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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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개념
신라시대 왕성인 월성 안에 있던 정궁.
이칭
이칭
조원전(朝元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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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대궁은 신라시대 왕성(王城)인 월성(月城) 안에 있던 정궁(正宮)이다. 국왕이 거처하던 궁으로 6부의 하나인 양부에 위치한 양궁, 사량부에 위치한 사량궁과 함께 3궁으로 불렸다. 대궁 안에 정전인 조원전을 비롯하여 다양한 전각이 존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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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신라시대 왕성인 월성 안에 있던 정궁.
내용

대궁은 국왕이 거처하던 신라의 정궁으로 왕성으로 불린 월성 안에 위치하였다. 6부의 하나인 양부(梁部)에 위치한 양궁(梁宮), 사량부(沙梁部)에 위치한 사량궁(沙梁宮)과 함께 3궁으로 불렸다.

585년(진평왕 7)에 각 궁에 사신(私臣)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는데, 이때 대궁의 사신으로 대아찬 화문(和文)이 임명되었다. 622년(진평왕 44) 2월에 내성사신(內省私臣)을 두어 3궁을 모두 관장하게 하였다.

초대 내성사신에는 제25대 진지왕의 아들이자, 김춘추(金春秋) 태종무열왕]의 아버지인 김용수(金龍樹)가 임명되었다. 김용수는 김용춘(金龍春)이라 부르기도 한다.

대궁의 정전(正殿)을 부르는 특별한 칭호가 없다가 651년(진덕왕 5) 정월 초하루에 국왕이 처음으로 백관의 신년하례(新年賀禮)를 받는 의례를 실시한 것을 계기로 조원전(朝元殿)이라 칭하였다. 조원전에서 주로 정기적으로 조회를 열거나 국가의 중요한 의례를 거행하였다.

679년(문무왕 19) 2월에 대궁의 전각을 대대적으로 정비 보수하였는데, 이때 각종 연회를 개최하거나 외국 사신을 접견하는 전각인 숭례전(崇禮殿)을 새로 지은 것으로 짐작된다. 국왕이 매일 국정 업무를 처리하는 편전을 내황전(內黃殿), 왕비가 기거하며 일상생활을 하던 중궁전을 서란전(瑞蘭殿)이라 불렀다.

811년(헌덕왕 3) 4월에 국왕이 신료들과 함께 정사를 의논하던 전각으로 평의전(平議殿)을 새로 지었고, 강무전(講武殿)에서는 무예와 관련된 의례를 거행하였다. 679년에 획정(劃定)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무평문(武平門), 현덕문(玄德門), 귀정문(歸正門), 준례문(遵禮門), 적문(的門) 등이 대궁에 위치하였다.

이 밖에 대궁에 국가의 중요한 보물 등을 보관하는 천존고(天尊庫), 사찰로 추정되는 내원(內院), 연못 2개, 그리고 명학루(鳴鶴樓), 월정당(月正堂), 월상루(月上樓), 망은루(望恩樓), 고루(鼓樓) 등의 건물이 존재하였다.

참고문헌

원전

『삼국사기(三國史記)』

단행본

전덕재, 『신라 왕경의 역사』(새문사, 2009)

논문

여호규, 「6~8세기 신라 왕궁의 구조와 정무 · 의례 공간의 분화」(『역사와 현실』 9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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