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춘(金龍春)은 진지왕(眞智王)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기오공(起烏公)의 딸 지도부인(知道夫人)이다. 진평왕(眞平王)의 딸 천명부인(天明夫人)과 혼인하여 태종무열왕이 되는 김춘추(金春秋)를 낳았다. 『삼국사기』 622년(진평왕 44) 2월 및 635년(선덕왕 4) 10월 기사와 「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 금동찰주본기(慶州皇龍寺九層木塔金銅刹柱本記)」에는 용수(龍樹)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단, 용수가 622년에 이미 이찬(伊湌)의 관등을 소지하고 있음과 달리, 「김유신」 열전에는 629년(진평왕 51) 고구려 낭비성(娘臂城) 공격 당시 용춘의 관등이 파진찬(波珍湌)으로 나와 용수와 용춘을 별도의 인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635년(선덕왕 4) 10월 기사와 『삼국유사』 '황룡사구층탑조'에 용춘과 용수가 동일인이라는 주석이 달려 있어 같은 인물의 이칭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선덕왕의 즉위와 관련하여 진평왕 사망 당시 “ 성골(聖骨) 남자가 없어서” 성골 여성이 즉위하게 되었다는 언급이 남아 있어, 당시 용수는 진지왕의 아들임에도 성골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성골과 진골의 구분에 대해서는 기록에 그 기준이 남아 있지 않으므로, 용춘이 성골이 아니었던 이유에 대한 해석을 통해 그 구분 기준을 파악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아버지 진지왕의 폐위를 계기로 신분이 격하되었다는 견해와, 성골은 진평왕의 아버지인 동륜태자(銅輪太子)의 직계만을 대상으로 생성되었다는 견해, 왕궁에 거주하는 왕과 그 형제 등 공동가족이 성골로 구분되어 새로운 왕이 즉위하면 전왕(前王)의 형제 등은 진골이 되었다는 견해, 단순히 어머니 지도부인의 신분이 성골이 아니어서 용춘이 성골일 수 없었다는 견해 등 다양한 해석이 제기되었다. 『삼국유사』 '도화녀비형랑조(桃花女鼻荆郎条)'에 나오는 비형랑(鼻荊郞)이 곧 용춘이라는 견해도 있다.
622년(진평왕 44) 2월에 왕실 관련 업무를 총괄하는 내성(內省) 사신(私臣)으로 임명되어 대궁(大宮)과 양궁(梁宮), 사량궁(沙粱宮)을 함께 관장하였다. 629년(진평왕 51) 8월에는 대장군으로서 김서현(金舒玄) · 김유신(金庾信) 등과 함께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는 전공을 세웠다. 635년(선덕왕 4) 10월에는 이찬 수품(水品)과 함께 주(州)와 현(縣)을 다니며 위무(慰撫)하는 임무를 맡아 수행하였다.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 금동찰주본기」에 따르면, 선덕왕의 명을 받고 황룡사구층목탑의 건립을 주관하였다고 한다.
태종무열왕은 즉위 직후인 654년(태종무열왕 1) 4월에 김용춘을 문흥대왕(文興大王)으로 추봉(追封)하였다. 『삼국유사』 왕력(王曆)에는 "용춘 각간 문흥갈문왕(文興葛文王)"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687년(신문왕 7) 3월 신문왕의 조묘(祖廟) 치제(致祭) 기사에서 태조대왕, 진지대왕, 태종대왕, 문무대왕과 더불어 오묘(五廟)에 해당한다고 여겨지는 5위(位)에 모셔져 있었음이 확인된다.