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두품 이하의 신분에 속한 사람들을 위해 설정되었다.
신라의 관등제도는 신분제도인 골품제(骨品制)와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었다. 즉, 진골(眞骨)은 최고관등인 이벌찬(伊伐飡)까지 승진할 수 있었으나 6두품은 제6관등인 아찬(阿飡)까지, 5두품은 제10관등인 대나마(大奈麻)까지, 4두품은 제12관등인 대사(大舍)까지로 승진의 한계가 정해져 있었다.
이러한 관등과 신분과의 계층적 4구분은 복색(服色)·관직과도 상호 대응되어 각 계층마다 복색을 달리했으며, 관직에의 취임도 진골을 제외하고는 각각 상한선이 설정되어 있었다. 이처럼 개인적 신분표시인 관등의 승진이 골품에 의해 엄격히 제한됨에 따라 6두품 이하에 속한 사람들은 규정 이상의 관등을 받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그들을 위해 관등상의 특진제도인 중위제가 제정되었다. 『삼국사기』 직관지에 의하면 중위가 설정된 관등은 아찬·대나마·나마의 관등이었다. 즉, 아찬에는 중아찬(重阿飡)에서 4중아찬(四重阿飡)까지, 대나마에는 중(대)나마(重大奈麻)에서 9중(대)나마(九重大奈麻)까지, 나마에는 중나마에서 7중나마까지의 중위가 설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밖에도 『삼국사기』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856년(문성왕 18)에 만들어진 「규흥사종명(窺興寺鐘銘)」에 3중사간(三重沙干)이라는 용어가 보여 제8관등인 사찬(沙飡)에도 최소한 3중사찬까지의 중위가 설정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찬 관등의 중위 설정은 진골출신자의 독점물인 대아찬(大阿飡) 이상의 관등을 가질 수 없었던 6두품이 아찬까지 이른 후에 그들에게 특진의 길을 열어주기 위한 조처로 보인다. 또한, 대나마의 중위 설정도 위와 같은 의도에서 급찬(級飡) 이상의 관등을 가질 수 없었던 5두품 신분자에게 특진의 길을 마련해주기 위해 설정되었다. 이에 비해 사찬의 중위 설정은 삼국통일 후 지방민에 대한 특진의 길을 마련해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나마의 경우는 지방민인 이른바 차촌주(次村主)에 대한 특진방법이었거나 아니면 4두품 출신의 국학(國學) 수학자들을 파격적으로 대우하기 위해 대사보다 1관등 높은 나마에 중위가 설정된 것이 아닐까 추측하기도 한다. 혹은 옛 백제인을 위한 특진의 방법이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한편, 최근에는 이와는 달리 신라가 삼국통일전쟁 당시부터 몇 차례 단행된 문무관 전원에 대한 1관등 승진조처가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중위제가 성립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관작 1급 특진은 661년(문무왕 1) 9월과 668년 10월 22일에 각각 백제와 고구려 정복달성을 기념한 논공행상으로 있었고, 또 702년(성덕왕 1) 9월과 785년(원성왕 1) 2월에도 있었다.
그런데 이 경우 6두품 이하의 출신으로서 바로 관등승진의 상한선에 걸려 있는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생기므로, 그들을 위해서 중위제를 설정하였다. 그러므로 중위제는 진골 중심의 골품제와 비진골(주로 6두품) 중심의 관료제라는 두개의 이질적인 계층·원리가 서로 마찰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도달한 일종의 타협점이라고 이해하기도 한다.
중위제의 설정과 운용은 6두품 이하의 왕경인과 지방민을 대상으로 한 것이고, 진골은 중위제의 적용대상이 아니었다. 중위제 목적은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부터 두품(頭品)신분자와 지방민의 구실이 증대되어 정치적인 입지가 강화됨에 따라 그들을 진골 중심의 골품체제 내에 융화, 무마시키기 위한 조처의 일환이었다. 즉, 엄격한 골품제 사회에서 신분간의 갈등을 완화시키기 위해 제정·운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중위제는 『삼국사기』와 8∼10세기의 각종 금석문에 나타나는 점으로 보아 신라 중·하대에 걸쳐 골품제 내의 신분갈등의 완충제 구실을 하면서 지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골품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