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비평 ()

현대문학
개념
문학에 관한 지적 논의와 해석 · 평가의 활동을 가리키는 국문학용어. 문예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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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문학에 관한 지적 논의와 해석 · 평가의 활동을 가리키는 국문학용어. 문예평론.
서설

이러한 활동을 총괄하여 문학비평이라 할 때, 그것은 일단 창작 행위의 결과인 문학작품보다 시간적으로 뒤에 놓여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문학이 가장 원초적인 형태의 감정 표현이나 집단적 체험의 무의식적 표출이라는 수준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 의식적 동기를 포함하게 되면서부터는 비평적 노력이 창작 활동 자체에 관여하며 작품 생성의 의식적 인소(因素)가 된다.

그러한 뜻에서 문학이 있는 곳에 문학에 관한 의식, 곧 비평이 있다는 일반화가 가능하다. 다만, 우리 문학사의 초기 단계의 문학비평은 문헌기록의 부족으로 인하여 자세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단편적인 자료를 통해서나마 문학에 관한 인식의 일부를 미루어 살펴볼 수 있는 것은 대략 1세기 무렵 이후의 일이다. 그리고 그나마 자료들도 아주 적어서 우리 나라의 문학비평은 10세기 이전의 시기에서 간추려낼 만한 것이 넉넉지 않다는 아쉬움이 있다.

한국 문학비평을 총체적으로 정리하는 데 유의하여야 할 또 하나의 사항은 흔히 고전비평이라고 불리는 19세기까지의 비평이 거의 한문으로 되어 있으며, 그 대부분은 한문문학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라는 점이다.

이와 같은 사정은 당시의 역사적·문화적 조건 아래 불가피한 것이었으나, 이로 말미암아 문학비평의 영역과 문제가 한문학에 집중되었는 경향이 나타났다.

반면 국문학은 17세기까지 문학비평에서 산발적으로 언급되다가 18세기 무렵부터 비교적 활발하게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서도 우리 문학에 있어서 고전비평과 현대비평은 오랫동안 서로 별개의 것으로 단절된 듯이 여겨져왔다.

아울러 고전비평은 중국비평의 전례(典例)에, 현대비평은 서구 문학이론의 압도적인 영향에 의지하여 발전할 수 있었던 것처럼 여기는 이식·영향사관(移植影響史觀)이 이러한 통념과 결합되기도 하였다.

물론, 우리 문학비평이 19세기 말, 20세기 초를 고비로 하여 심각한 갈등과 변모를 보였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고전비평과 현대비평이 각기 동아시아 문학사상의 전통과 서구 근대문학 이론에 적지 않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도 마땅히 인정하고 해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이 모든 사항에도 불구하고 문학비평이 한 문화집단의 창작적 실천과 뗄 수 없는 관련을 지닌 의식의 소산인 한, 어떠한 시대적 갈등과 단층에도 불구하고 그 전체를 꿰뚫어 흐르는 문제의 연속은 존재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각 시대마다 문학사적 맥락에서 스스로의 논리를 개척하려는 요구, 또는 외래적 영향을 흡수하는 데 작용한 주체에 대한 요구가 없을 수 없다.

이와 같은 점들이 비평이론 및 비평사 연구의 구체적 성과로 충실히 해명되려면 아직도 많은 연구가 필요하나, 지금까지의 성과를 집약, 정리하여 한국 문학비평의 역사적 전개양상을 개관하기로 한다.

한국비평의 기원

한국 문학사의 초기 단계에 있어서 문학비평이 어떠하였는가는 자료의 부족으로 인하여 알기 어렵다. 그러나 현재 전하는 상고시대의 한역(漢譯) 노래와 그에 딸린 설화에 의하여 당시의 사람들이 가졌던 문학에 대한 인식의 윤곽을 간접적인 방법으로 짐작해볼 수 있다.

현재 전하는 작품 중 가장 오랜 시가인 <공무도하가 公無渡河歌>와 <황조가 黃鳥歌>는 이미 서정시 성격이 뚜렷하다. 그리고 이들 노래에 딸린 산문 기록들은 노래가 지어진 동기와 분위기를 설명하고 있다. 그 가운데 시가의 정서적 표현기능에 대한 원초적 이해가 당시에 이미 형성되어 있었음을 보여 준다.

즉, 남편을 잃은 여인이 애끊는 심정을 노래하고 이를 전하여 들은 여인이 다시 그것을 음률에 실어 가창하였다든가, 사랑하는 여인을 찾지 못한 남성(琉璃王)이 의지할 길 없는 쓸쓸함을 노래로 읊조렸다는 이야기 속에, 시가를 내면적 정서의 표출로 여기는 관점이 엿보인다. 물론 아직 선명히 논리화되지는 못하였다.

또한, <구지가 龜旨歌>와 그에 딸린 설화는 노래의 주술적 기능에 대한 믿음을 주요 인소로 포함하고 있어서, 당시의 사람들이 이 주술적 제의와 관련하여 시가의 신비적 힘을 믿었다는 것을 말하여 준다.

이들 상고의 시가는 모두 전설적 색채를 띤 것으로서, 내용상의 연대보다는 뒷시대에 속하는 사람들이 가졌던 의식을 반영한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위에 언급한 정도의 원초적 문학인식은 대체로 1세기 무렵에는 형성되어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신라의 향가에 이르러 우리 문학은 내용과 형식 양면에서 다양한 갈래를 갖추었고, 이에 관한 인식에도 진전이 있었음을 ≪삼국유사≫의 단편적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시가가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킬 만한 힘을 가진다는 믿음에 관련된 자료들이다.

순정공(純貞公)이 해룡에게 부인을 빼앗기자 사람들을 모아 <해가 海歌>를 부름으로써 수로부인을 되찾았다는 이야기는 노래의 내용에서 이미 <구지가>의 경우를 연상하게 하거니와, 혜성과 일본병을 물리친 융천사(融天師)의 <혜성가 彗星歌>, 잣나무가 시들도록 하는 원력(怨力)을 나타내어 효성왕을 뉘우치게 한 신충(信忠)의 <원가 怨歌> 등이 이에 해당된다.

또한 역신(疫神)의 침입을 물리친 <처용가 處容歌>, 그리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다가 그의 억울함을 호소하여 자연의 변화를 일으킨 왕거인(王居仁)의 노래 등이 그 사례로 제시될 수 있다.

이들 노래와 그에 딸린 설화는 모두 시가의 신비로운 힘에 관하여 말한 것인데, 그 밑바탕에는 노래로써 표현된 강렬한 소망·원망·정감과 의지가 커다란 호소의 힘을 발휘한다는 의식이 깔려 있다.

이와 같은 유형의 자료가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은 ≪삼국유사≫인데, 이는 신비하고 이상한 사건의 일화들을 많이 수록한 데 기인한다. 그러므로 당시의 문학의식 속에 시의 사회적·정치적 효용 및 정서적 표출과 달성의 기능에 관한 인식 또한 발달하여 있었음이 주목된다.

신라의 제3대 유리왕이 어진 정치를 펴서 백성이 즐겁고 편안해졌으므로 지었다는 <도솔가 兜率歌>와 경덕왕이 충담사(忠談師)에게 짓게 한 <안민가 安民歌>는 덕으로 다스리는 정치의 이상을 담은 노래이다. 이는 당시의 사람들이 신비적인 범주를 벗어나 사회적·정치적 윤리와 효용의 차원에서 시가를 인식하기도 하였음을 말하여 준다.

월명사(月明師)의 <도솔가>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한편, <황조가>와 <공무도하가>의 단계에서 실마리가 보인, 시의 정서적 표현기능에 대한 인식은 <제망매가 祭亡妹歌>의 경우처럼 종교적 기원과 갈구가 포함된 내면적 심화의 단계에까지 나아갔다.

사람의 마음에 담긴 절실한 체험과 욕구가 언어로써 표출되지 않을 수 없다는 인식은 ≪삼국유사≫ 경문왕조의 복두장(幞頭匠) 이야기에서처럼 상징성을 띤 설화의 형태로도 나타났다. 한편, 한문이 보급되고 한문학이 이루어지면서 이에 관한 비평도 싹텄으리라 여겨진다.

특히 신라 하대에 이르러 육두품(六頭品)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한학이 발달하면서 문학의식도 간서론적(諫書論的) 관념이나, 최치원(崔致遠)의 글에서 발견된다.

“시편으로써 성(性)을 기르는 자료를 삼고, 문장으로써 몸을 세우는 근본을 삼는다.”는 문학의 의의에 대한 인식은 이 시기의 문학론이 한문학의 성취를 바탕으로 유가적 이념을 소화하면서 보다 정비된 논리화의 단계로 나아갔음을 짐작하게 한다.

고려가 건국되면서 문학사에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한문학의 융성이다. 신라시대의 골품제를 철폐한 고려왕조는 중앙집권적 정치체제의 수립을 위한 방편으로 과거제를 채택하였고, 이에 따라 한문학이 크게 발달하게 되었다.

당시의 과거는 제술과(製述科)와 명경과(明經科)로 나뉘어 있었으나, 이 가운데서 제술업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였다.

따라서, 시(詩)와 문(文)의 능력은 관료로서의 입신과 처세에 필수적인 것이었으며, 신라 말기까지 육두품을 중심으로 한 소수 지식층의 범위에서 성장하여 온 한문학은 이 시기에 이르러 완전히 중세사회의 귀족과 지배층의 문학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한문학의 발달은 당연히 이에 상응하는 비평적 의식과 논의의 진전을 가져왔을 것이다. 하지만 고려 중엽까지의 문집과 문헌은 전하여지는 것이 드물어서 소상한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김부식(金富軾)의 경우로 미루어 본다면 당시의 지배적인 문학관은 변문류(騈文類 : 4자·6자의 대구를 많이 쓰는 한문체)의 문학을 실속은 없고 겉만 화려하다고 기피하고, 충실한 고문을 통하여 유가적 이념을 보여주는 데 두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고려시대의 문학론이 완전히 한문학에만 집중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균여(均如)의 <보현십원가 普賢十願歌>를 한역한 최행귀(崔行歸)는 한시와 향가가 각각의 특성과 가치를 지닌다고 하였으며, 일연(一然) 역시 향가를 시와 송(頌)에 견주어 중시하였다.

다만, 이와 같은 의식의 지속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문학론이 한문학에 치중되었다는 사실과, 이에 따라 동아시아의 중세적 보편문화를 지향하는 방향에서 비평적 인식의 심화가 이루어졌다는 의의는 인정하여 마땅하다.

고문을 받들어 숭상하고 유가적 이념을 내세우면서도 이를 뒷받침하는 철학적 사유(思惟)가 아직 철저하지 못하였던 고려 전기의 문학의식은 무신란을 고비로 하여 새로운 전환기에 접어들었다.

문인풍의 교양과 취미에 바탕을 두고 시·문의 세련미를 중시하던 문신과 귀족들이 물러나고, 보다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가치관을 가진 신흥 양반층이 등장하게 되면서 문학비평에서도 이에 따른 전환이 이루어졌다. 한편, 이 시기의 문학비평에서 주목되는 새로운 현상은 다수의 시화집이 출현한 일이다.

≪파한집 破閑集≫·≪보한집 補閑集≫·≪백운소설 白雲小說≫·≪역옹패설 櫟翁稗說≫ 등의 시화집은 시작품과 그에 따르는 시인에 관한 실제적 비평 및 일화와 기문(奇聞) 등을 함께 엮은 것으로서, 그 내용은 시에 관한 당시의 비평적 안목과 취미가 매우 다양하고 섬세한 경지에까지 도달하였음을 보여 준다.

고려 후기 비평의 주요 문제 중의 하나인 용사(用事)와 신의(新意)의 논란도 이러한 맥락에서 등장하였다. 이인로(李仁老)와 이규보(李奎報)를 각기 대표적 논자로 한 이 문제는, 용사와 신의가 서로 어느 하나를 부정하여야만 하는 배타적 개념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전시대의 문풍에 보다 깊이 관련된 이인로가 용사의 중요성을 많이 이야기한 데 비하여, 신진 선비들로서 문학 창작에 있어서 기(氣)를 중시하였던 이규보는 설의(設意)의 우선적 가치를 강조하였다.

이들보다 한 세기 이상 뒤의 인물인 이제현(李齊賢)은 전시대에 정립된 고문을 한층 더 의식적으로 다듬어 쓸 것을 주장하고, 문학은 인륜의 도를 추구하는 방편으로서 존재의의를 가진다는 성리학적 문학관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관점은 고려 말에 있어서 성리학 성장과 더불어 점차 확대되어, 이색(李穡) 및 그 문하의 인물들에게 이어지면서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 문학론의 근간을 형성하였다.

조선 전기(15,16세기)

고려 말에 기본 윤곽이 짜여진 성리학적 문학관은 유교를 통치이념의 근간으로 삼은 조선조에 들어와서 더욱 심화, 확대되었다. 그 대표적 논자인 정도전(鄭道傳)은 문학을 도를 싣는 그릇, 즉 재도지기(載道之器)로 파악하고, 시서예악(詩書禮樂)의 가르침에 충실한 시와 문을 최고의 표준으로 삼았다.

그에 의하면 이제현에 의하여 비로소 ‘고문의 학’이 창도되고, 이색에 의하여 성명도덕(性命道德)의 설이 밝게 전수됨으로써 올바른 문학의 길이 널리 열렸다고 한다.

사람은 나날의 모든 일에 있어서 마땅히 그 도를 다하여야 하는데, 이를 인식하고 실천할 수 있는 의리는 본디부터 사람에게 갖추어져 있으므로, 문학은 그것에 충실함으로써 우주와 사회의 마땅한 질서를 구현하는 데 기여하여야 한다는 것이 그의 근본 이론이었다.

이와 같은 문학론이 지배적인 위치를 유지하는 한편,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사대부층이 분화되면서 문장[詞章之文]의 의의를 중시하는 경향이 형성되었다.

도학과 함께 문장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권근(權近)의 견해에서 이미 그러한 실마리가 보였거니와, 조선왕조 건국 이후 사대부 사회가 집권사대부층과 재지사림(在地士林)으로 점차 뚜렷하게 나누어지면서 전자 가운데서 문장 중시론이 모습을 나타내었다.

문장을 중시한 문인들 역시 유자였으므로 도를 중시하는 기본 이념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문학의 형식·기교와 심미적 세련을 중시하는 그들의 취향은 비평의 실제적 관심에 있어서 서로 다른 성향으로 구체화되었다.

이러한 흐름을 대표하는 인물인 서거정(徐居正)은 20여 년 동안 문형(文衡)을 잡으면서 당대의 문풍을 주도하고, ≪동문선≫을 편찬하였으며, 순수 시화집인 ≪동인시화 東人詩話≫를 저술하였다.

그는 도가 문에 선행한다는 전통적 명제를 수용하면서도 문학은 사람의 말 가운데서 가장 빼어난 정화로서 경국의 성업에 빛나는 문채를 더하고 불후의 명성으로서 후세에 남길 만한 것이라고 하였다. 전거가 되는 고사(故事)의 능숙한 사용을 중요시한 용사론 역시 이러한 문학관의 소산이다.

일반적으로 사장파(詞章派)라 불리는 위의 조류가 관료적 문인들의 세계에 터를 두었던 반면에, 재지사림쪽에서는 이기(理氣)와 심성(心性)에 관한 성리학적 탐구와 근본주의적 정치철학이 발달하면서 도학적 문학이론이 심화되었다. 이것이 16세기에는 정연한 체계와 가치관 및 심미안을 지닌 비평의 조류로 등장하였다.

이황(李滉)과 이이(李珥)를 대표적 인물로 하는 이들 도학적 논자들은 ‘재도지문(載道之文)’, ‘도본문말(道本文末)’을 주장한 점에서 정도전 등 조선 초기의 문학론자들과 상통한다.

하지만 전시대의 논자들이 문장의 경세적 의의를 중시한 데 비하여, 그들은 성정의 도야를 추구하여 존심양성(存心養性)하는 내면적 의의를 보다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문장 중심의 문학 지향을 겉만 화려한 것이라 보아 ‘속유지문(俗儒之文)’이라 비판하고, 헛된 수식을 떠나 청정한 심성과 자연을 그리며, 물아(物我)의 합일을 추구하는 간담(簡淡)한 시, 충담소산(沖澹蕭散)한 시를 가장 값있는 것으로 평가하였다.

조선 후기(17~19세기)

조선조의 중세적 질서가 모순과 혼란에 당면하게 된 17세기 이후 문학비평에 있어서도 다른 부문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조류의 등장과 갈등이 나타났다. 그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우선적으로 주목되는 인물은 허균(許筠)이다.

그는 시를 진실한 정의 표현이라고 보아, 종래의 도학적 논자들이 주장한 바 ‘성정지정(性情之正)’의 윤리적 표준과는 다른 길을 택하였다. 그리고 시에 담긴 체험의 진정성보다 수식과 외관상의 미감에 치중하는 경향도 비판하였다.

또한, 문장의 본보기[典範]를 선진(先秦)·전한·후한에서 구하는 상고주의(尙古主義)·의고주의(擬古主義)를 모두 부인함으로써 조선 후기 문학비평의 새로운 관점을 열었다.

각 시대의 문학은 각기 그 시대마다 개성과 특징을 가지는 것으로, 시인 역시 어떠한 기성의 전범에 예속되어 모방만을 일삼을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과 창조적 개성에 근거하여야 한다는 것이 그의 비평의 핵심이었다.

17세기는 또한 정통적 성리학으로부터 이탈한 학문에 대한 관심이 대두하면서 문학비평에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끼쳤다. 장유(張維)와 홍만종(洪萬宗)은 각각 양명학과 도가사상에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 정주학적 사유(程朱學的思惟)의 틀을 벗어나는 문학적 지향을 논리화하였다.

장유는 도학적 규준으로부터 벗어나 문학의 심미적 가치를 존중하였으나, 사장파와는 달리 그것을 문학의 외형적 조건이나 기능에서 구하지 않고 작품 자체의 내면적 가치와 아름다움에서 구하였다. 홍만종은 문학의 본질과 가치를 논하면서 도덕적 규범과 외형적 수식을 모두 넘어선 ‘천득(天得)’을 강조하였다.

아울러 그는 역대의 시화 중에서 순수한 시화만을 집성하여 ≪시화총림 詩話叢林≫을 편찬함으로써 시화가 시평으로 정리되게 하였으며, 자신의 비평의식을 직접적으로 반영한 ≪소화시평 小華詩評≫을 저술하여 우리 한시에 대한 역사적 서술과 비평을 전개하였다.

김만중(金萬重)은 홍만종과 더불어 국문문학의 가치를 긍정적으로 파악함으로써 사대부층 일각의 의식 변화를 보였다.

특히, 한문으로 된 시와 부로 우리의 경험과 느낌을 표현한다는 것은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흉내내는 일과 마찬가지라고 한 김만중의 견해는 다음 단계의 국문문학 인식의 발전에 선구가 되었다.

한편, 조선조의 중세적 사회·문화질서가 동요하고 평민층의 문학 활동이 활발하여지자 시조집과 위항인(委巷人)들의 한시집이 엮어지면서 국문문학과 시정문학(市井文學)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전개된 점도 17세기 후반 이후의 중요한 현상이다.

18세기 초 ≪청구영언≫을 엮어낸 김천택(金天澤), 이에 서(序)와 발을 쓴 정윤경(鄭潤卿)과 마악노초(磨嶽老樵), ≪해동가요≫의 편찬자 김수장(金壽長), ≪대동풍요서 大東風謠序≫를 쓴 홍대용(洪大容) 등은 시조를 ≪시경≫에다 비기면서 민간의 진솔한 언어로 가지가지 경험과 감정을 노래한 시조야말로 본원적 진정성과 실감을 갖춘 문학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의식의 대두는 한문문학에 대하여 국문학의 가치를, 상층 문학에 대하여 하층 문학의 존재의의를 천명한 것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전환의 의미를 가진다.

또한, 위항인들의 시집편찬 취지를 밝히는 글들에서 홍세태(洪世泰)와 고시언(高時彦) 등 위항인 자신과 일부 사대부 문인들에 의하여, 위항문학이 가식되지 않은 성정과 체험의 진실함에서 학사와 대부들의 그것보다 고귀하다는 논리가 전개되었다.

여기에는 도덕적 규범에의 예속이나 작품 외형의 공교로운 의장보다는 오히려 정감의 자연스러운 드러남을 중시한 새로운 비평적 지향이 작용하고 있다.

도학적 문학론이 요구하는 도덕적 규범의 엄격성이나 옛것을 닮으려는 문학관으로부터 벗어나 문학을 당대의 경험과 문제의 충실한 표현으로 이해하고 평가하려는 노력은 진보적인 의식을 지닌 사대부 문인들에게서도 나타났다. 그 가운데서 특히 주목되는 인물은 박지원(朴趾源)과 이옥(李鈺)이다.

박지원은 탁월한 문장가로서 새로운 산문 문체와 소설을 썼을 뿐 아니라, 문학의 형식과 실질 양면을 규제하는 고문의 초시대적 전범성(典範性)을 부인함으로써 문학비평에 변화·현실성·개성의 이념을 도입하였다.

그에 의하면 고문이란 옛적에 일상 언어를 기록한 것으로서, 참다운 문학의 길은 이미 화석화되어버린 옛말과 경험을 답습하는 데 있지 않고, 자신의 시대와 경험에 충실하는 데 있을 따름이다.

아울러, 그는 중국 전례를 따르는 것을 비판하고 우리대로의 풍토와 역사·문화 속에서 이루어지는 시, 즉 ‘조선풍’을 적극적으로 평가하였다. 또 개념적·직서적(直敍的)인 언어의 한계를 넘어 현실의 복잡한 양상을 우회적으로 또는 반어적으로 조명하는 소설의 가치를 인식하였다.

이옥은 이러한 방향의 논리를 더욱 진전시켜서, 하늘 아래 동일한 사물이 있을 수 없듯이, 모든 시대와 지역은 각각의 절실한 요구에 따른 문학을 가지기 마련이라는 철저한 개별성의 선언으로써 중세적 보편과 상고의 이념을 부정하였다.

그는 또한 작품과 비평의 양면을 통하여 정통적 사대부 문학의 가치관과 주제를 거부하고, 시정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일상적 경험을 중시하였다. 특히 세상만물을 살피는 데는 남녀의 정을 살피는 것보다 더 절실한 것이 없다고 하여, 예교주의(禮敎主義)의 통념을 타파한 새로운 문학세계의 당위적 근거를 제시하였다.

경세적 실학자 정약용(丁若鏞)은 이들과 또 다른 방향에서 조선 전기 이래의 도학적·내면주의적 의식을 극복하는 현실주의의 시 이론을 추구하였다. 그는 문학이 그보다 더 우월한 상위의 가치에 종속한다는 재도지문의 기본 전제를 계승하기는 하였으나, 그 상위의 가치, 즉 도에 관한 구체적 파악에서 지향을 달리하였다.

정약용이 파악한 도는 16세기의 성리학자들이 생각한 바 존심양성과 같은 내면지향적인 측면보다 일상적 삶과 사회적·정치적 차원에 있어서의 현실적 정의를 추구하는 데 중점을 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시속에 불만을 품은 비판적 기능을 중심으로 하여 ≪시경≫을 해석하고 다수의 사회에 대한 시를 썼으며, 이를 비평 활동의 근간으로 삼았다.

이학규(李學逵)는 정약용과 비슷하게 현실주의적 문학의식을 전개하면서도 창작 주체의 진실한 감정[中情]을 특히 강조했다. 그는 객관적인 사물과의 접촉을 통해 형성되는 내발적(內發的) 창작 충동과 그로부터 흘러나오는 자연스러운 감정을 시적 탁월성의 근거로 보았다.

김정희(金正喜)는 19세기 전반기까지의 시론 및 예술론에서 논자에 따라 달리 강조되던 성령(性靈), 격조(格調), 신운(神韻)의 의의를 각기 긍정하면서 그것들의 한계를 보완하는 입장에서의 절충적 통합을 지향했다. 그의 시론은 18세기 실학의 경세적(經世的) 개혁의식이 굴절, 변질되는 19세기 전반기의 상황에서 배태된 것이었다.

그는 금석(金石)과 고동(古董)의 감상 과정에서 길러지는 학식 및 교양의 습득을 통해 작가의 정신을 함양하는 것이 시를 포함한 예술 창작의 근본이라고 보았다. 이처럼 문인 귀족의 고상한 취미와 심미의식의 세련을 강조한 그의 문학론은 19세기 전반의 문예 동향에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선 후기 비평의 다양한 조류 속에는 그밖에도 더 밝혀져야 할 사항들이 많이 남아 있어서, 이에 대한 연구의 진전과 함께 한국 문학비평의 이론구조와 역사적 전개는 더욱 충실하게 해명되리라 기대된다.

세기

커다란 역사적 변환기이자 시련기였던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상황에서 한국 문학비평은 누적된 과거의 유산과 새로운 논리 지향의 요구 사이에서 극히 어려운 모색의 과제에 당면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나아가는 과정에서 19세기까지의 전통적 유산을 부인하거나 과소평가하고 서구의 문학과 비평에 강한 관심을 두는 조류가 팽창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전통적 논리의 기반 위에 서거나 서구 문학비평에 지나치게 치우치는 것을 비판하면서, 당대의 상황에 부응하는 문학의 논리를 추구한 노력도 있었다.

20세기 초기 이후의 문학비평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데 있어 가장 어렵고도 중요한 과제는 이러한 갈등과 더불어 문학의 사회적·이념적 가치와 예술적 가치에 관한 여러 전망들을 어떻게 온당한 균형과 전망 위에서 파악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20세기의 한국 문학비평은 보통 개화기라 불리는 계몽적 이념의 시대로부터 시작된다. 이 시기에 나타난 신소설, 역사·전기물, 그리고 풍자적 단편의 작가들과 논평자들은 당대의 상황적 요구와 관련하여 문학의 기능과 효용을 파악하였다.

이해조(李海朝)의 <화의혈 花之血>의 서문, 량치차오(梁啓超) 원작인 <서사건국지 瑞士建國誌>의 서문, 이상협(李相協)의 <재봉춘 再逢春>의 서문, 그밖에 ≪대한매일신보≫의 논설(1908.11.18.) 등 이 무렵의 대표적 문학론은 문학의 도덕적·사회적·정치적 효용성을 근본으로 삼고 있다.

문학, 특히 소설은 가장 가깝고도 구체적인 경험에 호소함으로써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깨우치는 데 다른 무엇보다 큰 효과를 발휘한다.

따라서 이를 통하여 인심을 맑게 하고 풍속을 개량하며, 나아가서는 사회적·정치적 자각을 전파하는 현실적 효용을 가진다는 것이 그 요지이다. 이러한 논리는 문학의 공용성을 중시한 유가적 관점의 바탕 위에 사회적 격변기의 요구가 결합된 결과로 해석된다.

그러나 이러한 문학론은 191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제의 한반도 강점에 따른 이념성의 억압이라는 외적 요인과 주정주의적 문학론의 등장이라는 내적 요인에 의하여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이 시기의 대표적 비평가인 이광수(李光洙)는 인간의 정신이 지(知)·정(情)·의(意)라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문학은 이 중에서 정의 요구를 표현, 충족하는 기능을 맡는다는 주정주의의 이론을 제시하였다.

전통적인 유교 문학에 대하여 격렬한 거부의 논조를 보인 당시의 이광수는 19세기까지의 문학과 문학론이 인간의 이지(理智)만을 존중하고 정을 낮게 봄으로써 잘못에 빠졌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유교적 도덕주의에 대한 반명제로서 일종의 감정주의·반도덕주의를 지향한다.

이에 따라 개화기의 문학론이 지닌 도덕적·사회적 효용주의의 논리와 현실에 대한 관심은 퇴색하고, 대신 문학의 심미적 가치와 정서적 감응 및 개성이 중요한 것으로 부각되었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몇 편의 문학론을 쓴 신채호(申采浩)는 이와 상반되는 입장에서 문학의 교육적·사회적 가치를 중시하고, 당대의 문학이 현실도피적 환각의 유희에 기울어지는 경향을 비판하였다.

그는 예술주의의 문예이든 인도주의의 문예이든 그 시대의 현실이 안고 있는 절실한 문제로부터 유리되어서는 존재의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논리는 유가적 문학론의 전통에 연결되어 있으면서 종래의 단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가치, 예컨대 민중의 생활, 조선의 현실 등을 도입함으로써 문학의 사회적 성격과 기능을 중시하는 비평으로 진전을 거둔 것이었다.

이렇듯이, 서로 다른 지향은 1920년대 초기의 낭만적 문학관과 프로비평 사이의 갈등으로 계속되었다. 1910년대 이광수의 문학론에서 예비단계를 거친 주정주의적 문학관은 1920년대 초기의 문학운동을 거치면서 박영희(朴英熙)·황석우(黃錫禹)·김억(金億)·박종화(朴鍾和) 등에 의하여 낭만주의적·유미주의적 문학론으로 심화되었다.

그리고 1920년대 중엽에 이를 비판하면서 등장한 신경향파, 즉 카프(KAPF :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계열의 비평가들은 문학의 사회적 의의와 투쟁적 기능을 제창하였다.

초기는 김기진(金基鎭)·박영희에 의하여, 1920년대 말 이후는 임화(林和) 등에 의하여 주도된 이들 카프계열의 비평가들은 이전의 문학과 문학론을 자본주의적 사치와 허위의식의 소산이라 비판하고, 역사발전의 동력으로 기여하는 문학의 의의를 역설하였다.

한편, 이에 대응한 이광수·염상섭(廉想涉)·김억 등은 각기 다른 입장에서 문학의 예술적 자율성, 또는 계급에 우선하는 민족의 일체성을 논거로 하여 이에 대응하는 논리를 모색하였다. 이 과정에서 한국 현대비평은 문학의 본질과 기능 및 평가 기준에 관한 이론적·실제적 쟁론과 심화의 계기를 얻었다.

그러나 당대의 비평 자체는 연역적 논리의 관념성을 벗어나지 못하여, 대립의 양면에서 모두 구체성이 부족한 도식주의나 인상주의에 빠진 예가 많았다. 김기진의 평론 <문예시평 文藝時評>을 도화선으로 하여 일어난 ‘내용·형식 논쟁’은 이 시기의 가장 날카로운 비평적 쟁점을 보여 준다.

이 논쟁에서 김기진은 문학이 관념(투쟁의식)만으로 성립할 수 없고, 마땅히 내용에 상응하는 예술적 육체를 갖추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반면, 박영희는 일정한 과도기에서는 내용과 의식이 형식상의 고려에서 독립하여 선행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논쟁은 상황적 요인에 의하여 후자의 정당성이 카프 안에서 공식화되는 것으로 매듭지어졌으나, 그 기본적 숙제만은 해결되지 않은 채 1930년대의 창작방법론 논쟁, 사회주의 리얼리즘 논쟁으로 계승되었다.

한편, 1930년대 초기의 이른바 ‘외부정세의 악화’와 함께 프로비평의 흐름은 일단 활기를 잃었는데, 이 무렵 박용철(朴龍喆)과 김환태(金煥泰) 등의 비평 활동이 시작되었다.

이들의 비평적 관점은 멀리 1920년대 초기의 낭만적·유미적 문학론의 흐름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것이면서, 1920년대 중엽 이래의 프로비평에 대한 반작용의 의미를 지닌 것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문학이 다른 어떠한 것에도 예속되지 않는 자율적·자립적 예술품이며, 따라서 외재적 기준을 통하여 문학을 이해하고 평가함은 비평의 마땅한 길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 대신 이들은 시인·작가의 개성, 창조의 신비, 그리고 세련된 언어와 감각적 경험의 아름다움 등을 중시하였다. 이 점에서 그들은 심미주의적 비평의 계열에 속한다.

그러나 그들(특히 김환태)은 문학의 예술적 신비에 대한 개인적 체험과 감상의 소중함을 강조한 나머지 흔히 인상주의적 비평으로 기울어졌고, 가치 평가의 문제에 있어서는 프로비평의 교조적 객관주의에 대조되는 주관주의로 치우치는 경향을 나타내었다.

이들보다 조금 늦게 등장하여 1930년대 중엽 이후 중요한 활동을 보인 김기림(金起林)과 최재서(崔載瑞)는 현대영미비평의 경향을 소개, 원용하면서 김환태류의 주관주의적 경향과 프로비평의 도식성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특히, 최재서는 비평의 가치 기준을 중시하여, 문학에 있어서의 예술적 가치와 사회적·윤리적 가치를 통합하는 비평이론의 구성을 모색하였다.

김기림은 시인이자 시론가로 활동하면서 이론 비평보다는 시에 관한 실제 비평 작업에 치중하였다. 1930년대 초 일제의 탄압으로 카프가 해산된 이후에도 프로문학의 기본 입장을 유지하고 있던 임화와 김남천(金南天)은 1930년대 중엽에 와서 예전의 과격한 관념성을 지양한 비평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내용은 매우 다양하나 임화의 낭만주의·리얼리즘론·신문학사연구 등과 김남천의 장편소설론이 근간을 이룬다. 이러한 작업을 통하여 그들은 프로비평이 늘 동반하고는 하였던 도식적 교조주의의 범위를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였다.

특히, 소설의 문제를 중심으로 이들이 최재서 등과 함께 집중적으로 탐구한 리얼리즘의 문제는 이 시기의 중심적인 주제로 주목된다. 1945년 이후 남북분단까지의 현실 상황은 문학비평 또한 이데올로기적 대립의 양분법 속에 편입되도록 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의 비평은 과거의 성과를 정리하여 출간한 것들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이념의 선택과 지향을 둘러싼 선언서적 논쟁에 지배되었다. 남북분단이 고정화되고 6·25를 겪은 뒤 정치적·사회적 제약과 비평가들의 분리로 인하여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 당연한 결과로서 문학비평의 주요 문제에 관한 논리의 대립과 상호 심화 및 지양의 기회는 희박하여졌다. 이에 따라 1950년대는 작품론에 있어서의 일부 성과를 제외하고는 비평에 있어서 뚜렷한 진전을 기록하지 못하였다. 1960년대의 비평은 이에 비하여 다소 활기를 띠었고, 내용 또한 다양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영미 신비평이 소개되고 형식주의적 문학론이 시도되는 한편, 1960년대 초의 사회적·정치적 격변의 체험을 계기로 문학의 사회적 의의와 기능에 대한 관심이 새로이 커지면서 순수·참여논쟁을 통하여 비평적 쟁점이 날카롭게 부각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또한, 1960년대 말에는 서구적인 문학사조와 이론에 대한 일방적 편향에 대한 회의적 관점이 대두되었다. 따라서 전통의 계승과 단절 문제를 둘러싼 문화사적 논의가 계속되면서 문학비평의 주체적 근거와 의미에 대한 관심이 커지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의 비평은 이의 연장선상에서 비평적 전제와 이론구조의 차이를 좀더 첨예하게 드러내었다. 그리하여 한편에서는 문학의 역사성과 현실적 의미와 기능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다른 한편에서는 문학의 자율성과 내면적·보편적 가치를 옹호하는 방향으로 논리화가 진행되었다.

또한 이와 같은 양분법적 구도만으로는 포괄할 수 없는 여러 경향들까지 공존하게 되었다. 1980년대 초에 집권한 신군부(新軍部)에 의해 1970년대의 유신체제(維新體制)보다 더 가혹한 정치적 억압이 행해지고, ≪창작과비평≫·≪문학과지성≫ 같은 주도적 계간지가 폐간되는 등 비평적 기반의 황폐화 현상이 나타나면서 신진 문인들을 중심으로 한 비평 조류의 일부에서는 급격한 좌편향(左偏向) 현상이 나타났다.

그 결과, 문학은 진보적 당파성에 입각하여 당면한 계급적 모순의 타파를 위해 복무해야 한다는 명제가 강조되기도 했다.

그러나 1980년대 말에 나타난 동구권 사회주의 정권의 붕괴와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을 목격하고, 국내적으로는 군사정권의 타협적 문민화(文民化)가 이루어지면서 이러한 급진적 흐름은 퇴조했다.

그 뒤를 이어 관심을 끌게 된 포스트모더니즘의 조류는 기존의 비평적 주제와 스타일로부터 탈출 내지 해체를 모색했으나, 새로운 감성 및 화법에 대한 열망에 비해 그 내용적 실질과 논리구조는 아직 불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1990년대는 비평적 주류가 불분명한 동시에 문학적 담론의 터전 자체가 극히 분산적인 관심의 파편으로 분화된 모색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한국 비평이 지닌 과제는 이러한 상황을 생산적 토론에로 이끌어 올림으로써 문학의 내면적·예술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통합하는 한편, 서구 비평에 일방적으로 치우치는 것을 지양하여 한국 문학의 체험과 과제에 바탕을 둔 비평이론 및 실천을 확립하는 데 놓여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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