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식화폐발행장정은 1894년(고종 31) 7월 제정, 공포된 화폐 발행에 관한 규정이다. 은화를 본위화폐로 하고, 동화를 보조화폐로 하는 근대식 화폐제도이다. 청일전쟁으로 막대한 군사비가 필요하였던 일본의 요구로 시행되었다. 일본화폐제도를 본떠서 은화본위제를 채택하였고, 일본의 경화(硬貨)가 조선에 유입되었다. 불법주조행위에 대한 금지 내지 처벌 규정이 없어서 사주(私鑄)를 야기하였으며 백동화와 적동화 등 보조화폐만 남주(濫鑄)하여 물가가 앙등되었다. 제정 동기와 장정 내용 및 운영에서 많은 문제가 제기되어 1901년에 이르러 폐지되었다.
은화를 본위화폐로 하고, 동화를 보조화폐로 하는 근대식 화폐제도이다.
1894년 일본은 조선에서 청일전쟁을 치르는 동안 거액의 군사비가 필요하였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는 일본화폐의 사용을 배격했으며, 또한 조선의 상평통보는 가치변동이 심하고 무거워 원거리 수송에 불편하였다.
그래서 일본은 1892년 조선정부가 「신식화폐조례」에 의거해, 주조했으나 사용하지 않고 있던 5냥 은화 등을 근대식 화폐로 사용하는 방안과, 동시에 자국 화폐를 조선에서 사용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이리하여 일본정부는 은본위 화폐제도를 골자로 하는 「신식화폐발행장정」의 공포 · 시행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즉, 이 장정은 1892년의 「신식화폐조례」와는 달리 일본의 강력한 간섭 밑에서 공포 · 시행되었다.
장정은 7개조로 되어 있는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신식화폐를 은 · 백동 · 적동 · 황동(黃銅)의 4종류로 나눈다. 제2조 화폐의 최저 단위를 푼(分), 10푼을 전(錢), 10전을 양(兩)으로 한다. 제3조 화폐를 5등급으로 나누어 최저 단위 1푼을 황동, 그 다음 5푼을 적동, 그 다음 2전 5푼을 백동, 그 다음 1냥 및 5냥을 은으로 한다.
제4조 5냥 은을 본위화폐로 하고 1냥 은 이하를 모두 보조화폐로 한다. 1냥 은화의 1차 여수량(與受量)은 50냥을 상한으로 하고, 백동화 이하의 1차 여수량은 5냥을 상한으로 하되, 단 여수자가 서로 즐겨 허락하면 이 예에 준하지 않는다.
제5조 신 · 구화폐를 모두 통용하되 가치 비율은 다음과 같다. 황동 1푼은 구전(舊錢) 1매, 적동 5푼은 구전 5매, 백동 2전 5푼은 구전 25매, 은 1냥은 구전 100매, 은 5냥은 구전 500매이다.
제6조 각종 세항(稅項) 및 봉급을 은화로 정한 것은 은화를 사용하되, 사정에 따라서는 구전으로 대용할 수 있으며, 구전으로 정한 것은 제5조의 비례에 따라 은화로 대용할 수 있다. 제7조 신식화폐가 다량으로 주조될 때까지는 잠시 외국화폐를 혼용할 수 있으며, 이 경우에 외국화폐는 조선화폐와 동질(同質) · 동량(同量) · 동가(同價)여야 한다.
「신식화폐발행장정」은 일본화폐제도를 본떠서 은화본위제를 채택한 것인데, 특히 제7조의 규정은 일본화폐의 조선 내에서의 유통의 길을 트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일본의 1원 · 20전 · 10전 · 5전 · 2전 · 1전의 경화(硬貨)가 조선에 유입되었다.
또한 장정에는 1892년의 「신식화폐조례」와는 달리 화폐의 불법주조행위에 대한 금지 내지 처벌 규정이 전혀 없어, 이후 많은 사주(私鑄) 행위를 야기시켰다. 한편, 전환국(典圜局)에서는 원료의 결핍으로 본위화폐인 5냥 은화와 1냥 은화는 주조하지 못하고, 백동화 · 적동화 등 수익성이 큰 보조화폐만을 남주(濫鑄)하여 유통시켰다.
특히 백동화는 가장 수익성이 높았으므로, 전환국은 정부의 재정난 타개를 위해서도 백동화를 대량 주조하였다. 그런데 백동화는 전환국에서만 주조된 것이 아니라, 특주(特鑄) · 묵주(默鑄) · 사주 등 비공식 내지 불법으로 주조되고, 심지어는 다량의 백동화가 일본 등 외국에서 사주되어 밀수입되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이른바 ‘백동화 인플레이션’이라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백동화는 경기도를 중심한 중부지역에서만 주로 유통되고, 남부 · 북부지역에서는 거의 유통되지 못하였다. 백동화의 가치는 그만큼 인정받지 못하였고, 백동화의 대량 유통은 그 대신 물가 앙등만을 가져왔다.
「신식화폐발행장정」은 위와 같이 제정 동기와 내용에도 많은 문제점이 있었을 뿐 아니라, 운영상에서도 많은 불합리한 점이 있어 사회 · 경제적인 혼란만을 초래하였다. 결국 이러한 「신식화폐발행장정」은 1901년에 이르러 폐지되었다.
장정의 폐지에는 당시 광무정권 담당자들의 반일의식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광무정권에서는 이때 장정 대신에 금본위 화폐제도를 채용한 「화폐조례」를 제정 · 공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