안채와 사랑채로 구성된 정침, 주27, 사당, 바깥사랑채, 대문채, 부속채, 화장실, 주28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향단은 一자형 행랑채와 일(日)자형 정침이 인접하였는데, 행랑채, 안채 및 사랑채가 작은 두 안마당[中庭][^29]을 중심으로 방들이 집약적으로 배열되어 있어 일반적인 주3와 다른, 독특한 평면 구성을 하고 있다. 정침은 동측 안마당을 중심으로 서측에 안채가 있고 동측에 사랑채가 있다. 안채는 서측과 동측 안마당 사이에 안방과 안대청이 있고, 서측 안마당(행랑마당)을 중심으로 부엌과 고방(庫房), 광, 건넌방, 헛간 등이 있는데, 서측 안마당은 주30 부엌과 같은 기능을 하였다. 부엌과 헛간은 중층 구조로 아래층이 흙바닥의 헛간이고, 그 위층은 마루 구조인데, 헛간의 마당쪽에 주34를 박아 외부와 통하도록 하였다. 건넌방은 안방과 같이 안대청으로 열려 있다. 사랑채는 남북으로 주32, 사랑 대청, 주33 순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안채와 달리 동향을 하고 있다. 행랑채는 정면 9칸, 측면 1칸으로 정침보다 낮게 터를 잡고 있는데, 동측에서 서측으로 온돌방, 중문(中門), 마루, 온돌방, 곳간, 마구간 등이 배치되어 있다. 바깥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규모로 사랑 주35 북측에 자리하여 남측을 내려다보고 있다. 사당은 안채 북측 언덕 위 정면에 주36을 세우고 사면에 토석 담장을 두르고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마루를 깐 주31 구조다. 부속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로 바깥사랑채 북측 언덕에 동남향을 하고 있다. 화장실은 2간 규모로 행랑채 서측에 있다. 대문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동향을 하고 있다.

향단의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는 모두 자연석 주4 기단 위에 자연석 주추[柱礎][^37]를 놓고 원주(圓柱, 원기둥)를 세워 주38을 받도록 하였다. 안채와 행랑채의 원기둥 상부는 주5 방식으로 짜여 있다. 사랑채 대청 중앙의 원기둥 상부는 주6 방식으로 짜여 있으며, 익공재(翼工材)는 외부 끝을 간결하게 주7, 내부 끝을 연봉(蓮峯) 모양으로 초각하였다. 사랑 대청에 면한 윗방과 아랫방의 원기둥 상부는 주39 주40주41주42과 초각을 하고 윗면에 주43를 놓아 상부의 주44를 받도록 하였다. 세로열의 안채와 사랑채의 가구(架構)는 오량가구(五樑架構)인데, 사랑채는 포동자(包童子) 위에 주8을 놓은 후 주9을 세워 주10를 받도록 하였다. 향단의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의 지붕은 홑처마 주11인데 세로열과 가로열의 용마루 높이가 달라 정면과 배면으로 주12주13면이 생기는데, 특히 사랑채는 동측으로 맞배지붕의 박공면을 구성하여 독특한 주46을 구성하고 있다.

의의 및 평가

경주 양동 향단은 일반적인 반가처럼 안채, 사랑채, 행랑채, 사당 등으로 구성되었지만 다른 상류 주택과 다르게 채와 실을 집약하여 평면을 구성한 점과 형식, 규모 등이 독특한 고택으로서 주거 주45를 살필 수 있어 학술적으로 가치가 있다. 또한 향단은 원기둥을 사용하고 초각한 포부재(包部材)를 사용하여 건물의 격을 높였고, 단순한 맞배지붕을 이용하여 차별화된 입면을 구성하는 건축적 특성이 있으며, 더 나아가 임진왜란 이전에 지은 살림집으로 건축사적 가치를 지닌 중요한 건물이다.

참고문헌

단행본

경상북도, 『양동마을 조사 보고서』(경상북도, 1979)
문화재청, 『향단 실측 조사 보고서』(문화재청, 1999)
이상해, 『전통 역사마을 양동』(문화재청, 2010)

인터넷 자료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https://www.heritage.go.kr)

기타 자료

문화재청, 「2011년도 문화재위원회: 제10차 건축문화재분과위원회 회의록」(2011.10.)
주석
주1

건물에서 기둥이 네 개인 문. 우리말샘

주2

대문간이 따로 없이 양쪽에 기둥을 하나씩 세워서 문짝을 단 대문. 우리말샘

주3

양반의 집안. 우리말샘

주4

크기가 다른 돌을 줄눈을 맞추지 아니하고 불규칙하게 쌓는 일. 우리말샘

주5

모가 나게 만든 도리. ⇒규범 표기는 ‘납도리’이다. 우리말샘

주6

촛가지 하나로 꾸민 공포. 우리말샘

주7

화초 무늬를 새기는 일. 우리말샘

주8

대들보 위의 동자기둥 또는 고주(高柱)에 얹히어 중도리와 마룻대를 받치는 들보. 우리말샘

주9

덩굴나무가 서리어 나가는 모양을 그린 대공. 우리말샘

주10

지붕 가운데 부분에 있는 가장 높은 수평 마루. 우리말샘

주11

건물의 모서리에 추녀가 없이 용마루까지 측면 벽이 삼각형으로 된 지붕. 우리말샘

주12

지붕 위의 양옆에 박공으로 ‘人’ 자 모양을 이루고 있는 각. 우리말샘

주13

박공지붕의 옆면 지붕 끝머리에 ‘∧’ 모양으로 붙여 놓은 두꺼운 널빤지. 우리말샘

주14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에 있는 조선 시대의 가옥. 경주 손씨의 종가이며, 시조인 손소가 1484년에 지었다. ‘一’ 자형 대문채 안에 ‘ㅁ’ 자형 안채가 있고, 사랑채 뒤쪽 높은 곳에 신문(神門)과 사당이 있다. 국가 민속 문화재이며, 국가 민속 문화재 정식 명칭은 ‘경주 양동 마을 송첨 종택(慶州良洞마을松簷宗宅)’이다. 우리말샘

주15

옛날에 지은, 오래된 집. 우리말샘

주16

제사를 지내는 몸채의 방. 우리말샘

주17

대문이 있는 집채. 우리말샘

주18

옛날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자취. 우리말샘

주19

조상의 신주(神主)를 모셔 놓은 집. 우리말샘

주21

대문 밖에 있는 마당. 또는 바깥채에 딸린 마당. 우리말샘

주22

높이 쌓아 올린 대나 터. 우리말샘

주23

왕실에서 종묘에 들어갈 수 없는 사친(私親)의 신주를 모시던 사당. 조선 시대에는 임금의 생모가 정실 왕후가 아닐 때, 또는 임금으로 추존(追尊)되기 전에 따로 모신 사당을 이른다. 우리말샘

주24

땅이 비탈지고 조금 높은 곳. 우리말샘

주25

한 집 안에 안팎 두 채 이상의 집이 있을 때, 안에 있는 집채. 우리말샘

주26

사랑으로 쓰는 집채. 우리말샘

주27

대문간 곁에 있는 집채. 우리말샘

주28

삼문(三門) 가운데 좌우에 달린 작은 문. 동협문, 서협문 따위가 있다. 우리말샘

주29

집 안의 안채 앞에 있는 마당. 우리말샘

주30

사방, 상하를 덮거나 가리지 아니한 곳. 곧 집채의 바깥을 이른다. 우리말샘

주31

집 안의 칸이 막히지 아니하고 서로 통하여 하나로 된 것. 우리말샘

주32

집안의 웃어른이 거처하는 사랑. 우리말샘

주33

주로 아들이나 손자가 거처하는 사랑. 우리말샘

주34

기둥이나 벽 따위가 기울어지는 것을 받치거나 바로잡기 위하여 버티는 나무. 우리말샘

주35

사랑채 앞에 있는 마당. 우리말샘

주36

건물에서 기둥이 네 개인 문. 우리말샘

주37

기둥 밑에 괴는 돌 따위의 물건. ⇒규범 표기는 ‘주추’이다. 우리말샘

주38

어떤 물체 따위의 무게. 우리말샘

주39

한식 나무 구조 건물의 기둥 위에 건너질러 장여나 소로, 화반을 받는 가로재. 오량(五樑) 집에 모양을 내기 위하여 단다. 한자를 빌려 ‘昌枋’, ‘昌防’으로 적기도 한다. 우리말샘

주40

부재 머리가 다른 부재의 구멍이나 홈을 뚫고 내민 부분. 우리말샘

주41

길쭉한 토막, 상자, 구덩이 따위의 양쪽 머리 면. 우리말샘

주42

비스듬히 자름. 우리말샘

주43

두공, 첨차, 한대, 제공, 장여, 화반 따위를 받치는 네모진 나무. 우리말샘

주44

서까래를 받치기 위하여 기둥 위에 건너지르는 나무. 우리말샘

주45

일정한 곳에 머물러 사는 것과 관련하여 이루어진 문화. 우리말샘

주46

정면, 측면 따위에서 수평으로 본 모양. 우리말샘

집필자
정연상(안동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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