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세기 초 이래 신라는 왕권 강화를 바탕으로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였다. 점차 확대되는 왕실 사무와 재정을 중앙 행정 관청이 담당하는 국가 행정 및 재정과 분리하여 관리할 필요성이 생겼다. 이에 따라 그 일을 전담할 관청이 필요하게 되었다.
신라 초기에는 왕의 가신적 기구에서 출발한 품주(稟主)가 국가 재정과 엄격히 분리되지 않은 왕실 재정까지 담당하였으나, 이후 국가 재정을 주관하는 조부(調府), 창부(倉部)와 국가 행정을 총괄하는 집사부(執事部)로 분화하였다. 이에 국가 재정 및 행정과 별도로 왕실 사무와 재정을 담당할 관청이 필요해졌다.
그 시작은 585년(진평왕 7)에 대아찬(大阿湌) 화문(和文), 아찬(阿湌) 수힐부(首肹夫), 이찬(伊湌) 노지(弩知)를 각각 대궁(大宮), 양궁(梁宮), 사량궁(沙梁宮)의 사신(私臣)으로 삼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3개 궁은 왕이 거처하는 대궁과 6부 중 양부 · 사량부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양궁, 그리고 사량궁이다.
양부[탁부(喙部)]와 사량부[사탁부(沙喙部)]가 6부 중 왕을 배출하는 핵심적인 2개 부였으므로 모두 왕과 관련이 있는 궁이라 할 수 있다. 이 궁은 거처로서의 의미를 넘어 재화와 전장, 그리고 노비와 같은 경제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사신은 이러한 궁의 자산을 관리하는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신을 임명하였다는 것은 3궁의 자산을 왕실 소유로 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622년(진평왕 44)에 이르면 3궁 전체의 업무를 관장하는 내성을 설치하였고, 사신은 내성의 장관직을 수행하였다. 그 아래로 차관직인 경(卿) 2명과 함께 감(監) 2명, 대사(大舍)와 사지(舍知) 각 1명이 있었다. 왕실 사무와 경제를 총괄하는 관제가 갖추어진 것이다.
내성은 중국의 전내성(殿內省)을 참조하여 붙인 명칭으로 추정된다. 중국의 전내성은 위(魏)나라 전중감(殿中監)으로부터 비롯되었는데, 수나라에 이르러 전내국(殿內局)으로 바꾸었다가 이후 전내성(殿內省)을 설치하였다. 상식(尙食) ‧ 상약(尙藥) ‧ 상사(尙舍) ‧ 상의(尙衣) ‧ 상승(尙乘) ‧ 상련(尙輦) 등 6국을 통솔하게 하면서 음식, 약, 사용 물품, 의복, 말, 수레 등 황제가 필요로 하는 물품을 갖추어 공급하는 역할을 맡겼다.
당나라에서는 이름을 전중성(殿中省)으로 고쳤지만, 수나라 제도를 그대로 계승하였다. 신라에서는 759년(경덕왕 18)에 내성의 이름을 전중성(殿中省)으로 고친 바 있는데, 이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사기』 권39 잡지8 직관지(중)에는 내성을 필두로 모두 114개의 관청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 관청들이 모두 왕실 및 궁궐 관련 사무를 담당하는 관청들이고, 내성은 이들을 관장하면서 사무를 총괄한 것으로 추정된다. 직관지(중)에 이 관청들의 직무가 명기되어 있지는 않지만 명칭을 통해 직무를 유추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내성이 담당한 구체적인 업무를 유추할 수 있다.
첫째, 내성은 궁궐의 관리 업무를 총괄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내성 예하의 관청들 중에 ‘궁’이 이름에 들어가 있는 일련의 관청들이 있다. 이들은 궁을 관리하는 업무를 담당한 것으로 생각된다. 넓게는 왕경 안의 왕실과 왕궁 관련 여러 시설들의 관리 역시 내성 관련 관서들의 직장 중 하나였을 것이다.
둘째, 내성은 각지에 있는 왕실과 관련한 경제적 요소들을 관리하였다고 생각된다. 명을 이름으로 하고 있는 관청들이 있는데, 이들 지역에 있는 왕실의 경제적 기반 관리를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셋째, 내성은 왕실 및 궁궐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들의 생산을 관리하였다. 내성 예하 관청들 중에는 물품 생산 업무를 담당하던 관서들이 다수 존재한다. 이들 생산 관서들은 전문적이고 세분화된 공정을 반영하고 있다.
넷째, 창고와 관련된 여러 관청들이 보여 물품을 보관하고 출납하는 것을 관리 ‧ 감독한 것으로 보인다. 다섯째, 종교와 제사 및 의례 업무를 담당하던 관청들이 예하에 있어서 왕실에서 내성을 통해 제례 관련 행사를 주관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여섯째, 왕실 인사에게 음식이나 의료 등 직접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봉 관련 업무도 총괄하였다. 일곱째, 문한(文翰)과 왕실 인사 교육 및 관리 교육 업무를 담당하던 관청 역시 내성 산하에 있었다.
여덟째, 내성 관련 관서들을 관리하는 업무를 담당한 관청들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내성이 예하 관청들을 총괄하는 직무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내성이 국가의 중앙 행정 관부 체계 하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중앙 행정 관부들과 별개의 조직으로 운영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홉째, 군사 관련 업무를 담당하던 예하 관청들을 통해, 숙위나 왕궁 경비 등을 총괄하는 역할도 수행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외에 음악 관련 관청, 왕릉의 조영과 관리를 담당하는 관청 등도 있었는데, 내성의 업무가 왕실과 궁궐 관련 사무 전체 영역에 걸쳐 있음을 알 수 있다.
내성 예하 관청들의 배치 순서를 볼 때 맨 앞에 나와 있어 가장 중요한 관청으로 여겨지는 것이 내사정전(內司正典)이다. 내사정전은 명칭으로 보아, 중앙 감찰 관부였던 사정부(司正府)와 유사한 역할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내사정전은 746년(경덕왕 5) 혹은 745년에 설치되었다.
삼국통일 이후 강력한 왕권 중심의 중앙 집권 체제를 갖추면서 신라 왕실과 관련된 업무도 늘어났다. 그에 따라 필요한 관원의 숫자도 늘면서 이들을 감찰하는 기구가 필요하여 성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경덕왕 대에 내성의 기능이 확대되었음을 보여준다.
경덕왕 대에는 내성 기능의 확대와 함께 동궁 관아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동궁은 왕위 계승자인 태자가 머무는 곳으로 태자궁이라고도 하였다. 동궁아(東宮衙)는 동궁과 관련한 업무를 총괄하는 기구로, 왕에게 내성이 있다면 태자에게는 동궁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왕권 중심 체제의 심화는 태자 권력의 강화로도 연결되면서, 왕실 업무에서 동궁 관련 업무가 분화 · 독립되는 현상을 가져온 것이다.
한편 신라에 왕실과 관련한 관부로 내성과 거의 대등한 지위를 가지는 곳이 있었는데 바로 왕의 행차 관련 업무를 담당하던 어룡성(御龍省)이다. 어룡성은 내성과 마찬가지로 ‘성’이라는 관부명을 가지는 한편, 장관직 역시 사신(私臣)으로 같았다. 이는 어룡성이 내성에 예속되었다기보다는 대등하게 병렬하는 관부임을 보여준다. 어룡성의 장관직인 사신은 801년(애장왕 2)에 설치되었는데, 사신 설치 이전까지 어룡성은 왕의 행차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하위 관청이었다.
그러나 어린 조카 애장왕을 대신하여 섭정한 김언승(金彦昇), 곧 후의 헌덕왕은 801년 어룡성에 사신을 두고 자신이 취임한다. 그는 어룡성 사신이라는 관직을 통해 왕실 관련 업무 역시 장악하고 애장왕의 왕권을 제약하려 한 것으로 여겨진다.
김언승이 이러한 목적으로 어룡성 사신 관직을 설치하였기 때문에 어룡성은 내성과 대등한 급의 관부로 격상되었고, 내성의 역할을 상당히 분점한 것으로 여겨진다. 어룡성 산하에는 왕을 시종하고 조고(詔誥)를 전담하는 등 문한(文翰)을 관장한 관부였던 세택(洗宅)이나 도서 관리 및 왕과 태자에 대한 교수를 담당하던 곳으로 여겨지는 숭문대(崇文臺)가 소속되어 있었는데, 이는 어룡성이 단순히 왕의 행차만을 담당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 외에 제사 관련 업무를 담당한 곳으로 보이는 관청들과 내성 산하 관청들의 급여를 관리하던 곳으로 여겨지는 늠전(廩典), 그리고 왕실의 물품 공급 및 보관을 담당하던 일련의 관청들도 소속되어 있었다. 이것을 보면, 내성의 핵심 기능인 왕실 재정에 관한 부분이 어느 정도 어룡성에 넘어갔음을 알 수 있다. 내성의 역할을 나누어 담당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내성과 어룡성, 그리고 동궁이라는 3개의 주 관부를 중심으로 그에 속한 하위 관청들이 왕실 관련 업무를 나누어 맡았다고 볼 수 있는데, 내성의 맡은 바 역할이 쇠퇴하지 않고 유지 ・ 증대되었음을 보여준다. 또 일반 중앙 행정 관청이 수행해야 할 직무 중에 일부도 담당하는 경우가 있는데, 단순한 궁중 사무를 넘어서 왕과 관련한 업무 전반으로 그 기능이 확대되어 갔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러한 현상은 신라 하대에 진골 귀족들 사이에 왕위계승 분쟁이 지속되면서 근시 측근 중심의 정치로 변질되었던 것과 일정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