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태조 왕건은 918년(태조 1)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하였다. 이어서 왕건은 919년(태조 2) 수도를 철원에서 개경으로 옮겼으며 수도를 옮긴 직후 개경에 10대 사찰을 창건하였다. 내제석원(內帝釋院)은 법왕사(法王寺), 자운사(慈雲寺), 왕륜사(王輪寺), 사나사(舍那寺), 천선원(天禪院: 普膺寺), 신흥사(新興寺), 문수사(文殊寺), 원통사(圓通寺), 지장사(地藏寺) 등과 함께 창건한 10대 사찰 중의 하나이다. 1056년(문종 10)에는 문종이 내제석원에 행차하여 승려 해린(海麟)을 왕사(王師)로 삼았다. 『고려사(高麗史)』에는 1064년(문종 18) 8월, 내제석원 법당 기둥에 벼락이 떨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1147년(의종 원년) 5월에는 밤에 폭풍이 불고 비가 내렸으며, 내제석원에서 사람이 벼락에 맞았다고 한다. 내제석원에 대한 기록은 이자겸의 난을 기록한 『고려사』 열전에서 다시 확인된다. 1126년(인종 4) 이자겸의 난이 발생하였을 때 궁궐이 불에 탔다. 이때 인종은 불길이 장차 다가오므로 궁궐에서 나가려 하였다. 이자겸이 승선(承宣) 김향(金珦)을 보내어 남궁(南宮)으로 나올 것을 청하여왔다. 왕은 걸어서 경녕전(景靈殿)에 이르러 내시 백사청(白思淸)으로 하여금 선왕들의 영정을 받들어 내제석원에 있는 마른 우물 속에 넣어 두게 하였다. 이자겸 난으로 궁궐이 모두 불탔으며 산호(山呼)·상춘(賞春)·상화(賞花)의 세 정자와 내제석원의 회랑 수십 간(間)만이 겨우 남아있을 뿐이었다고 한다. 내제석원은 이후 다시 중창되었는데, 조선 건국 초기인 1394년(태조 3년)에 혁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