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덕사(功德司)는 신라시대, 불교와 관련된 관청이다. 『삼국사기』에 공덕사는 여러 번 기록되어 있으나, 그 직능(職能)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당나라 좌우가공덕사 등의 직능과 백제 공덕부(功德寶)의 성격을 참고하였을 때 신라의 공덕사 역시 승려와 불교 사찰 등을 관할하던 관청으로 짐작된다.
공덕사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여러 번 기록되어 있으나, 그 직능(職能)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삼국사기』 이외의 문헌이나 금석문 등에도 신라의 공덕사에 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중국의 자료, 『주서』, 『삼국유사』 등에 공덕사의 직능을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당나라는 좌우가공덕사(左右街功德使), 동도공덕사(東都功德使), 수공덕사(修功德使) 등을 두어 승려들의 승적(僧籍), 불교 사찰의 건립 및 수리 등을 관장하게 하였다. 후에는 좌우가공덕사가 도사(道士)와 여관(女冠)도 관리하였다.
『주서(周書)』 백제전에 의하면, 백제의 22부 중 공덕부(功德部)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내제석원(內帝釋院), 왕실의 원찰(願刹) 및 국가 사찰을 관할하는 부서로 이해하고 있다.
『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신라 혜공왕 때에 김유신의 명복을 빌기 위해 공덕보(功德寶)를 설립하고, 토지 30결(結)을 취선사(鷲仙寺)에 주어 그 밑천으로 삼게 하였다. 당나라 좌우가공덕사 등의 직능과 백제 공덕부의 성격, 공덕보라는 표현 등을 참고하였을 때, 신라의 공덕사 역시 승려와 불교 사찰 등을 관할하던 관청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다만 불교 관련 중앙행정관서로서 예부(禮部) 예하에 대도서(大道署), 내성(內省) 예하에 사전(寺典)이 존재하였는데, 공덕사가 이들 관서와 어떠한 관계였는가를 알 수 있는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