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름은 지주로부터 소작지의 관리를 위임받은 관리인이다. 보통은 양반이나 관료 등의 지주가 자신에게 신분적으로 예속된 노비나 고공·비부를 활용하여 직접 소작인을 관리했다. 조선 후기에 중앙관료나 지방관리들이 부재지주로서 대토지를 소유하게 되면서 현지에 거주하면서 추수기의 작황을 조사하고 소작료를 거두어 상납해줄 관리인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마름은 주어진 권한을 넘어 농촌에서 전횡을 일삼는 폐해를 낳기도 했다. 전근대적인 토지소유와 부재지주를 기반으로 탄생한 소작제의 하급 토지관리자였으나 해방 후 농지개혁법의 시행으로 소멸되었다.
조선시대부터 소작제를 통한 토지 경영방식은 지주가 직접 소작인을 관리하거나, 일정한 대리 감독인을 두어 간접적으로 관리하는 두 가지의 방법이 있었다. 전자는 주로 중소 지주가 본인 또는 가족의 힘만으로 그 관리를 수행할 수 있는 경우이고, 후자는 멀리 떨어진 곳에 토지를 가진 중소 지주와 여러 곳에 많은 토지를 가진 대지주가 직접 관리를 하기 어렵기 때문에 채택하는 방법이었다. 마름은 후자의 경우에서 발견되는 부재지주의 대리감독인으로서, 지주의 토지가 있는 현지에 거주하면서 추수기의 작황을 조사하고, 직접 각 소작인으로부터 소작료를 거둬들여 일괄해서 지주에게 상납하는 것을 주된 직무로 하였다.
사음(舍音)이라는 용어는 주로 삼남지방(경상도 · 전라도 · 충청도)에서 사용하였는데, 함경도 일대에서는 농막 또는 농막 주인이라는 용어로 쓰이기도 한다. 농막은 창고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러한 용어로 사용된 것은 수령한 소작료가 지주에게 전달되기 전, 잠시 지주의 대리감독인의 집에 보관되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마름은 지주의 대리인으로서, 소작인의 생산 활동에 직접 개입하는 일은 드물지만, 추수기의 소작료 징수만이 아니라, 소작권의 박탈, 작황, 소작인의 평가 등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마름은 추수기에만 파견되기도 하기 때문에 추수원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마름을 별도로 두지 않고 소작인 가운데 한 사람을 뽑아 다른 소작지의 관리까지 그에게 맡기고 필요할 때마다 임시대리인을 파견하는 일도 있었다. 그래서 평안도 지역에서는 마름이라는 용어 대신 수작인(首作人) · 대택인(大宅人)이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다.
마름과 비슷한 토지 관리인은 지난날과 같이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에서, 중앙관료나 지방관리들이 부재지주로서 농촌에 많은 토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존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시대에 따라 그 신분적 위치나 소임에도 다소의 차이가 있었다.
마름과 같은 전문적인 토지관리인이 등장하기 이전에는, 대개 토지의 주인인 양반이나 관료 등에게 신분적으로 예속되어 있는 노비나 고공(雇工) · 비부(婢夫) 등이 마름의 구실을 하면서, 직접 생산활동에도 종사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오면서 일부 특권층에 한해 토지관리인을 현지에서 구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또한 17세기 중엽 이후 궁장토(宮庄土)의 규모가 크게 확대되면서, 이를 관리하고 조세의 징수를 맡은 도장(導掌)과 그의 지시를 받는 감관(監官) 및 최하급 장토 관리자(莊土管理者)인 마름이 설치되었다. 마름의 주된 임무는 궁궐의 책임자인 궁차(宮差)나 도장이 소작료 징수를 위해 방문하였을 때 추검(秋檢)을 통해 작황을 조사하고 소작료를 수집하여 제공하는 것이었다. 또 추수 때 서역(書役)과 제반 동역(洞役)을 담당하고, 감관과 더불어 전호(佃戶)를 통솔하여 수리공사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궁장토(宮庄土)는 19세기 말엽 이후 대부분 폐지되었지만, 지주제의 발전과 더불어 마름은 궁장토가 아닌 일반 부재(不在) 지주의 소작관리인으로도 널리 이용되는 경향을 보였다. 궁장토는 주로 남한지역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마름(사음)이라는 용어가 남한지역에서 많이 사용되는 것은 이러한 역사적 원인과 관계가 있었다.
한편 일제에 의해 실시된 토지조사 사업을 통해 일본인 지주를 포함한 많은 부재지주가 발생하고, 그 반면에 토지를 잃은 대규모의 소작농이 상대적으로 급증하면서 마름의 존재와 그 필요성이 더욱 크게 부각되었다.
부재지주의 소유 농토가 대규모일 경우에는 마름제도도 계층적으로 편성되어 도마름(都舍音) · 마름 · 하마름(下舍音) 등으로 나누어진다. 도마름은 부재지주의 총대리인으로 마름과 하마름에 대한 감독과 이들의 불법행위에 대한 책임을 진다. 또한 부재지주의 소유지가 더욱 대규모일 경우에는 마름 계층을 총감독하는 차택(差宅)이나 채비군(採備軍)을 두어 지주를 직접 대리하게 하는 일도 있었다. 따라서 마름은 대개 어느 정도의 재산과 문필력을 가진 사람으로서 농사일에 정통하고 소유 경지의 인근에 거주하며, 친척 등 지주와 일정한 사회관계를 가진 자가 많았다.
마름의 인원은 1, 2개의 군에 한 명을 두거나 아니면 약 50두락(斗落) 내외의 소작지에 한 명을 두는 등, 토지의 면적과 위치 그리고 상황에 따라 일정하지 않았다. 일제식민지 시기에 마름 한 명이 담당하던 경지면적은 17 정보 내지 50정보가 일반적이었으며, 그의 통제를 받는 소작인은 10호 내지 74호에 이르렀다. 그러나 대지주에게 고용된 도마름의 경우는 70정보 내지 500정보의 대규모 경작지를 관리하고, 35호 내지 400호에 달하는 소작인을 거느렸다. 당시 전국에 산재해 있던 마름의 총수는 약 1만 9,000호 정도였는데 그 가운데 약 500여 호만이 이북에 있었고, 나머지 절대 다수가 남부지방에 존재하였다. 이는 부재지주 또는 그 소유경지가 대부분 남부지방에 집중되어 있었고, 영세소작인도 거의 이 지역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마름의 기능은 소작인을 선정하거나 변경하고, 작황을 조사하여 소작료를 확정한 뒤 소작료를 징수, 보관하는 일이다. 특히 병작제의 경우 다음 해를 위한 종자를 보관하는 일을 했다. 그리고 도지법의 경우는 미납된 소작료를 적극 독촉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보수로 토지의 면적과 수확물의 분량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대개 지주로부터 소작료의 5%를, 20두락의 경지라면 1두락에 해당되는 무료소작지와 벼 한가마니 정도를 제공받았다. 또한 소작인에게도 1 석(石)당 5 승(升) 정도씩, 즉 소작인 취득분의 약 5%에 해당하는 벼를 관례적으로 징수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작황을 조사할 때 풍작인데도 재해 때문에 손해를 입었다고 보고하거나, 소작료를 징수할 때 두량(斗量)을 다르게 하거나, 소작료의 시세를 속이는 방법으로 지주와 소작인을 기만하여 그 차액을 횡령하고 부당이득을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소작인에 대해서는 소작료를 임의로 높이고 찬사물(饌謝物) · 접대비 · 계미(鷄米) · 가도지(加賭只) 등의 명목으로 초과 징수하였으며, 심지어는 여러 가지 구실로 강제노역까지 부과하였다. 그리고 소작인을 선정하거나 변경하는 권한을 남용하여 소작인을 임의로 교체시키거나, 무고한 소작인을 농지에서 내쫓고 그 경작권을 다른 사람에게 팔기도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고리대금업까지 겸해 춘궁기 등에 곤경에 처한 소작인에게 식량이나 금전을 빌려주고 고리의 원리금을 수탈하기도 하였다.
마름은 전근대적 토지 소유, 그 가운데서도 특히 부재지주를 중심으로 발생하였으며, 지주제도를 이용한 하급 토지 관리자였다. 그러나 지주의 대리인으로서 실제 농촌에서 소작농에게는 권한을 넘어서는 전횡을 할 수 있었다. 이 제도는 해방 이후 기생지주제의 폐지를 목적으로 한 농지개혁법의 시행으로 소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