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국유사』에 따르면, 나라의 제도에 해마다 외주(外州)의 이(吏) 가운데 한 사람을 왕경(王京)에 있는 여러 행정 관서에 올려 보내 지키게 하였는데, 무진주(武珍州)의 이(吏) 안길(安吉)이 마침 상수(上守)할 차례가 되어 상경(上京)하여 문무왕의 서제(庶弟) 거득공(車得公)을 찾아가 후한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686년(신문왕 6)에 무진군을 무진주로 삼았다. 그 이전에 전남 지역에 설치한 주는 발라주(發羅州: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시)였다. 문무왕 때에 안길은 무진주의 이(吏)가 아니라 무진군의 촌주였을 가능성이 높다. 591년(진평왕 13)에 건립된 「남산신성비」에 군상촌주(郡上村主), 군중상인(郡中上人)이 나온다. 상인은 촌주를 가리키며, 모두 ‘군의 촌주(상인)’, 즉 군을 대표하는 촌주로 이해한다. 안길은 바로 무진군을 대표하는 촌주였다고 짐작된다.
안길의 사례는 문무왕 때에 발라주의 군 촌주 가운데 한 사람을 왕경에 올려 보내 여러 행정 관서에서 근무하게 하였음을 나타낸다. 685년(신문왕 5)에 9주를 정비한 뒤 주의 장관인 도독(都督) 아래에서 행정 실무를 담당하던 주리(州吏)를 일정 기간 동안 왕경에 머물게 하면서 여러 행정 관서에서 근무하게 하는 형식으로 바뀐 것으로 짐작된다. 상수리 제도는 고려시대에 기인제도로 발전하였다.
신라는 왕경에 머물며 여러 행정 관서에서 근무하던 주리에게 상수역(上守役)의 반대급부로 소목전(燒木田)을 지급하였다. 소목전은 산림과 밭으로 구성되었다. 소목전으로 지급된 산림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초채(樵採)를 금하였다. 상수리 소목전은 고려시대 기인전(其人田)의 선구적 형태이며, 역에 대한 반대급부로 지급된 토지라는 면에서 역전제(役田制)의 효시로 이해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무진주의 상수리에게 경주 남쪽에 위치한 성부산(星浮山) 아래 지역을 소목전으로 지급하였는데, 산 아래에 있는 30무(畝)의 밭이 풍작이면 무진주도 풍작이 되고, 흉년이면 무진주도 역시 흉년이 들었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소목전의 풍흉 여부가 무진주의 풍흉을 결정하는 기준이 되었다고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