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升)으로도 표기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이미 이러한 도량형 제도가 제정되어 이용되어왔음이 밝혀지고 있다.
중국 상고 때의 제도를 보면, 선사시대인들은 장년남자의 두 손을 모아 거기에 담기는 곡물량을 1승이라 하였는데, 이것을 1국(掬)이라고도 하였다. 이 분량을 부피의 기준량으로 하고, 그것의 10배를 1두(斗), 100배를 1석(石)이라 하였다. 당시 1되의 용적은 313.6㎤ 정도였으며, 그 양기(量器)의 용적은 길이가 약 23.235㎝인 양기척(量器尺)으로 25입방촌(立方寸)이 되어 있었다.
이러한 표준량이 춘추전국시대 제(齊)나라에서 100:64의 비율로 양제개혁(量制改革)이 되어 1승 양은 205.5㎤로 되었는데, 이 제도를 진(秦)나라의 상앙(商鞅)이 도입하여 시황을 거쳐 한나라의 표준 1승 용적이 되었다. 그러나 남북조(南北朝) 때 1승 양은 크게 늘어나 당나라 때는 한나라 1승 양의 3배로 변해졌다.
우리나라도 상고 때는 장년 농부의 양손을 모아 담긴 양을 1되 또는 1승이라 하였다. 그 뒤 1되의 양은 198.8㎤로 개혁되어 있었다. 따라서 상고 때 1되는 약 300㎤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표준량 제도는 신라 문무왕 21년(681)에 당나라 제도에 따라 3배량으로 개혁되었을 것으로 추측되어 이때부터 1되는 596.4㎤가 되어 고려 문종 때까지 전하여진다.
고려의 문종은 1052년 종래의 단일량제(單一量制)를 개혁하여 4종의 제가이량기제도(齊價異量器制度)로 개혁하였는데, 이 때 구1승 양은 미곡용(米穀用) 1승으로 하고, 나머지 3종의 되의 용적은 미곡승:대소두승:말장승:비조곡승의 비율이 1.00:0.750:1.555:1.765가 되게 바뀌었다.
이것이 다시 1446년(세종 28)에는 단일량기제도로 바뀌면서 1되의 용적은 옛 1되인 596.4㎤가 되었다. 이러한 1되 양의 작은 변화는 계속되었으나 큰 변화는 없었는데, 1902년에 일본의 1승 양이 쓰이고부터는 우리의 옛 전통의 1승 용적표준은 없어졌다. 현재는 미터법으로 약 2ℓ(1.8039ℓ)를 1되로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