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나말(奈末), 내말(乃末)이라고도 한다.『삼국사기』에는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때 제정되었다고 하였으나, 520년(법흥왕 7)의 율령(律令) 공포 때에 제정된 것으로 보고 있다.
나마는 이사금 시기의 대세력에 부속된 가신(家臣)들 중에서 실무를 관리하는 기능을 맡은 자의 명칭에서 연원하는 것으로 보인다.『삼국사기』직관지(職官志)를 통해 살펴 볼 때, 중앙 관부 대부분에 배치된 중간 관인층 및 전문지식인 혹은 기술전문직을 대변하는 관등으로 분석되며, 신라의 관직체제 중에서 대사(大舍), 주서(主書), 좌(佐) 등과 같은 실무행정을 담당하던 계층의 관등으로 나타난다.
금석문 상에서 나마는 「「울진봉평리신라비(蔚珍鳳坪里新羅碑)」에서」에서 교사(敎事) 주체로 참여한 관리의 하한이며, 또한 「영일냉수리신라비에(迎日冷水里新羅碑)」도 경위(京位)의 하한으로 나타난다. 즉 상고기(上古期) 때 나마가 국가의 중요한 일을 의논하는 화백회의 구성원의 하한으로 6부의 지배세력에 포함되었으나 이후 관등의 분화에 따라 중간실무층으로 고정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대나마(大奈麻)는 나마에서 분화된 것이다.
나마는 진골(眞骨)·육두품 이외의 오두품도 받을 수 있었으며, 바로 아래 관등인 대사(大舍)와는 큰 차이가 있었다. 이른바 특진제도로서 중위제도(重位制度)가 설치되어 중나마(重奈麻)에서 칠중나마(七重奈麻)까지 있었다고 하나, 그 실재에 대하여는 이를 의심하는 견해도 있다. 즉, 오두품 출신에 대한 중위는 제10등 관계인 대나마에 설치되어 있었으므로, 나마에 이를 설치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마의 중위는 사두품 출신의 국학(國學) 수학자에 대한 특전으로서 설치된 것이라 하여, 그 실재를 긍정하는 견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