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 10월 13일부터 1925년 3월 16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한 것을 1929년 조선도서주식회사에서 『조선사연구초』라는 제목으로 간행하였다.
홍명희(洪命熹)의 서(序)와 정인보(鄭寅普)의 서(署)가 있다.
이 책에 실린 6편의 논문은 주로 한국고대사에 관련된 것으로 「고사상이두문명사해석법(古史上吏讀文名詞解釋法)」·「삼국사기중동서양자상환고증(三國史記中東西兩字相換考證)」·「삼국지동이열전교정(三國志東夷列傳校正)」·「평양패수고(平壤浿水考)」·「전후삼한고(前後三韓考)」·「조선역사상일천년래제일대사건(朝鮮歷史上一千年來第一大事件)」등이다.
「고사상이두문명사해석법」은 한자의 음(音)과 뜻[義]을 빌려 만든 이두문의 고사(古史) 상의 명사 표기를 제대로 해석하기 위해 시도한 글이다.
그는 이두의 표기에 일정한 법칙이 없다는 것, 지명의 중국식 표기화에 옛 이름을 번역, 사용하지 않은 것, 역사책에 틀린 자, 중첩된 글자, 빠진 글자 등이 많은 것, 시간의 흐름에 따라 소멸 혹은 변개된 글이 많다는 것 등을 들어 이두문의 명사 해석이 곤란하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옛 명사 해석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신채호는 몇 가지 해석 방법을 제시하였다. ① 본문의 자증(自證), ② 동류(同類)의 방증(旁證), ③ 전명(前名)의 소증(遡證), ④ 후명(後名)의 연증(沿證), ⑤ 동명이자(同名異字)의 호증(互證), ⑥ 이신동명(異身同名)의 분증(分證)이 그것이다.
이러한 해석법을 통해 신채호는, ① 선학(先學)이 이미 증명한 것을 더욱 견고하게 할 수 있고, ② 종래의 의문에 분명한 답을 제시할 수 있으며, ③ 선학이 위증(僞證)한 것을 교정할 수 있고, ④ 전사(前史)의 두찬(杜撰)을 타파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논문은 그의 역사연구방법 상 매우 중요하다.
「삼국사기중동서양자상환고증」은 『삼국사기』 안에 동서(東西)의 두 글자가 서로 바꾸어진 실제와 원인 등을 밝힌 글이다.
「삼국지동이열전교정」과 「평양패수고」는 그의 고증적인 자세를 잘 보여주는 논문들이다.
그는 이미 『후한서』가 『삼국지』의 초록(抄錄)임을 이해하는 등 『삼국지』의 중요성을 알았으나, 『삼국지』가 가지는 오류 또한 이 논문에서 지적하였다. 특히 지적하는 『삼국지』의 수정할 것은 자구와 내용 기사의 두 종류가 있다.
자구의 것으로는 ① 서문에서 ‘오환골도(烏丸骨都)’는 ‘오골환도(烏骨丸都)’로, ② 예전(濊傳)에서 ‘유렴치불청구려(有廉恥不請句麗)’를 ‘유렴치(有廉恥) 불청흉(不請匈)’으로, ③ 한전(韓傳)에서 ‘신지(臣智) 혹가우호(或加優呼) 신운견지(臣雲遣支)’를 ‘신지(臣智) 혹가우호(或加優呼) 신견지(臣遣支)’로, ④ 변진전(弁辰傳)에서 ‘차읍(借邑)’은 ‘읍차(邑借)’로 고쳐야 함을 지적하였다.
내용 기사의 것으로는 ① 진한(辰韓)을 진인(秦人)의 자손이라 한 것, ② 동부여를 예(濊)로 오인한 것, ③ 『삼국지』 중에 낙랑을 뺀 것, ④ 발기(發岐)를 신대왕(新大王)의 장자로 기록한 것 등을 지적하고, 잘못된 것을 교정하였다.
「평양패수고」는 역사책에 보이는 고대의 평양·패수가 오늘날의 평안도 평양·대동강이 아니라 만주 봉천성의 해성현(海城縣)과 점우락(蔪芋濼)임을 고증하였다. 그 고증을 근거로 낙랑에 대해 종래와 다른 새로운 주장을 펴게 되었다.
신채호는 낙랑국과 낙랑군을 구별하였다. 낙랑국은 오늘날 평양 중심의 평안도 지방에서 토착인 최씨(崔氏)가 다스렸고, 낙랑군은 군치(郡治)가 요동(遼東)부터 요서(遼西)·상곡(上谷)까지 이동한 바 있는 이른바 중국의 군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조선사연구초』에서 가장 야심적이며 학술적 영향도 큰 논문은 「전후삼한고」와 「조선역사상일천년래제일대사건」이다.
「전후삼한고」에서는 단군이 세운 조선이 뒷날 삼조선 즉 삼한으로 분립되어 중국 동북지역에서 만주지역에 걸쳐 존재했는데 이들을 전삼한이라 칭했고, 이들 전삼한이 이동해 한반도 남쪽의 후삼한을 형성했는데, 이를 보통 삼한으로 인식한다고 주장하였다.
저자는 이 글에서 우리 고대사에 지명·부족이동설을 과감히 도입해 우리 고대사의 난제들을 해결하려 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선진(先秦) 문헌에서부터 시작해 후대의 역사책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비판과 체계 없이 여러 사료에서 산견(散見)되는 조선·낙랑·삼한의 문제를 체계적으로 풀어보려 했던 것이다.
「조선역사상일천년래제일대사건」은 앞에서 다른 논문들이 고대사를 다룬 것임에 비해서, 고려 중기의 이른바 묘청(妙淸)의 난을 다룬 것이다.
신채호에 의하면, 우리 민족사는 상고시대에는 중국 민족에 필적하는 강건한 힘과 영토·문화·종교사상을 가졌는데 후대로 오면서 약화되어갔다고 한다. 특히, 조선 근세에 이르러 종교나 학술·정치·풍속이 모두 사대주의의 노예가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렇게 노예성을 산출한 사건이 ‘한마디로 회답해 고려 인종 13년 서경전역(西京戰役), 즉 묘청이 김부식(金富軾)에게 패함이 그 원인이라.’는 것이다. 신채호는 서경전역을 종래의 사가들처럼 관군(官軍)이 반적(反賊)을 친 단순한 전쟁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이 전쟁은 일찍부터 중국에 대결해 왔던 사상 근거로서의 낭·불(郎佛) 양가 대 유가(儒家)의 전쟁이요, 국풍파(國風派) 대 한학파, 독립당 대 사대당,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전쟁이며, 묘청은 곧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곧 후자의 대표라는 것이다.
이 전쟁에서 전자가 패하고 후자가 승리하여 그 뒤 우리나라의 종교·학술·정치·풍속 등이 유교사상에 입각한 사대주의·보수주의로 전락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신채호는 이러한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우리나라에서의 낭·불·유교의 사상적 원류와 그 정치력의 형성·상호 갈등을 서술하고, 고려 중기에 이르러 이들 간의 투쟁이 어떻게 표면화되었는가를 고찰하였다.
그는 여진 정벌을 단행한 고려 예종과 윤관(尹瓘)을 화랑 사상을 실행하려던 인물로 지목하였다. 그것이 예종·인종의 교체기에 낭가(郎家)와 불가·무장·시인들에게 자극을 주어 묘청과 윤언이(尹彦頤)의 칭제북벌론자(稱帝北伐論者)들이 나타나게 되었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고려 초기부터 세력을 키워오던 유교의 사대주의파는 칭제건원파의 주장을 견제하면서, 묘청의 ‘광망(狂妄)한 거동’을 진압하였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자주독립 사상이 사대주의 사상으로 변화되는 계기가 되었고, 따라서 이것이야말로 ‘조선역사상일천년래제일대사건’이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사대파의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편찬, 사대주의에 부합한 역사를 남기고 그에 반대되는 독립사상을 가진 낭가의 역사는 없애버렸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정치가 이렇게 되었기 때문에 그 뒤의 종교·학술 기타가 모두 사대주의의 노예가 되어 외세에 따라 변천하는 사회로 전락되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