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문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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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제도
신라시대의 관서.
이칭
이칭
숭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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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신라시대의 관서.
내용

어룡성(御龍省)에 소속되어 왕실의 경적도서(經籍圖書)를 장악함과 아울러 동궁(東宮)에 대한 교수를 담당하였다. 설치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경덕왕 때 상문사(詳文司)가 한림대(翰林臺)로 개칭될 때, 당나라의 숭문관(崇文館)을 모방하여 만든 것으로 추측된다.

신라 말기에는 숭문관으로 개칭되었다. 소속 관원으로는 장관직인 낭(郎) 2인을 비롯하여 사(史) 4인, 종사지(從舍知) 2인을 두었다. 신라 말기에는 낭을 학사(學士)·직학사(直學士)로 고친 듯하다. 현재 남아 있는 금석문 자료에 의하면 경문왕 때의 명필인 요극일(姚克一)이 숭문대랑(崇文臺郎)을 역임하였다고 한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朝鮮金石總覽』 上(1919)
「나말여초(羅末麗初) 근시기구(近侍機構)와 문한기구(文翰機構)의 확장(擴張)」(이기동, 『역사학보(歷史學報)』 77, 1978 ; 『신라(新羅) 골품제사회(骨品制社會)와 화랑도(花郞徒)』, 일각, 1984)
「新羅內廷官制考」 下(三池賢一, 『朝鮮學報』 62,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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