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수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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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시대에 일정 기간 동안 왕경(王京)에 머물며 여러 행정 관서에서 근무한 주리(州吏) 또는 주리를 왕경에 머물게 하여 여러 행정 관서에서 근무하게 한 제도.
제도/법령·제도
시행 시기
통일신라
내용 요약

상수리는 통일신라시대에 일정 기간 동안 왕경(王京)에 머물며 여러 행정 관서에서 근무한 주리(州吏) 또는 주리를 왕경에 머물게 하여 여러 행정 관서에서 근무하게 한 제도이다. 685년(신문왕 5)에 9주를 정비한 뒤 주리를 왕경에 올려 보내 여러 관청에서 근무하게 하는 제도를 정비하였다. 주리에게 상수역(上守役)의 대가로 상수리 소목전(燒木田)을 지급하였다. 상수리제도는 고려시대에 기인제도로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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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통일신라시대에 일정 기간 동안 왕경(王京)에 머물며 여러 행정 관서에서 근무한 주리(州吏) 또는 주리를 왕경에 머물게 하여 여러 행정 관서에서 근무하게 한 제도.
내용

삼국유사』에 따르면, 나라의 제도에 해마다 외주(外州)의 이(吏) 가운데 한 사람을 주1에 있는 여러 행정 관서에 올려 보내 지키게 하였는데, 무진주(武珍州)의 이(吏) 안길(安吉)이 마침 상수(上守)할 차례가 되어 상경(上京)하여 문무왕주2 거득공(車得公)을 찾아가 후한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686년(신문왕 6)에 무진군을 무진주로 삼았다. 그 이전에 전남 지역에 설치한 주는 발라주(發羅州: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시)였다. 문무왕 때에 안길은 무진주의 이(吏)가 아니라 무진군의 촌주였을 가능성이 높다. 591년(진평왕 13)에 건립된 「남산신성비」에 군상촌주(郡上村主), 군중상인(郡中上人)이 나온다. 상인은 촌주를 가리키며, 모두 ‘군의 촌주(상인)’, 즉 군을 대표하는 촌주로 이해한다. 안길은 바로 무진군을 대표하는 촌주였다고 짐작된다.

안길의 사례는 문무왕 때에 발라주의 군 촌주 가운데 한 사람을 왕경에 올려 보내 여러 행정 관서에서 근무하게 하였음을 나타낸다. 685년(신문왕 5)에 9주를 정비한 뒤 주의 장관인 도독(都督) 아래에서 행정 실무를 담당하던 주6를 일정 기간 동안 왕경에 머물게 하면서 여러 행정 관서에서 근무하게 하는 형식으로 바뀐 것으로 짐작된다. 상수리 제도는 고려시대에 기인제도로 발전하였다.

신라는 왕경에 머물며 여러 행정 관서에서 근무하던 주리에게 상수역(上守役)의 반대급부로 주3을 지급하였다. 소목전은 산림과 밭으로 구성되었다. 소목전으로 지급된 산림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주4를 금하였다. 상수리 소목전은 고려시대 주7의 선구적 형태이며, 역에 대한 반대급부로 지급된 토지라는 면에서 역전제(役田制)의 효시로 이해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무진주의 상수리에게 경주 남쪽에 위치한 성부산(星浮山) 아래 지역을 소목전으로 지급하였는데, 산 아래에 있는 주5의 밭이 풍작이면 무진주도 풍작이 되고, 흉년이면 무진주도 역시 흉년이 들었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소목전의 풍흉 여부가 무진주의 풍흉을 결정하는 기준이 되었다고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참고문헌

원전

『삼국유사』

논문

김명진, 「고대 질자 · 상수리와 고려 태조대 질자 · 기인」(『복현사림』 38, 경북사학회, 2020)
김유종, 「고려시대 기인제도의 운영과 기인의 위상」(『한성사학』 29, 한성사학회, 2014)
안병우. 「6~7세기의 토지제도」(『한국고대사논총』 4,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한우근, 「여대의 기인선상규제」(『역사학보』 14, 역사학회, 1961)
김성준, 「기인의 성격에 대한 고찰-하」(『역사학보』 11, 역사학회, 1959)
김성준, 「기인의 성격에 대한 고찰-상」(『역사학보』 10, 역사학회, 1958)
주석
주1

서울을 달리 이르는 말.    바로가기

주2

아버지의 첩에게서 태어난 아우.    우리말샘

주3

소목으로 쓸 나무를 가꾸어 기르는 말림갓.    바로가기

주4

땔나무를 베어 두었다가 마른 뒤에 거둠.    우리말샘

주5

‘묘(畝)’의 원말. 논밭 넓이의 단위. 한 묘는 한 단(段)의 10분의 1, 곧 30평으로 약 99.174㎡에 해당한다.    바로가기

주6

지방의 큰 행정 단위인 주에 속하여 일하던 아전.    우리말샘

주7

기인역에 복무 중인 사람들의 생계를 위해 나누어 주던 토지.    우리말샘

집필자
전덕재(단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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