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당서(新唐書)』 예문지(藝文志)에 고음(顧愔)이 지은 『신라국기』 1권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음은 중국 쑤저우[蘇州] 하이옌현[海鹽縣] 헝산[橫山] 사람으로 감찰어사(監察御史)를 역임하였다.
768년(신라 혜공왕 4)에 당나라에서 혜공왕을 책봉하는 사신(使臣)으로 파견된 귀숭경(歸崇敬)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신라를 예방하였다가 귀국한 후에 신라의 인물과 풍습 등을 수집하여 『신라국기』를 저술하였다. 『신라국기』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당나라의 영호징(令狐澄)이 『신라국기』의 내용 가운데 일부를 『정릉유사(貞陵遺事)』[『대중유사(大中遺事)』라고도 함]에 실었다. 송나라 주승비(朱勝非)의 『감주집(紺珠集)』과 원나라 도종의(陶宗儀)의 『설부(説郛)』에서 『신라국기』에서 인용한 기록이 포함된 『대중유사(大中遺事)』의 일문(逸文)을 소개하였다.
두 문헌에 의거하여, 『신라국기』에 국왕의 족속은 제1골, 나머지 귀족은 제2골이라 불렀던 사실, 755년(경덕왕 14)에 높이가 13층인 망덕사(望德寺)의 두 탑이 크게 흔들렸던 사실, 귀족 자제 중 아름다운 이를 택하여 화랑(花郞)이라 부르고 나라 사람들이 높이 받들어 섬겼던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해동역사(海東繹史)』에 『신라국기』에서 신라의 산물로 잣〔五粒子〕을 소개하였다고 전하나, 어느 문헌에서 인용하였는가를 밝히지 않았다.
『신당서』 신라전(新羅傳)의 신라 풍속 관련 기록 가운데 일부는 『신라국기』에서 인용하였다고 이해한다. 『삼국사기』 찬자는 영호징이 『신라국기』를 찬술하였다고 잘못 기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