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조 때 호조참의를 지낸 실학의 선구자인 한백겸(韓百謙)의 『기전유고(箕田遺稿)』에, 기자가 건설한 평양성의 외성(外城)에는 정전제도(井田制度)에 따라 구획된 유적이 있다는 『고려사』 지리지의 기록에 근거하여 그가 직접 실지(實地)를 측량하여 연구해 둔 기록이 있다.
그 기록에 의하면 기전의 할지법(割地法)은 땅을 전자형(田字形)이 되게 정방형으로 4등분했으며 그 4등분로(四等分路)의 넓이는 1묘(畝)이고, 1묘로서 4등분된 1구(區)의 넓이는 은전(殷田)의 칠십묘(七十畝)에 해당되며, 4구를 1전(田)이라 한다면 삼묘로(三畝路)를 사이에 두고 사방으로 사전씩이 정방형이 되게 만들어졌음이 정전제도와는 다른 은전제도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다른 선학들은 이것은 은전이 아니고 길이 36㎝ 척도로 사방이 500척, 넓은 길은 3묘로 45척, 좁은 길은 1묘로 15척이 되게 할지된 도성(都城)이라 하였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길이가 35.51㎝인 척도로서 6척 4촌을 1간(竿)으로 한 사방 80칸의 정방형으로 계획, 할지한 은전제도로 밝혀졌다.
여기서 얻게 된 35.51㎝ 길이의 척도는 바로 고구려·신라·고려에서 관척(官尺)으로 사용하던 소위 고구려척(高句麗尺)임도 증명되었다. 따라서 기전을 할지하는 데 사용된 척도라 하여 이것을 기전척(箕田尺)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러한 기전척은 우리나라에서 밝혀진 가장 오랜 척도이며 고구려척은 기전척의 전승척(傳承尺)임이 밝혀진 것이다. 이와 똑같은 척도는 중국 산동성의 은전측량에서도 발견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불국사 다보탑이 이 척도로써 건조되었음도 밝혀졌다.
이 척도는 일본에 건너가 법륭사(法隆寺)를 건축하는 데 사용되었음도 밝혀지고 있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이 척도는 바로 중국 은나라 양전척(量田尺)과도 일치하고 있어 중국 은나라 제도연구에도 크게 도움을 줄 것이 예상되는 중요한 척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