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열단은 1919년 11월 만주 길림성(吉林省)에서 김원봉(金元鳳) 등 한국독립운동자 13명으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로서 암살·파괴·폭동 등 폭력을 중요한 운동방략으로 채택하였다.
그들은 파괴의 다섯 가지 대상으로 조선총독부·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매일신보사, 각 경찰서 및 기타 왜적의 중요 기관으로 정해 ‘오파괴(五破壞)’라 하였다.
암살의 일곱 가지 대상으로 조선총독과 고관, 일본군부수뇌·대만 총독·매국노·친일파 거두·적탐(敵探, 밀정) 및 반민족적 토호열신(土豪劣紳) 등을 열거, ‘칠가살(七可殺)’이라 하였다.
1920년부터 큰 성과를 보이기 시작한 의열단이지만, 그들의 활동을 가능하게 한 이념의 정립에는 깊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다 의열단의 폭력적 독립운동에 대해 비판과 비난이 일어나자, 그들은 독립운동의 이념 및 방략을 정립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의열단이 신채호에게 성명문을 요청한 것은 이 때문이다.
1910년 4월 망명길에 오른 신채호는 1919년 임시의정원에 참여하면서부터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관여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9월부터는 반(反)임시정부 활동을 전개하였다.
국민대표회의의 개최가 확정된 뒤 1922년 12월, 신채호는 의열단의 김원봉으로부터 상해(上海)에 있는 그들의 폭탄제조소를 시찰하고 의열단 선언문을 작성해 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았다.
이 때 김원봉은 탁월한 이론가이며 의열단원인 무정부주의자 유자명(柳子明)을 신채호와 합숙하게 하여 선언문을 작성하는 데에 이념적인 뒷받침을 하도록 하였다.
이 선언문에 무정부주의 이념이 민족주의 이념과 혼재해 있는 것, 그리고 선언문 집필 후에 신채호가 무정부주의에 경도된 것은 이 때문이다.
1개월여의 준비 끝에 1923년 1월에 작성된 이 선언문은 5개 부분 6,400여 자로 되어 있다. 첫째, 일본을 조선의 국호와 정권과 생존을 박탈해 간 강도로 규정하고 이를 타도하기 위한 혁명이 정당한 수단임을 천명하였다.
둘째, 3·1운동 이후 국내에서 대두된 자치론(自治論), 내정독립론(內政獨立論), 참정권론 및 문화운동을 일제와 타협하려는 ‘적’으로 규정하였다.
셋째, 상해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론, 독립전쟁준비론 등의 독립운동방략을 비판하였다. 넷째, 일제를 몰아내려는 혁명은 민중직접혁명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다섯째, ‘조선혁명’과 관련, 다섯 가지 파괴와 다섯 가지 건설의 목표를 제시하였다.
‘5파괴’의 대상은 이족통치(異族統治)·특권계급·경제약탈제도·사회적 불평균 및 노예적 문화사상이며, ‘5건설’의 목표는 고유적 조선·자유적 조선민중·민중적 조선·민중적 사회 및 민중적 문화라고 선언하였다.
이 선언은 폭력을 혁명의 수단으로 정당화하는 등 무정부주의적인 요소가 없지 않다. 그러나 항일독립운동기에 이것만큼 의열단원뿐만 아니라 모든 독립운동자들과 한국의 전민족구성원에게 독립에 대한 확신과 목표를 불어넣은 것은 없다고 할 정도로 귀중한 문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