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는 기록이 없어 대도서의 담당 업무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직관지(상)의 주석에 사전(寺典) 혹은 내도감(內道監)이라고도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을 통하여 법흥왕 대에 공인된 불교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관청으로서 성립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신라가 북위(北魏)에서 수(隋)나라로 이어지는 북조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이해하면서, 수나라의 승정(僧政) 기구인 숭현서(崇玄署) 등을 통해 그 기능과 역할을 추정하려 하였다. 그 결과 승려의 교학 수련과 계율을 감독하는 직무를 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당시 신라가 속관(俗官), 곧 일반 행정 관청과 관리를 통해 불교 교단을 통제하려던 입장과 연결된다.
그러나 당시 신라 불교의 북조 영향설을 부정하면서 남조 양(梁)의 제도를 참고하였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대도서가 승려와 불교 교단에 대하여 국가 권력으로 통제하려는 목적보다는 궁중에서 행하는 불교 의식을 비롯한 왕실 측근의 승려들을 관리하려는 목적으로 설치되었을 것이라는 반론을 제기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사전이 직관지(중)에 나오는 내정 관부에서도 확인되고, 내도감이라는 이름이 왕이나 왕궁과 관련 있는 것으로 파악한 결과이다. 국가 권력이 불교 교단을 통제하는 데까지 이르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다.
대도서에 대한 다른 기록이 없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어느 견해가 타당한지 확인하기는 어렵다. 다만 대도서가 승려와 불교에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였다는 데에는 대부분 의견이 일치한다.
대도서와 사전 및 내도감의 관계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제시되었는데, 주로 관청의 성격과 역할의 변화를 이름의 변화와 연결시키고 있다. 특히 내성 예하가 사전과 관련하였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내성의 사전이 예부 속사 대도서로 변화하였다고 파악하는 견해, 사전에서 예부 속사 대도서와 내성 예하 사전으로 분화하였다고 보는 견해로 크게 나누어진다. 그리고 내도감은 경덕왕 대에 한식(漢式) 관호로 개정할 때에 대도서가 바뀐 이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역시 정확한 내용을 알기는 힘들다.
소속 관원으로는 장관으로 대정 1명이 있었는데, 경덕왕 대에 정(正)으로 고쳤다가, 나중에 다시 대정으로 되돌렸다고 한다. 관등이 급찬(級湌)부터 아찬(阿湌)까지인 사람을 임명하였다고 한다. 직관지(상)에 대정에 대한 주석에서 대정 아래에 대사(大舍) 2명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덕왕 18년(759) 정월조에 대도서의 대사를 주부(主簿)로 고쳤다는 기록이 있어, 대도서에 대사 관직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러나 이 대사는 별도의 관직이 아니라, 대정 다음 관직인 주서(主書)와 동일한 것이다.
아마 대사가 주부가 되었다가 어느 시점에 주서로 개칭되었고, 뒤에 다시 주사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주서는 관등이 사지(舍知)부터 나마(奈麻)까지인 사람을 임명하였다. 가장 말단인 사(史)는 8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