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하회마을 ( 마을)

주생활
유적
국가유산
고려 말, 풍산류씨가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에 조성한 씨족 마을.
이칭
약칭
하회 마을
유적
건립 시기
고려 말
관련 국가
고려|조선
관련 인물
류운용|류성룡
면적
1,577필지/6,495,535㎡
소재지
경상북도 안동시
국가지정문화재
지정 명칭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국가유산청 국가민속문화유산(1984년 1월 10일 지정)
소재지
경상북도 안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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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안동 하회마을은 고려 말 풍산류씨가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에 조성한 씨족 마을이다. 고려 말 전서공 류종혜가 입향 이후 임암 류중영과 두 아들 겸암 류운룡, 서애 류성룡에 이르러 번성하게 되었다. 사면이 경사진 곳에 마을 길과 가옥의 자리를 조성했는데, 마을 입구에서 양진당, 충효당으로 통하는 중심 안길에서 사방으로 뻗어 있으며, 마을은 중심 안길을 경계로 북촌 지역과 남촌 지역으로 나뉜다. 이 마을은 주생활 공간, 의식 공간, 생산 활동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특히 민속 신앙 관련 시설이 잘 보존, 전승되고 있다.

정의
고려 말, 풍산류씨가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에 조성한 씨족 마을.
건립 경위

하회 마을은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에서 풍산류씨(豐山柳氏)가 터를 잡고 살아 온 씨족 마을이다. 하회 마을은 풍산류씨가 터를 잡기 전 허씨(許氏)와 안씨(安氏) 등이 살아왔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기록에 따르면 1635년(인조 13)에는 류씨(柳氏)가 가장 많이 살았다고 한다. 하회 마을의 풍산류씨는 고려 말 8세 전서공(典書公) 류종혜(柳從惠)가 터를 잡으면서 시작되었으며, 이후 입암(立巖) 류중영(柳仲郢, 15151573)과 두 아들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 15391601)과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에 이르러 마을이 대외적으로 번성하게 되었다. 류운룡은 풍산류씨 14세손이며, 류성룡은 류운룡의 동생으로 지손(支孫)인데, 이후 하회 마을의 후손들은 크게 안동 하회 양진당(養眞堂)을 중심으로 한 겸암파(謙菴派)와 안동 하회 충효당(忠孝堂)을 중심으로 한 서애파(西厓派) 풍산류씨로 나뉜다.

변천

하회 마을은 풍산류씨 민속 마을로 1984년 1월 10일 국가민속문화재(현, 국가민속문화유산)가 되었다. 마을에는 국가유산으로 지정된 양진당과 충효당, 안동 하회마을 화경당 고택, 안동 하회마을 원지정사(遠志精舍), 안동 하회마을 빈연정사(賓淵精舍), 안동 하회마을 작천고택(鵲泉古宅), 안동 하회마을 옥연정사(玉淵精舍), 안동 하회마을 겸암정사(謙菴精舍), 안동 하회마을 염행당 고택, 안동 하회마을 양오당고택 등이 있고, 지정 문화유산 외에 토담집 구조의 민가 같은 것이 있다. 그리고 마을에는 민속 문화와 관련있는 하회 선유 줄불놀이와 하회 별신굿이 행해지고 있는데, 하회 별신굿에 쓰였던 안동 하회탈 및 병산탈은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되어 국보로 지정되어 있고, 1984년 하회탈 전수관이 신축되었다. 하회 마을은 역사 문화 경관을 고려하여 1980년대 후반부터 전화 및 전기, 소방 시설 지중화 사업을 시행하였고, 1919년 개교한 풍남국민학교를 1991년에 폐교시킨 후 1999년에 철거하였다. 하회마을은 2010년 8월 1일 경주 양동마을과 함께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국내외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하회 마을의 주산(主山)인 화산이 마을의 동쪽의 농경지 너머에 있으므로 하회 마을의 토지 이용은 일반적인 전통 마을과 달리 농경지가 화산과 마을을 연결하고 있다.1981년 강변 제방 공사와, 그 이후에 실시한 농지 정리로 마을의 경관이 바뀌었다.

형태와 특징

안동 하회마을은 마을의 주산인 화산 자락을 화천이 휘돌아 나가면서 생성된 지형에서 마을 이름 ‘하회(河回)’가 유래하였다. 하회 마을의 형국은 주변의 산과 화천이 감싸 도는 형태가 태극과 같다 하여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이라 하며, 또는 마을이 물 위에 뜬 연꽃과 같다 하여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배가 물을 가르고 나는 형국이라 ‘행주형(行舟形)’이라고도 한다. 하회 마을은 동쪽을 제외한 남쪽, 북쪽, 서쪽 면이 화천 방향으로 경사져 있다. 화천은 물의 흐름에 따라 백사장이 펼쳐져 있고, 화천을 따라 부용대(芙蓉臺), 원지산(遠志山), 남산, 병산(屛山) 등의 산줄기가 겹겹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데, 부용대는 마을 북쪽에 있으면서 독특한 경관을 이루고 있다. 과거에 이 마을에 살았던 사람들은 주변의 자연과 건축물이 만들어 내는 경관 등을 보고 ‘하회 16경(河回十六景)’, ‘옥연 10경(玉淵十景)’, ‘병산 10절(屛山十節)’ 등을 지었다. ‘하회 16경’은 하회 마을 주변의 산수와 풍경의 아름다움을 보고 지은 시(詩)인데, 서애의 맏손자인 류원지(柳元之, 1598~1674)의 『졸재집(拙齋集)』에 수록되어 있다. 이후 이런 경관을 보고 여러 문인이 시문을 남겼다.

하회 마을의 지형은 하회 마을을 향한 지맥(地脈)이 화산에서 서쪽을 향한 산 능선을 따라 흐르며, 첫 능선 위에는 상당이 있고, 또 다른 남쪽 능선 끝자락에 하당이 있다. 그리고 마을의 지맥은 하당으로 지맥이 흐르는 남쪽 능선을 따라 흐른 후 농경지를 거쳐 마을 속으로 흐른다. 마을을 향한 지맥은 화산 끝자락에서 서쪽으로 가면서 낮아지다가 농경지를 지나 가옥이 있는 곳에 이르러서 다시 높아진다. 이 지맥은 마을을 지나면서 마을의 독특한 지형을 만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지맥의 주변에 고택과 삼신당(三神堂), 그리고 마을 길 등을 조성하였다. 즉, 하회 마을은 화산-농경지-주거지-화천 축 위에 마을 길과 가옥 등이 자리하고 있다.

마을의 고택들은 볼록한 중앙의 높은 곳에 터를 잡았기 때문에 경사 지형을 이용하여 각기 방향을 달리하면서 서로 다른 안대(案對)를 취하도록 하였다. 마을은 북서측 지형이 다른 곳보다 낮아 서북쪽의 화천 백사장에 만송정(萬松亭)이라고 불리는 소나무 방풍림(防風林)을 조성하였다. 만송정은 1만 그루가 소나무로 이루어진 소나무 숲을 말한다. 만송정은 류운룡이 원지산에서 부용대로 이어지는 경관과 마을 서측의, 허(虛)한 것에 대한 비보(裨補) 숲이면서 홍수 때 수해(水害)를 막아 주고 세찬 서북풍을 막는 방풍림이다. 또한 만송정은 마을과 부용대 사이에 위치하여 부용대의 깎아지른 듯한 암벽을 시각적으로 차단하여 완충 공간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안동 하회마을은 기본적으로 주생활 공간인 종택(宗宅) 및 가옥, 의식 공간인 상 · 중 · 하당, 주변의 자연 경관인 화산, 화천(낙동강), 만송정, 부용대, 생산 활동 공간, 농경지로 구성되어 있다. 하회 마을의 주된 생활 공간은 마을의 진입 축과 지형의 축과 다르며, 북동쪽에서 진입하고 북동쪽에서 서남쪽으로 난 중심 안길에 의하여 북촌 지역과 남촌 지역으로 나뉜다. 중심 안길은 북촌 지역과 남촌 지역의 또 다른 안길 및 샛길과 연결되어 있다. 마을의 중심 안길 주변에는 초입부터 하회 보건소, 안동 하회마을 하동고택(河東古宅)안동 번남고택(樊南古宅), 상계종택(上溪宗宅), 귀촌종택(龜村宗宅), 양진당, 충효당, 안동 하회마을 작천고택 등이 있다. 남촌 지역에는 마을의 중심 안길에서 남측으로 난 안길 주변에 양오당, 염행당 등이 있고, 북촌 지역에는 북측으로 난 안길 주변에 화경당 및 삼신당 등이 있다. 이 건물은 지맥의 흐름으로 형성된 나지막한 능선으로 생긴 경사면에 터를 잡고 방향을 달리하였다. 마을의 반가(班家)는 ㅁ자 평면으로 영남 지방 와가의 특징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은 평면은 산지로 둘러싸여 연중 기온차가 심한 대륙성 기후로 인한 것과, 낙향(落鄕)한 사대부(士大夫)들의 계층적 우위성을 나타내기 위한 요구가 반영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서민의 초가는 유교 의례 같은 인문적 요인의 영향보다 생활과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기후나 지형 등의 자연적 요인에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하회 마을의 초가는 홑집형 초가보다 두 줄로 실이 배치된 겹집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하회 마을의 여칸집(까치구멍 집)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 규모의 여섯 칸 집으로 한 채의 건물 안에 안방, 건넌방, 마루, 부엌 등이 집약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마을의 의식 공간은 풍산류씨의 가치관과 자연관, 의식 세계를 엿볼 수 있는 누정(樓亭) 공간과 서원(書院) 공간, 민속 신앙 공간으로 나뉜다. 누정 건축과 서원 건축은 주변 지형이 만들어 낸 자연 경관을 이용하여 독특한 건축 공간을 구현하였다. 하회 마을의 누정은 겸암정사, 빈연정사, 원지정사, 옥연정사가 있으며, 서원은 화천서원(花川書院)과 병산서원(屛山書院)이 있다. 이들 공간은 주변을 감싸고 있고 산과 화천, 그리고 강변 만송정과 마을의 건물, 멀리 화산이 만들어낸 외부의 경관을 받아들이게 되어 있다. 마을의 민속 관련 동제(洞祭)는 매년 정월 대보름과 4월 초파일에 행하는데, 정월 대보름 밤 상당(上堂)과 중당(中堂)에서 동제를 지내고, 다음 날 아침 삼신당에 제(祭)를 올린다. 상당은 ‘서낭당 김씨 할매’라고도 부르는데, 하회의 터주로서 하회 별신굿의 신앙 대상이기도 하다. 서낭당이 온전하게 남아 있고, 수백 년 전의 제의적 전통에 따라 동제가 이루어지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중당은 국사당으로 서낭당에 오르는 화산 기슭 오른편에 있다. 삼신당은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수령이 600년 이상 된 느티나무이다. 상당(서낭당)은 1칸 규모로, 화산에서 마을로 흐르는 산 능선 위에 있으며, 중당도 단칸 규모로, 화산의 산자락과 농경지가 만나는 곳에 있다. 하회 마을의 생산 활동 공간인 농경지는 마을 내 부또는 인근에 있는데, 하회 마을의 토지 이용은 일반적인 전통 마을과 달리 농경지가 마을의 주산인 화산과 마을 사이에 있다. 마을 동측의 농경지는 농지 정리를 하여 바둑판 모양을 하고 있는데, 현재 농경지는 단순히 마을의 먹거리를 제공하는 농경지일 뿐만 아니라 마을의 경관을 꾸미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의의 및 평가

안동 하회마을은 고려 말 전서 류종혜가 터를 잡으면서 풍산류씨의 씨족 마을로 시작되었고, 훌륭한 여러 인물을 배출하여 번창하였다. 이 마을은 화산 끝자락의 지맥이 서쪽 화천으로 흐르는 지맥 위에, 화천이 마을의 삼면을 감싸 흐르는 곳에 터를 잡아 마을의 차별화된 자연 경관을 갖고 있다. 마을은 주생활 공간 및 의식 공간, 생산 활동 공간이 잘 보존 · 유지 · 관리되어 건축사적으로 학술적 가치가 높으며, 민속 문화에 관련 공간 및 무형적 요소가 잘 보존 · 전승되고 있어 인문학적 가치가 높다. 따라서 하회마을은 조선시대 유교 사회의 특징적인 정주 형식인 씨족 마을이자 가장 완전하고 대표적인 마을로서 유교적 가치관, 자연과 건축의 관계 및 상호 작용을 예술뿐만 아니라 기술적으로도 탁월하게 반영하여 한국의 전통 문화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참고문헌

단행본

이상해, 『전통 역사 마을 하회』(문화재청, 2010)
문화재청, 『세계문화유산 등재 보고서』(2009)
안동시, 『안동 하회마을 종합정비계획 보완 용역』(2017)
안동시, 『안동 하회마을 조사 보고서』(2001)

인터넷 자료

국가유산청 국가문화유산포털(https://www.heritage.go.kr)
집필자
정연상(안동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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