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의 부엌은 음식물을 만들고 저장하는 시설을 갖추고 있는 동시에 방의 온도를 조절해주는 기능을 가진다. 이와 같이 부엌이 주거의 난방을 담당하게 되는 것은 우리 나라의 자연 조건과 문화조류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부엌의 발생은 불의 발명과 불을 이용하려는 의도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 확실한 주거지가 발견되는 것은 신석기시대로 동굴 주거지와 수혈 주거지가 발견된다. 동굴 주거지에서도 불을 땐 자리가 발견되고는 있으나 그 형태, 위치에는 뚜렷한 특징이 없고, 수혈주거지에서는 수혈의 중앙에서 화덕이 발견되고 있다. 이 화덕의 주변이 부엌의 구실을 한 곳으로, 부엌의 시원으로 볼 수 있다.
신석기시대의 주거지에서 발견되는 화덕터는 거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데 바닥을 15㎝ 정도 판 장경(長徑) 1m 내외의 타원형이다. 불자리 주위는 돌을 둘러쌓거나 진흙을 둑처럼 둘러쌓았다. 노의 가장자리에는 항아리의 밑을 잘라 거꾸로 묻은 저장공이 있는데 그 속에서 곡물이나 작은 취사도구 등이 출토되고 있다.
따라서 이 시대에는 부엌공간과 주거공간이 하나로 된 형태로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철기시대부터는 가운데에 있던 화덕이 한쪽으로 비켜나게 된다. 이것은 부엌의 형성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고대 상류주택의 부엌구조는 고구려 고분벽화인 안악3호분에서 볼 수 있다. 이 벽화는 한 여자가 부뚜막의 화구(火口) 앞에서 불을 지피고 있다.
또 한 여자는 부뚜막에서 국자로 솥을 젓고 있으며, 건물 외벽에는 을자형(乙字形)의 굴뚝이 설치되어 있는 등 부엌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그림이다. 부엌을 비롯하여 창고·차고·마구간·외양간 등이 별동(別棟)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것으로 미루어 궁궐 및 상류주택의 부엌은 방의 난방과는 무관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이 벽화는 부엌공간이 완전한 기능을 가진 독립공간으로 정착하였음을 보여준다.
중국 ≪신당서 新唐書≫ 동이전 고구려조에 “천민들은 겨울에 구들을 만들어 따뜻하게 지낸다.”라는 구절로 미루어 서민계급 이하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온돌을 사용한 부엌의 시작은 날씨가 추운 함경도지방에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 지역에서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는 부엌의 구조로 보아 가장 원시적인 부엌구조의 형태를 보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온돌양식이 남쪽으로 전해지면서 부엌의 구조도 지역에 따라 다르게 발달되어왔다. 함경도지방의 부엌은 다른 지방과 비교하여 그 면적이 넓으며 부엌과 인접한 田자형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부뚜막이 확장된 것과 유사한 온돌구조로서 부엌과 장지 사이에는 벽체가 없이 부엌 쪽으로 개방되어 있다.
대개 4칸의 부엌면적에서 2칸은 지면에서 2척쯤 높게 하여 온돌로 되어 있는데 이를 정주간이라 한다. 이 정주간에는 2개의 문이 있어서 온돌방과 직접 통하게 되어 있다. 한쪽에는 아궁이가 있어서 불을 지피면 정주간은 물론 4개의 방이 모두 덥혀지게 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는 추운 지방에서 열손실을 줄이기 위하여 발달된 특이한 구조라 할 수 있다.
영동지방과 황해도 일부에서는 이와 같은 북부형 부엌구조가 변형되어, 부엌 옆의 장지가 없어진 대신 부엌과 통하게 된 봉당(封堂)이라는 공간이 있다. 이것은 부엌의 기능을 확대시킨 공간으로 바닥이 흙바닥으로 되어 있다.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중부지방은 ㄱ자·ㄷ자·ㅁ자형 주택의 꺾인 곳에 위치한다.
남부지방은 부엌·안방·마루·건넌방이 모두 한 줄로 배열된다. 제주도지방은 남부형과 비슷한 一자형으로 차이점은 안방과 건넌방 뒤에 폭이 좁은 고방 또는 광들이 부설되며 그 가운데에 마루방이 놓이게 된다. 마루방이 없는 규모가 작은 주택의 경우는 田자형으로 북부형과 비슷한 구조이다.
이와 같이 우리 나라의 부엌구조는 취사와 난방을 겸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온돌구조를 이루고 있어서 지표보다 60∼90㎝ 정도 낮은 흙바닥이 일반적이다. 주거에서의 부엌은 가족의 식생활을 담당하는 중요한 장소로서 여성생활의 중심이 되는 안채나 여주인의 생활공간인 안방과 직접적으로 인접하여 있다.
우리 나라 주거에서 부엌은 다른 공간에 비해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농경을 위주로 한 생활양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땔감과 부식류 저장을 위해서 안쪽으로는 나뭇광을 두어 장작이나 나뭇가지 또는 볏짚 등을 쌓아둔다. 또 다른 한쪽에는 부식류(감자·고구마·옥수수 등)를 보관할 수 있게 하였다.
그밖에 커다란 오지독을 두어서 식수용 물독으로 사용하였다. 부뚜막의 좌우에는 선반을 매달거나 찬탁(饌卓 : 반찬을 얹어놓는 긴 탁자)을 놓아 식기류나 반찬들을 보관하였다. 부엌 가까이에는 조리를 돕기 위한 곳으로 음식물의 세척을 위한 우물과 저장음식을 두는 장독대가 필수적으로 놓여 있다.
지역에 따라 그 기능의 차이는 있겠으나 부엌의 옆에는 음식물의 준비나 보관을 위한 작은 방인 찬간·찬방·과방(果房)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북부지방 부엌의 특색인 정주간, 봉당에서 발달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부엌은 안방과 인접된 여주인의 관할 장소로 안방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작은 문이 있다.
이는 음식물의 빠른 운반과 여주인이 아랫사람을 감시하기 위한 구실을 하기도 한다. 부엌에는 안마당과 뒷마당으로 통하는 문이 2개 있어서 서로 통하게 되어 있으며, 벽면에는 환기와 채광을 위한 빗살창이 있다. 한편 부엌문의 위치는 대문과 마주보는 것을 피하였으며 대청과 방의 양편으로 부엌을 설치하는 것은 재앙이 있다고 피하였다. 또 부엌 아궁이가 변소나 대문을 마주하는 것도 금하였다.
상류주택이나 궁궐에서는 부엌이 딴 채로 구성되기도 한다. 이것을 반빗간이라 부르는데 안악3호분의 부엌시설도 반빗간이라 볼 수 있다. 조선 말기에 건축된 창덕궁 금원(禁園) 안의 연경당 안채는 부엌이 있는 자리에 함실아궁이로 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반빗간이 독립될 때 이루어지는 안채의 모습이다.
이 주택에서의 반빗간은 안채 뒤에 따로 쌓은 담장 속에 건축되어 있다. 이것의 평면은 ㄱ자 모양으로 ㄱ자로 꺾인 곳에 솥을 걸었던 부엌간이 있고 이의 양쪽에 광이 자리잡고 있다. 광의 오른쪽으로는 5칸의 우물마루로 된 대청이 있다. 반빗간에는 그릇들을 보관하는 식탁, 반찬을 보관하는 찬장 및 찬탁, 곡식을 담아두는 뒤주, 각종 소반들을 보관하여 둔다.
또 가까이에는 장독대를 만들고 여러 가지 종류의 장을 담아두는 크고 작은 독과 항아리를 얹어둔다. 궁궐에서는 반빗간이 모두 독립되어 건축되는 데 이것을 소주방이라 부른다. 조선시대 중기의 공궤도(供饋圖) 등에서도 대가댁의 반빗간 형상을 볼 수 있고, 또한 큰 절의 후원에 반빗간을 두고 대중공양하는 관습은 지금도 찾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